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위스 조세조약 개정안이 이르면 7월 발효될 전망이다. 이로써 조세피난처로 알려진 스위스 은행에 개설된 한국인 계좌 정보를 국세청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수면 밖으로 나오는 ‘검은 돈’이 금융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아본다.



스위스에서 보내온 58억 원

지난해 2월 스위스 세무당국이 한국 국세청에 500만 스위스프랑(약 58억 원)을 보내왔다. 스위스 세무당국이 한국 상장주식 배당세액을 징수해 국세청에 환급한 돈이다. 스위스 금융기관 계좌를 통해 국내 주식에 우회 투자한 뒤 받은 배당금에 세금을 매겨 보내준 것이다. 양국 간 조세조약에 따른 조치였다.

한·스위스 조세조약에 따라 우리나라 세무당국은 스위스 계좌를 통해 한국에 투자한 뒤 발생한 배당금에 원천징수를 한다. 세율은 국적에 따라 다르게 적용한다. 스위스 거주자는 15%, 제3국 국적자의 경우 20%다.

지난해 보내온 돈은 국적 분류가 잘못된 부분에 대한 세금 차액이다. 우리 정부가 스위스 거주자로 파악해 15%로 과세했으나, 스위스 측이 한국에서 보낸 배당금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실제는 스위스인이 아닌 경우를 파악해 5%를 스위스 금융기관들로부터 환수해 한국 국세청 계좌로 보낸 것이다.

단순한 국제징세 업무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이 에피소드가 화제가 된 이유는 이 돈이 스위스 금융기관을 통해 불법 유입된 국내 자금 규모를 파악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스위스 당국이 보내온 추징금이 58억 원이라면, 파악이 안 된 제3국 국적자가 스위스 금융기관을 통해 국내에 우회 투자한 자금의 규모가 많게는 1조 원 안팎이라는 계산이다. 같은 해 스위스 금융기관을 통한 국내 상장주식 전체 투자규모는 4조 원이다. 이와 관련해 ‘세금 부담을 안으면서 스위스 금융기관을 통해 우회적으로 불법 유입된 돈은 대기업을 포함한 대주주들이 불법으로 조성한 비자금이거나 불법 유출된 정치자금일 것’이라는 시각에 무게가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국세청에서 받은 것은 ‘돈’뿐이었다. 돈의 출처에 대한 정보는 받지 못했다. 국세청이 “투자 금액은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나간 불법 반출 금액으로 탈세 자금일 가능성이 높다”며 “스위스에 숨겨놓은 검은 자금의 일부가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된 것으로 파악된다”고 추측했으나, 스위스인이 아닌데도 스위스 계좌로 한국에 투자한 사람의 신원은 물론 그중 한국인이 몇 명인지도 알 수 없었다. 비자금 등 음성 자금의 전용 창구로 활용돼온 ‘검은 돈의 성지’ 스위스 은행의 철저한 비밀주의 원칙 때문이었다.
[Policonomy] 빗장 풀리는 스위스 비밀계좌
스위스 비밀계좌, 이르면 7월부터 볼 수 있어

더 이상 ‘성지’도 안전하지만은 않게 됐다. 이르면 이달부터 국세청이 스위스 비밀계좌에 숨겨둔 돈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개인·기업 명의로 스위스에 개설된 계좌 명세와 금융거래 내역을 포함한 조세 정보 교환을 담은 한·스위스 조세조약 개정안이 이르면 7월 발효될 예정이다. 기업이나 개인이 스위스 은행에 숨겨둔 비자금이나 부유층이 탈세를 위해 빼돌린 금융자산 내역을 국세청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금 추적을 피해왔던 기업주와 부유층에 대한 비자금 추적과 역외탈세 적발이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1981년 체결한 기존 양국 간 조세조약은 금융 정보 교환에 관한 규정이 없어 지금까지는 일부 국내 부유층이 스위스 은행의 비밀금고에 재산을 은닉해도 과세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작년 초 ‘선박왕’ 권혁 회장에 대해 역외탈세 조사가 한창이던 때에도 국세청은 스위스 은행 계좌번호까지 포착했지만, 계좌 정보 공개를 거절당해 결국 스위스를 제외한 나라에서의 탈세 혐의만 조사한 뒤 4101억 원을 추징한다고 발표한 후 조사를 마무리 짓기도 했다.

정보 교환은 국세청이 국내 탈세 혐의자 명단을 넘기면 이들이 보유한 스위스 내 모든 금융계좌 정보를 받는 식으로 이뤄지게 된다. 정보 공개 요청은 과세당국인 국세청이 전담하고 과세 목적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개정안은 2010년 말 양측이 서명을 마쳤고, 올 2월에는 비준안이 우리 측 국회를 통과해 스위스 의회의 비준만을 남겨놓고 있다. 스위스는 일반 법안과 결의에 대해서 공고 후 5만 명의 서명을 확보해 국민투표를 발의할 수 있도록 3개월의 기간이 주어진다. 조세조약 개정안이 지난 3월 27일에 제출돼 6월 26일 이후 스위스 의회에서 비준을 마치면 한국과의 마지막 비준서 교환 절차를 거친다. 이번 개정안은 비준서 교환 15일 후 발효될 예정이어서 7~8월 중 절차가 완료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국세청 고위관계자는 “일단 개정안이 발효되면 우선적으로 과거 조사 과정에서 막혔던 사안에 대한 정보 공개 요청을 시작할 것”이라고 전했다. 개정안에 따르면 비밀계좌 정보 공개의 소급 적용 시기는 2011년 1월 1일이다. 이에 따라 권 회장의 스위스 계좌 내역도 요청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번 개정안이 과세당국의 ‘전가의 보도’로 사용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우선 요청을 위한 조건이 까다롭다. 구체적으로 개정안을 살펴보면 정보 교환을 위해서는 조사 대상의 이름, 정보가 요청되는 기간, 해당 금융기관, 요청 목적 등을 스위스에 제시해야 한다. 따라서 단순 수집 또는 예비조사를 위한 포괄적 요청이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어느 은행인지 모르는 노태우·전두환 두 전직 대통령의 계좌 정보, 탈세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고 있는 BBK 관련 김경준 씨의 계좌 정보도 요구하기 어렵다.

국세청은 그러나 세무 조사 과정에서 스위스로 계좌가 흘러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사 시도가 멈추었던 것에 비하면 조사의 동기부여 차원에서도 큰 진전이 있다는 입장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스위스 계좌 존재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량의 정보 요청이 가긴 힘들겠지만, 확인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로 상징적 효과와 예방 효과가 가능할 것”이라며 “양적 효과보다는 질적인 파급력이 크다”고 전했다.
스위스 최대 은행 UBS는 IRS가 제기한 형사소송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7억8000만 달러의 벌금을 물고 4450여 명의 탈세혐의 미국인 명단을 넘겨야 했다.
스위스 최대 은행 UBS는 IRS가 제기한 형사소송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7억8000만 달러의 벌금을 물고 4450여 명의 탈세혐의 미국인 명단을 넘겨야 했다.
비밀계좌 공개가 금융시장에 호재?

스위스는 세계 최대의 검은 돈 보관소 중 하나다. 2009년 스위스는 비거주자 소유의 역외 계좌에 약 2조1000억 달러를 유치하고 있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전인 2007년 역외 계좌 유치 총액은 약 3조1000억 달러에 달했다.

2008년 기준으로 전 세계의 금융기관에서 관리, 운용하는 자산 약 7조2000억 중 27%인 3조4000억 달러를 스위스 은행에서 관리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스위스 금융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것은 스위스 은행의 비밀 유지 조항 때문이다. 음성 자금 운용에서 비롯되는 금융산업은 스위스 경제의 버팀목이기도 하다. 스위스 국내총생산(GDP)에서 금융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2%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밀금고의 빗장을 풀기 시작한 것은 금융 위기 이후 국제사회의 압박에 스위스 정부가 일정부분 투항하기 시작하면서 가능해진 것이다.

많은 국가의 정부들은 자국 내 납세자의 국외 탈세를 부분적으로 묵인해왔다. 주머니가 가벼워지면, 두둑했을 때는 잊고 있던 ‘받을 돈’이 생각나게 마련이다. 금융 위기로 각국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재정 적자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미국과 유럽이 세수 확보 차원에서 우선적으로 탈세를 막기 위해 나섰다.

스위스 은행들이 타국 고객의 자산을 관리하면서 과세당국에 비밀을 지켜줄 뿐 아니라 눈을 피해 스위스로 옮기는 과정에 적극적인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미국과 유럽 각국은 집중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스위스 은행 율리우스바에르은행은 케이맨제도에서 불법 영업을 한 문서가 위키리크스에 넘어가면서 미국 국세청(IRS)에 벌금을 물었고, 스위스 최대 은행 UBS는 IRS가 제기한 형사소송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7억8000만 달러의 벌금을 물고 4450여 명의 탈세혐의 미국인 명단을 넘겨야 했다.

지난 수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일정한 요건을 못 갖춘 해외 금융센터를 제어하기 위해 각종 수단을 동원해왔다. 2009년엔 주요 20개국(G20)과 협력해 조세피난처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이후 안도라, 코스타리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리히텐슈타인, 모나코 등 조세피난처들이 국제 조세 기준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독일과 영국 정부도 스위스 정부와 양자 협약을 통해 자국민 명의의 스위스 은행 계좌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조세협정을 맺었다. 우리나라가 이번에 조세조약을 개정하게 된 것도 이런 국제적 추세에 따른 것이다.

조세피난처에 대한 규제 강화는 금융기관에는 긍정적인 작용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금융 전문가들은 “금융 자금이 양성화될수록 시장의 상품 매매는 활발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조세피난처에 묶여 있던 거대 자금이 수면 밖으로 나오게 되면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금융상품의 매매가 활발하게 이뤄지게 되고, 이는 곧 자본시장의 활성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장 샤프러(Jean Schffner) 앨런&오버리 로펌 조세 전문가는 “지난 3년간 블랙머니는 크게 줄었다”며 “고객들이 이 돈을 꺼내는 것이 은행에는 이익이다”라고 말했다.

조세피난국들에 대한 규정 강화는 각국의 재원 확보에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OECD에 따르면 조세피난국에 대한 강화된 규정으로 인해 각국은 10만 명의 부자로부터 187억 달러 규모의 세금을 추가적으로 거둘 수 있었다.



일러스트 추덕영

함승민 기자 sh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