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적이고 긴장감이 흐르며 품위 있는 디자인, 디자이너의 꿈을 디자인한 디자인의 디자인이다.
이젠 아름답지 않으면 더 이상 상품이 호소력을 가질 수 없다. 와인 코르크를 따는 와인 오프너는 단순한 스크루 하나면 된다. 실용 면에서는 충분하지만 사람들은 좀 더 품위 있고 더 멋있게 와인을 따고 싶어 한다.
알레시 디자인에 획을 그은 필립 스탁(Philippe Starck·1949~)의 오렌지 즙 짜개 ‘주시 살리프(Juicy Salif)’는 기능 측면보다는 미감이 디자인을 이끈 혁신적인 작품이다. 살리프는 SF 영화의 한 장면에 등장하는, 혹성에서 날아온 미확인비행물체(UFO) 같다. 문어 같기도 하고 거미 같기도 하다. 무엇을 형상화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모양이 오렌지 즙을 짜는 도구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기괴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알레시는 1921년 판금 기술자였던 지오바니 알레시(Giovanni Alessi)가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근처의 작은 마을 오메냐에서 금속으로 만든 생활용 수제품을 만들어 팔면서 시작됐다. 1930년대 산업디자인을 공부한 장남 카를로 알레시가 사업에 합류해 주로 구리, 은, 황동, 니켈 등으로 만든 주방 및 생활용품을 만들어 명성을 쌓았다.
1970년대부터 알레시의 3대손이자 최고경영자(CEO)이자 디자이너인 알베르토 알레시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통해 단순한 산업제품이 아닌 예술과 만난 감성적인 디자인의 제품들을 선보이면서 디자인 역사를 새로 썼다. “진정한 디자인 작업이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움직이고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놀라게 하고 본질에 역행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알레시의 철학이 담긴 수많은 리빙 디자인이 그것이다.
시적 디자인
알레시의 디자인은 시적(詩的)이다. 단순한 쓰임이 아닌 상상력과 실용이 겸비된 예술이다. 감각적이고 긴장감이 흐르며 품위 있는 디자인, 디자이너의 꿈을 디자인한 디자인의 디자인이다.
얼마 전 나는 실용과 상관없이 미감을 보기 위해 큰마음을 먹고 리처드 사퍼(Richard Sapper·1932~)의 ‘9091’ 주전자를 샀다. 일명 멜로디 주전자라고 불리는 이 제품은 물 따르는 주둥이가 권총 모양의 마개로 만들어진 독특한 외관을 갖고 있다. 물이 끓어 증기가 되면 동으로 만든 두 개의 파이프에서 오음계 가운데 미와 시 음을 낸다.
그 주전자에서 소리가 난다. 그것도 아득히 먼 옛날의 기억 속에 있는 기적이 울리고 어린 시절 가난이 스친다. 어머니의 정과 외할머니의 손맛이 아련하게 묻어난다. 나는 작업실에서 찻물을 전기 주전자로 끓인다. 물만 붓고 스위치만 올리면 금방 물이 끓어오른다. 후루륵 끓기 시작하면 이내 툭 전원이 내려간다. 자동이다. 물 끓이기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 하지만 거기엔 정성이 배어들지 않는다. 그냥 기계다. 물 끓이는 기계, 그게 전기 포트다.
알레시의 예술가들
알레시의 제품 디자이너는 모두 예술가다. 디자인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알레산드로 멘디니, 필립 스탁, 리처드 사퍼, 알도 로시, 마이클 그레이브스, 마리오 보타, 프랭크 게리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건축가가 디자인한 생활주방용품으로 각각의 디자인은 ‘알레시’라는 제품으로 생산되고 있다. 디자인은 모두 외부 디자인회사에 주문을 하고 제품만 회사에서 만드는 셈이다.
알레시에는 자체 디자이너가 없다. 디자이너는 개인의 탁월한 능력과 다른 경험, 그리고 환경에서 새로운 디자인을 창조하고 거기서 얻은 명성으로 알레시와 협업하는 것이다. 디자이너의 창의성이 실제로 소비자에게 팔릴 수 있도록 만드는 상품화가 알레시의 역할이다. 즉 디자이너와 대중을 이어주는 중재자인 셈이다.
멘디니는 “나는 안 팔리는 것만 디자인한다”고 했다. 하지만 1994년 그가 만든 안나 G 와인 오프너는 인기가 매우 좋아 전 세계에서 1분에 한 개꼴로 팔리는 ‘밀리언셀러’가 됐다. 안나는 그야말로 알레시의 얼굴이다. 사람들은 즐거워한다. 안나 스톱 병마개, 안나 페퍼 후추갈이, 안나 라이트 라이터, 안나 박스 키친 통 등 안나 패밀리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남자친구 ‘알레산드로 M’까지 만들어졌다. 너무 잘 팔린 디자인이었다. 멘디니는 안나 시리즈로 지독한 부정은 지극한 긍정이라는 수사를 세상에 정면으로 보여주었다.
알레시 제품은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만들었으니 디자인이나 판매에 탄탄대로를 걸어 나아갈 듯 하지만 언제나 이렇듯 성공하지는 않았다. 1970년 알프레도 알레시는 법대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경영하는 알레시에 입사했다. 당시 알레시는 ‘멀티플 아트’라는 다양한 분야가 섞여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내는 아트 개념의 새로운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디자인에 몰두했다. 저렴한 가격에 진정한 예술품인 다량의 소비재를 대중에게 제공함으로써 새로운 소비문화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 의도였다. 이탈리아 조각가들과 3년에 걸쳐 매우 열정적인 디자인과 실험을 반복했다.
그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가 스페인의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1904~1989)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갈고리가 달린 빗’이었다. 이 작품을 본 알레시의 아버지는 생산을 중단시켰다. 제품이 팔리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이미 5만 개의 스테인리스 스틸 갈고리를 구입해 1000여 개의 완제품을 생산한 상태였다. 비록 제품 생산은 실패로 끝났지만 스테인리스 스틸 가공 기술력이 크게 향상됐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디자인이 더 나은 기술로 이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실패 역시 내 업무의 일부분이다. 모든 디자인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경계는 정말 묘한 것이다. 경계를 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실패를 많이 하게 되면 희미하게 보였던 경계선이 조금 더 뚜렷하게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디자이너라고 해도 그들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1000개의 디자인을 한다면 정작 그 디자인이 상품화돼 나오는 것은 한두 개뿐이다. 굉장히 낮은 성공률이다. 하지만 이런 ‘실패’에서 우린 많은 것을 배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공기가 없으면 숨 쉴 수 없다와 같은 진리의 말이다. 제품이 세상에 나와 하루살이로 살다가 실패로 마감한 비운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내가 늘 쓰고 만지는 것은 이미 모두 디자인의 명품이다. 다만 값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쑤시개가 없다면 식후의 불편함은 칫솔질하기 전에는 어려웠을 터이고, 자동차가 없다면 소나 말을 타지 않는 한 모두 걸어 다녀야 했을 것이다. 일상의 디자인은 알레시의 제품 철학과 하나 다를 게 없다. 실패하면서 좀 더 나은 디자인으로 거듭 버전을 바꾸고 태어난다. 라이카 카메라 M 시리즈의 변화나 알레시 주전자의 변화는 같은 것이다. 디자인한 노력이 아름답고 노력보다 더 아름다운 제품이 비로소 사람을 감동시킨다.
알레시 제품은 ‘쓰기 위한 제품’이기 이전에 ‘두고 보기 위해’ 사는 제품이기도 하다. 나도 마리오 보타(Mario Botta·1943~)의 화병 ‘트론코(Tronco)’에 여름철 작열하는 태양의 컬러로 꽃피우는 칸나 한 송이를 멋지게 꼽아 화실 창가에 놓아두고 싶다. 단순한 화병 하나에서 디자인의 힘을 느낀다. 단순한 선 몇 개에 한 송이 꽃으로 공간을 바꾼다. 디자인의 힘이다.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 소장. 현재 전업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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