정석범의 Mystic Art Story

‘그녀는 그 방에 있었다. 숨은 벌써 끊어졌고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몸은 침대를 가로질러 누워 있었고 머리는 아래로 축 늘어져 있었다. 일그러진 표정의 창백한 얼굴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이 끔찍한 광경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1797~1891)의 괴기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결혼 첫날 밤 자신이 창조한 괴물을 제거하기 위해 신부를 안전하게 다른 방에 남겨뒀는데 그만 살해당하고 만 것이다.
‘악몽’, 1781년, 캔버스에 유채, 101.6×127cm, 디트로이트 예술원
‘악몽’, 1781년, 캔버스에 유채, 101.6×127cm, 디트로이트 예술원
18세 소녀가 착상(출간은 3년 후인 1818년)해 서양 괴담의 대명사가 된 이 소설은 마치 헨리 푸젤리(Heinrich Fuseli·1741~1825)의 명작 ‘악몽(The Nightmare·1781)’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하다. 푸젤리의 그림은 당대 영국에서 대단한 화제를 뿌렸을 뿐만 아니라 울스턴크래프트의 부모가 화가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기 때문에 작가에게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푸젤리의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은 침대 위에 가로놓인 여인의 신체 위에 앉아 있는 괴물의 존재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몽마(夢魔)다. 서구의 전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이 괴물은 여인의 꿈속에 나타나 여인을 겁탈하는데 특히 혼자 잠자는 여성을 집중적으로 노린다고 한다.

이 괴물과의 정사가 반복되면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게 되고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 된다고 한다. 몽마의 존재에 대한 광범한 믿음은 인간 내면에 자리한 원초적 공포심이 그만큼 뿌리 깊다는 반증이다.

몽마 뒤편의 커튼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눈먼 말도 처녀성에 대한 침범을 상징한다. 말이 남성의 성적 에너지를 상징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림 속의 여인은 이중으로 유린당하고 있는 것이다. 괴물로부터 반복적으로 침입을 받은 것일까. 그림 속의 여인은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여인처럼 거의 숨이 끊어진 것처럼 보인다.

푸젤리 작품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인간 내면에 잠재한 공포는 낭만주의 화가들의 단골 소재였다. 18세기 말은 이성을 중시한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과 프랑스대혁명을 계기로 분출된 개인의 욕구에 주목한 시기였다.

그동안 도외시됐던 감각의 세계에서 인간의 진실을 찾으려는 경향과 과거 문화에 대한 동경이 싹튼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인간 내면에 잠자고 있는 무의식과 꿈의 세계에 대한 관심도 이런 낭만주의적 기운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푸젤리는 그 선구적인 작가의 한 사람으로 그는 인간 내면의 공포심을 파헤친 ‘악몽’을 발표해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다.
‘악몽’, 1790~91년, 캔버스에 유채, 77×64cm, 프랑크푸르트 괴테박물관
‘악몽’, 1790~91년, 캔버스에 유채, 77×64cm, 프랑크푸르트 괴테박물관
그러나 푸젤리가 이 작품을 제작한 직접적인 계기는 개인사적인 배경에서 비롯됐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나고 자란 푸젤리는 대학 시절 관상학자로 유명한 라바터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1761년 그의 부탁으로 치안판사의 비리를 폭로하는 일을 거들게 된다.

그러나 이 일에 앙심을 품은 치안판사가 친인척을 총동원해 복수에 나섬에 따라 기구하게도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로부터 4년간 그는 독일 각지를 떠돌게 되는데 하루하루 죽음의 공포 속에서 악몽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1765년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 땅을 밟고 나서야 그의 공포의 나날은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악몽 같은 과거의 기억은 시시때때로 수면 위로 떠올라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작품 ‘악몽’ 속에는 인간의 원초적 공포심과 함께 그런 개인사적인 악몽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 속에는 또 한 겹의 악몽이 자리하고 있다. 푸젤리는 영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후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가 귀환하는 길에 라바터의 조카인 안나 란돌트를 만나 열정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는 란돌트에게 청혼했지만 그의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란돌트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 버려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푸젤리는 이 일을 계기로 란돌트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운다.

그는 작품 ‘악몽’ 속에서 란돌트를 몽마의 희생양으로 묘사하고 그 그림의 뒷면에는 란돌트의 초상화를 그려 넣어 일종의 저주를 퍼부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상처받은 자신의 영혼을 치유하고자 했다.
‘잠자는 두 여인을 떠나는 몽마’, 1793년, 캔버스에 유채, 100×124cm, 취리히
‘잠자는 두 여인을 떠나는 몽마’, 1793년, 캔버스에 유채, 100×124cm, 취리히
이외에도 여러 점의 ‘악몽’을 반복적으로 그린 것은 그가 이 일로 인해 얼마나 고통에 시달렸는지 생생히 증언한다. 이때부터 푸젤리는 악몽으로 점철된 현실 세계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는 줄곧 현실 너머의 가상 세계에서 작품의 원천을 발견했다.

그는 정령들이 마법을 행하는 초현실적인 세계 속에 안주할 뿐 결코 현실 세계로 고개를 돌리는 법이 없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초현실의 세계 속에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던 것이다.

푸젤리의 이와 같은 무의식의 세계, 비현실 세계에 대한 집착은 윌리엄 블레이크 같은 후배 낭만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20세기 정신분석학의 개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프로이트가 빈의 자택에 ‘악몽’의 판화를 걸어놨다는 점과 카를 융이 자신의 대표작인 ‘인간과 상징(1961)’에서 푸젤리의 작품을 여러 차례 언급한 것은 그 단적인 예다. ‘악몽의 사나이’ 푸젤리는 악몽 같은 삶으로 인해 불멸의 화가로 남게 됐다.



정석범 _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홍익대, 명지대 등에서 강의했고 저서로 ‘어느 미술사가의 낭만적인 유럽문화기행’,‘아버지의 정원’, ‘유럽예술기행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