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시의 디자인은 시적(詩的)이다. 단순한 쓰임이 아닌 상상력과 실용이 겸비된 예술이다.
감각적이고 긴장감이 흐르며 품위 있는 디자인, 디자이너의 꿈을 디자인한 디자인의 디자인이다.


주시 살리프, 필립 스탁, 오렌지 즙 짜개, 1990년
주시 살리프, 필립 스탁, 오렌지 즙 짜개, 1990년
알레시(Alessi)는 꿈의 공장이다. 삶에서, 생활에서, 일상에서 매일 마주하는 커피 주전자, 스푼, 와인 오프너, 그리고 열쇠고리까지. 다양한 생활용품을 디자인하고 디자인을 다시 디자인한다. 알레시는 꿈꾸며 즐겁게 디자인해 사소한 형태를 아름다운 예술로 바꾼다. 디자인이 기능의 시대를 넘어 예술로 접어들었다.

이젠 아름답지 않으면 더 이상 상품이 호소력을 가질 수 없다. 와인 코르크를 따는 와인 오프너는 단순한 스크루 하나면 된다. 실용 면에서는 충분하지만 사람들은 좀 더 품위 있고 더 멋있게 와인을 따고 싶어 한다.
[최선호의 디자인 오디세이] Alessi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킨 꿈의 디자인
알레시의 와인 오프너 ‘안나 G(Anna G)’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열광했다. 안나를 디자인한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1931~)의 “시와 같고, 감성을 주고, 생각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미소와 로맨스를 건네주는 것”이라는 디자인 철학이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으로 다가선 것이다. 나는 안나를 책장에 올려놓고 오랫동안 바라본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지만 보는 눈 맛이 상큼하다. 깜찍하기도 해라. 안나 G 와인 오프너 하나로 알레시의 모든 제품을 사랑하게 됐다.

알레시 디자인에 획을 그은 필립 스탁(Philippe Starck·1949~)의 오렌지 즙 짜개 ‘주시 살리프(Juicy Salif)’는 기능 측면보다는 미감이 디자인을 이끈 혁신적인 작품이다. 살리프는 SF 영화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혹성에서 날아온 미확인비행물체(UFO) 같다. 문어 같기도 하고 거미 같기도 하다. 무엇을 형상화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모양이 오렌지 즙을 짜는 도구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기괴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맥스 르 신와(Max le chinois), 필립 스탁, 체, 1990년
맥스 르 신와(Max le chinois), 필립 스탁, 체, 1990년
못생겼지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괴상한 도구다. 사람들은 즐거워한다. 살리프의 긴 다리 한 짝을 손에 들고 주방에서 거실로, 서재로, 사무실로 다닌다. 역시 눈 맛이다. 디자인을 사용하지 않고 모시고 사는 기쁨이 그 속에 담겨 있다. 가볍지 않은 값이지만 사람들은 기꺼이 지갑을 연다. 그 기괴함 때문에, 그 호기심 때문에 일상이 가벼워진다. 예술적인 중재자가 돼 새로운 오브제를 창조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알레시 철학에 사람들이 공감하는 순간이다.
알레시의 거장들. 왼쪽부터 알베리토 알레시, 아킬레 카스티글리오니, 엔도 마리, 알도 로시, 알레산드로 멘디니, 1989년
알레시의 거장들. 왼쪽부터 알베리토 알레시, 아킬레 카스티글리오니, 엔도 마리, 알도 로시, 알레산드로 멘디니, 1989년
알레시 디자인

알레시는 1921년 판금 기술자였던 지오바니 알레시(Giovanni Alessi)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근처의 작은 마을 오메냐에서 금속으로 만든 생활용 수제품을 만들어 팔면서 시작됐다. 1930년대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장남 카를로 알레시가 사업에 합류해 주로 구리, 은, 황동, 니켈 등으로 만든 주방 및 생활용품을 만들어 명성을 쌓았다.

1970년대부터 알레시의 3대손이자 최고경영자(CEO)이자 디자이너인 알베르토 알레시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통해 단순한 산업제품이 아닌 예술과 만난 감성적인 디자인의 제품들을 선보이면서 디자인 역사를 새로 썼다. “진정한 디자인 작업이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움직이고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놀라게 하고 본질에 역행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알레시의 철학이 담긴 수많은 리빙 디자인이 그것이다.



시적 디자인

알레시의 디자인은 시적(詩的)이다. 단순한 쓰임이 아닌 상상력과 실용이 겸비된 예술이다. 감각적이고 긴장감이 흐르며 품위 있는 디자인, 디자이너의 꿈을 디자인한 디자인의 디자인이다.

얼마 전 나는 실용과 상관없이 미감을 보기 위해 큰마음을 먹고 리처드 사퍼(Richard Sapper·1932~)의 ‘9091’ 주전자를 샀다. 일명 멜로디 주전자라고 불리는 이 제품은 물 따르는 주둥이가 권총 모양의 마개로 만들어진 독특한 외관을 갖고 있다. 물이 끓어 증기가 되면 동으로 만든 두 개의 파이프에서 오음계 가운데 미와 시 음을 낸다.
9093, 마이클 그레이브스, 주전자, 1985년
9093, 마이클 그레이브스, 주전자, 1985년
마치 증기 기관차의 기적 같은 음향이 작은 주전자에서 울린다. 이 소리는 아득한 시간의 기억 너머로 상상을 이끈다. 주전자의 기능은 물을 담아 데우거나 따르는 데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양은 주전자의 형태가 전형적인 주전자다. 뚜껑을 열고 물을 담고, 손잡이에 무게중심을 실어 들어 올려 물을 따르는 그런 구조다. 막걸릿집 주전자다.

그 주전자에서 소리가 난다. 그것도 아득히 먼 옛날의 기억 속에 있는 기적이 울리고 어린 시절 가난이 스친다. 어머니의 정과 외할머니의 손맛이 아련하게 묻어난다. 나는 작업실에서 찻물을 전기 주전자로 끓인다. 물만 붓고 스위치만 올리면 금방 물이 끓어오른다. 후루륵 끓기 시작하면 이내 툭 전원이 내려간다. 자동이다. 물 끓이기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하지만 거기엔 정성이 배어들지 않는다. 그냥 기계다. 물 끓이는 기계, 그게 전기 포트다.
9091, 리처드 사퍼, 주전자, 1983년
9091, 리처드 사퍼, 주전자, 1983년
나는 물도 정성으로 끓이면 차도 더 달고 맛있다고 생각한다. 왜 다인(茶人)들은 무쇠 찻주전자를 화로에 올려놓고 잔불에 오래 물을 끓여 찻물로 내었을까. 요즘처럼 발달된 문명의 기계들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요즘도 알 만한 다인들은 무쇠 주전자를 고집한다. 그 속에는 마음과 정성과 기다림이라는 무언의 힘이 있다. 사퍼의 주전자는 그래서 아름답다. 물 끓기를 기다리는 것도 예술이다. 언제 ‘삐~이~’ 소리가 날까. 기다림이란 기쁨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예술을 봐라. 회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이를 통해 마음이 움직인다. 생활용품 디자인에 이런 시적인 요소를 불어 넣어야 한다는 것이 내 디자인의 철학이다.” 알베르토 알레시(Alberto Alessi)의 말이다. 그렇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 하나에서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알레시 주전자는 진정 예술이다.



알레시의 예술가들

알레시의 제품 디자이너는 모두 예술가다. 디자인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알레산드로 멘디니, 필립 스탁, 리처드 사퍼, 알도 로시, 마이클 그레이브스, 마리오 보타, 프랭크 게리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건축가가 디자인한 생활주방용품으로 각각의 디자인은 ‘알레시’라는 제품으로 생산되고 있다. 디자인은 모두 외부 디자인회사에 주문을 하고 제품만 회사에서 만드는 셈이다.

알레시에는 자체 디자이너가 없다. 디자이너는 개인의 탁월한 능력과 다른 경험, 그리고 환경에서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하고 거기서 얻은 명성으로 알레시와 협업하는 것이다. 디자이너의 창의성이 실제로 소비자에게 팔릴 수 있도록 만드는 상품화가 알레시의 역할이다. 즉 디자이너와 대중을 이어주는 중재자인 셈이다.

멘디니는 “나는 안 팔리는 것만 디자인한다”고 했다. 하지만 1994년 그가 만든 안나 G 와인 오프너는 인기가 매우 좋아 전 세계에서 1분에 한 개꼴로 팔리는 ‘밀리언셀러’가 됐다. 안나는 그야말로 알레시의 얼굴이다. 사람들은 즐거워한다. 안나 스톱 병마개, 안나 페퍼 후추갈이, 안나 라이트 라이터, 안나 박스 키친 통 등 안나 패밀리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남자친구 ‘알레산드로 M’까지 만들어졌다. 너무 잘 팔린 디자인이었다. 멘디니는 안나 시리즈로 지독한 부정은 지극한 긍정이라는 수사를 세상에 정면으로 보여주었다.
알레시 박물관 비디오 이미지, 지아코모 지아니니, 2010년
알레시 박물관 비디오 이미지, 지아코모 지아니니, 2010년
알레시의 교훈

알레시 제품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만들었으니 디자인이나 판매에 탄탄대로를 걸어 나아갈 듯 하지만 언제나 이렇듯 성공하지는 않았다. 1970년 알프레도 알레시는 법대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알레시에 입사했다. 당시 알레시는 ‘멀티플 아트’라는 다양한 분야가 섞여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내는 아트 개념의 새로운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디자인에 몰두했다. 저렴한 가격에 진정한 예술품인 다량의 소비재를 대중에게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소비문화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 의도였다. 이탈리아 조각가들과 3년에 걸쳐 매우 열정적인 디자인과 실험을 반복했다.

그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가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1904~1989)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갈고리가 달린 빗’이었다. 이 작품을 본 알레시의 아버지는 생산을 중단시켰다. 제품이 팔리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이미 5만 개의 스테인리스 스틸 갈고리를 구입해 1000여 개의 완제품을 생산한 상태였다. 비록 제품 생산은 실패로 끝났지만 스테인리스 스틸 가공 기술력이 크게 향상됐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디자인이 더 나은 기술로 이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블라섬(Blossom), 엘레나 만페르디니, 과일바구니, 2011년
블라섬(Blossom), 엘레나 만페르디니, 과일바구니, 2011년
알프레도 알레시는 말한다.

“실패 역시 내 업무의 일부분이다. 모든 디자인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경계는 정말 묘한 것이다. 경계를 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실패를 많이 하게 되면 희미하게 보였던 경계선이 조금 더 뚜렷하게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디자이너라고 해도 그들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1000개의 디자인을 한다면 정작 그 디자인이 상품화돼 나오는 것은 한두 개뿐이다. 굉장히 낮은 성공률이다. 하지만 이런 ‘실패’에서 우린 많은 것을 배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공기가 없으면 숨 쉴 수 없다와 같은 진리의 말이다. 제품이 세상에 나와 하루살이로 살다가 실패로 마감한 비운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늘 쓰고 만지는 것은 이미 모두 디자인의 명품이다. 다만 값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쑤시개가 없다면 식후의 불편함은 칫솔질하기 전에는 어려웠을 터이고, 자동차가 없다면 소나 말을 타지 않는 한 모두 걸어 다녀야 했을 것이다. 일상의 디자인은 알레시의 제품 철학과 하나 다를 게 없다. 실패하면서 좀 더 나은 디자인으로 거듭 버전을 바꾸고 태어난다. 라이카 카메라 M 시리즈의 변화나 알레시 주전자의 변화는 같은 것이다. 디자인한 노력이 아름답고 노력보다 더 아름다운 제품이 비로소 사람을 감동시킨다.
차·커피 세트(주전자), 마리안느 브란트, 1985년(1924년)
차·커피 세트(주전자), 마리안느 브란트, 1985년(1924년)
디자인의 중요함

알레시 제품은 ‘쓰기 위한 제품’이기 이전에 ‘두고 보기 위해’ 사는 제품이기도 하다. 나도 마리오 보타(Mario Botta·1943~)의 화병 ‘트론코(Tronco)’에 여름철 작열하는 태양의 컬러로 꽃피우는 칸나 한 송이를 멋지게 꼽아 화실 창가에 놓아두고 싶다. 단순한 화병 하나에서 디자인의 힘을 느낀다. 단순한 선 몇 개에 한 송이 꽃으로 공간을 바꾼다. 디자인의 힘이다.
트론코, 마리오 보타, 화병, 2002년
트론코, 마리오 보타, 화병, 2002년
알도 로시(Aldo Rossi·1931~1997)의 ‘일 코니코(Il conico)’ 주전자 세트의 절대적 단순함은 디자인이 예술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로시는 “상업적인 제품을 디자인하는 과정에는 미묘한 것이 종종 숨어 있음을 느낀다. 나는 때때로 그런 제품들이 사용되거나 파괴되는 관점에서 박물관에 전시된 흙으로 만든 유물처럼 느낀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늘 두 가지 방법이 있게 마련이다”고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말한다. 즉, 디자인은 흙으로 만든 유물 같아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쓰이면 곧 유물로 남는 것이고, 쓰이지 않고 거부당하고 외면받으면 흙덩이 같은 무의미한 쓰레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 코니코, 알도 로시, 주전자·크리머·스푼· 설탕 통, 1986년
일 코니코, 알도 로시, 주전자·크리머·스푼· 설탕 통, 1986년
디자인은 치열한 장인정신의 산물이다. 치열할수록 디자인은 단순하다.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불편함을 제거하고 수만 수천 번의 실험과 연구를 거쳐 탄생한 디자인이야말로 오랜 생명이 깃든다. 사람들은 그 긴 고난의 시간을 한순간의 느낌으로 판단해 버린다. 소비자의 눈은 냉정하다. 그 순간의 판단으로 매출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서 훌륭한 디자이너가 필요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이 중요한 이유다. 이탈리아 장인정신의 철학이 깃든 알레시 디자인은 예술이다.
[최선호의 디자인 오디세이] Alessi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킨 꿈의 디자인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