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예술가 소마미술관 이성순 명예관장

이성순 관장은 50여 년간 염색과 보자기 등으로 예술 세계를 펼친 1세대 섬유예술가다. 2008년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정년퇴임한 후 소마미술관 명예관장으로 있으며 작품 활동을 하는 그를 통해 섬유예술의 미래를 모색해본다.

이성순 소마미술관 명예관장은 한국인 최초로 시카고예술대(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SAIC)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예술가다. 한국인으로 최초이자 외국인으로 두 번째다. 1866년 설립된 SAIC는 미국 미술대학 중 최고 명문이다. 월트 디즈니, 오손 웰스, 조지아 오키프, 제프 쿤스가 이 학교 출신이다. 이 관장은 이화여대 미대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한 후 유학을 떠나 1978년에 이 학교를 졸업했다.
[Artist] “가장 한국적인 보자기로 세계인을 아우르다”
친숙하고 말을 잘 들어 시작한 섬유예술

서울 부암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 관장은 SAIC에서 받은 명예박사 학위가 개인적인 영광임과 동시에 작가로서 부담도 된다고 했다. 섬유예술 1세대 작가로서 새로운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부담이 자리 잡고 있다.

“저희가 한창 활동하던 1970~80년대만 해도 섬유예술이 전 세계적으로 대접을 받았어요. 1984년 한국섬유미술가회가 창립되고 한동안 프랑스, 미국, 일본 등의 대형 미술관에서 초청이 연이었거든요. 아쉬운 점은 작품이 시장과 연결되지 않고 전시로 끝났다는 점이에요. 미국이나 프랑스 작가들은 화상(畵商)과 연결돼 그 맥을 이어갔거든요.”

50여 년간 예술가의 길을 걸어온 한국 섬유예술의 산증인다운 질책과 아쉬움이 묻어난 말이었다. 그는 섬유예술이 순수미술로 푸대접을 받는 듯해 그것이 아쉽다. 많은 공예가들이 겪는 딜레마가 거기에 있다.

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1970년대만 해도 섬유예술은 순수미술의 한 영역으로 대접받았다. 사실 그가 학교를 다니던 1960년대에는 예술의 경계가 지금처럼 명확하지 않았다. 생활미술과에서 금속, 섬유, 도자기 등을 모두 다루던 시절이었다.

“그중에서 섬유를 택한 건 아마도 제 말을 가장 잘 듣는 게 섬유였기 때문이에요. 가장 친근하기도 하고요.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배냇저고리를 입고, 죽어 무덤에 함께 묻히는 것도 섬유잖아요. 그만큼 친숙한 게 섬유예요.”

그는 어려서부터 바느질을 잘했다. 다림질과 재봉에도 재주가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섬유를 선택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런데 하면서 느끼는 건, 말을 잘 듣는 듯하지만 그만큼 예민한 게 섬유라는 사실이다.
[Artist] “가장 한국적인 보자기로 세계인을 아우르다”
섬유예술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섬유예술가 이성순의 전반기 작업은 염색이었다. 바느질도 했지만 염색 작업이 주였다. 화가들이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 그는 천에 그림을 그리듯 염료를 입혔다. 이런 그의 작품 세계는 2000년 SAIC에 교환교수로 가면서 진화한다.

2000년 이후 한국에서는 섬유예술이 섬유디자인과 동일시됐다. 하지만 산업은 산업을 아는 사람들의 몫이고, 섬유예술은 다른 영역이다. 섬유예술(textile fine art)과 섬유디자인(textile design)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만 독립된 공간에서 존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섬유라는 물성을 가지고 산업으로 갈지, 순수예술로 갈지 목표점을 정확히 해야 하는 것이다.

“SAIC도 제가 다닐 때는 과 명칭이 ‘파이버 아트(Fiber Art)’에서 ‘파이버 머티리얼 스터디(Fiber Material Study)’로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디자인도 있었지만 지금은 온전히 순수예술로 방향을 잡았어요. 그런 방향 설정이 중요하다고 봐요. 섬유는 여전히 매력적인 물성을 지녔고, 그걸 발전시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Artist] “가장 한국적인 보자기로 세계인을 아우르다”
이성순 관장은 설치한 작품을 실생활에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활에 쓴다고 예술 작품이 아니라는 건 어패가 있다. 전시에서는 작품이지만 쓰려고 하면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이성순 관장은 설치한 작품을 실생활에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활에 쓴다고 예술 작품이 아니라는 건 어패가 있다. 전시에서는 작품이지만 쓰려고 하면 쓸 수도 있는 것이다.
2000년 SAIC를 다시 찾았을 때 재료나 교육보다 더 큰 충격은 그런 변화된 문화였다. 외국 작가들처럼 못할 바에는 우리 것이라도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자기 것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는 후학들도 이 말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세계 예술 시장의 다양한 변화를 본 그가 선택한 게 보자기다. 그때부터 그는 보자기 연구에 몰두했다. 한국, 일본, 미국을 다니며 보자기를 연구했고, 젊은 제자들과 함께 작업하며, 전시도 했다. 그런 노력이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2010년 SAIC에서 명예박사 학위까지 받게 됐다.
[Artist] “가장 한국적인 보자기로 세계인을 아우르다”
[Artist] “가장 한국적인 보자기로 세계인을 아우르다”
예술작품도 실생활에 활용 가능해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은 자신의 집 인테리어에도 쓰고, 몇몇 작품은 지인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는 설치한 작품을 실생활에도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활에 쓴다고 예술 작품이 아니라는 건 어패가 있다. 전시에서는 작품이지만 쓰려고 하면 쓸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침 그때 이사를 가게 됐어요. 단독주택에 살다 아파트에 가니까 앞집이 보여 당황스러웠어요. 그래서 예전 작품을 커튼으로 바꿔 꾸몄는데, 평론가들이 그걸 작품으로 만들어보라고 하더군요. 그 성화에 2004년 인테리어전을 두 차례나 하게 됐죠.”
[Artist] “가장 한국적인 보자기로 세계인을 아우르다”
그는 앞으로 한동안은 조각보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다. 남의 손 많이 빌리지 않고 그의 손만으로도 수월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해온 염색작업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소마미술관(Seoul Olympic Museum of Art·SOMA)으로 오면서 제대로 작업을 못한 건 사실이에요. 올해 말이면 임기가 끝나기 때문에 이제 제 작업을 해야죠. 소마미술관 관장으로 있으면서 예술의 더 넓은 세계를 보고 경험할 수 있어 좋았어요. 작업 조금 못한 게 그래서 아쉽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잘 배우고 잘 쉬었다고 생각하고 제 작업에 충실할 겁니다.”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