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히트가 선택한 지식인 갈릴레이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 학자·예술가·변호사·과학자·의사·저술가·저널리스트·사무직원 등을 보통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지식인들은 크게 두 가지 속성이 있다. 하나는 현 체제를 유지하는 일에 봉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변혁기에 새로운 사고를 촉진하는 모험적인 일에 기여하는 것이다.

전자를 보통 보수적이라 부르고, 후자를 진보적이라 부른다. 사람에 따라 보수적인 지식인이 있는가 하면 개혁적인 지식인도 있고, 동일인이라도 보수적일 때도 있고 진보적일 때도 있다. 정치가들이나 사업가들은 이러한 지식인을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는 데 유리한 이론적 바탕을 구축하는 데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도 저도 거절하는 지식인은 수양산으로 들어가 은둔하는 도피형이 있을 수 있다.

지식인은 정신노동에 주력하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이나 노동 또는 정신적 모욕 등에 대해서 심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 부분을 위협하면 한없이 나약해질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정신적인 신념 부분에 대해서는 내심 놀랍도록 강인한 저력을 가지고 있기도 한 모순된 존재다.

이러한 지식인의 모순된 심리현상을 잘 나타낸 책으로 독일의 희곡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쓴 ‘갈릴레이의 생애, 진실을 아는 자의 갈등과 선택’을 들 수 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한 희곡은 대체로 실제 사실보다 더 극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주제를 선명히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에 다소 과장이 있겠지만, 브레히트의 이 희곡은 지식인의 양면성을 잘 나타내준 것으로 감동적인 작품이다.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

브레히트는 처음에 이 희곡의 이름을 ‘지구는 움직인다’로 붙였다가 제목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희곡에서 브레히트는 과학자이자 지식인인 갈릴레이가 얼마나 탁월한 학자이며,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는지 보이는 한편, 당시 권력자인 교황과 정치가 및 부자에 대해서 얼마나 교활하고 비굴하게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고 철회했는가를 보이면서, 갈릴레이가 마지막 저술을 해외로 옮겨 출판하려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끝내는 굴복하지 않는 신념을 보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이탈리아 피사에서 나서 베네치아의 파도바대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치면서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우주 체계를 증명한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개량해 1610년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입증하는 현상으로 목성의 4개 위성을 관찰하고 이 별을 ‘메디치가의 별’로 이름 붙여 대부호 메디치 가문 전속 수학자가 됐고, 베네치아공화국에서 피렌체 궁정으로 옮겨 페스트가 만연한 가운데서도 의연히 연구를 계속한다.

1616년에 교황청 종교재판소는 코페르니쿠스 학설을 금서로 판결하고 제1차 재판으로 지동설을 일체 말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갈릴레이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2대 세계 체계에 관한 대화(약칭 Dialog)’에서 대화란 이름으로 교묘하게 피해보려 했으나, 1633년에 다시 금서로 지정되고 종신가택연금으로 구금됐다. 지동설 주장을 철회하고 굴욕적인 맹세를 한 갈릴레이는 1636년 그의 나이 73세 때 시력을 잃은 상태에서 마지막 책을 저술해 네덜란드로 빼돌려 출판하도록 하고 눈을 감았다.



하늘이 폐지되는 두려움

그렇다면 교황청에서는 왜 갈릴레이의 이론을 거부했는가. 그 이유를 극에서는 이렇게 그리고 있다.

아주 늙은 추기경: (전략) 나는 확고한 땅 위를 자신 있는 걸음걸이로 걷고 있소. 지구는 정지해 있고 만물의 중심이며, 나는 중심점 속에 있는 거요. 또 창조주의 눈은 나를, 오로지 나를 굽어보고 계시오. 나를 중심으로. (후략)

이것이 교황청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그레도(갈릴레이의 친구): 그러니까 오로지 별들만이 존재한다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갈릴레이: (격분해서) 저 위엔 없네! 저 위엔 피조물들이 있지. 그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여기 지구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우, 하나님이 이 지구상에는 없는 것과 마찬가질세!

사그레도: 무엇보다도 자네는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네. 그래서 나는 자네한테 묻는 걸세. 자네의 세계 체계 안에는 신이 어디에 있나?

갈릴레이: 우리 마음속에 있든가 아무데도 없든가!

진리를 발견하고 친구인 사그레도에게 이렇게 말할 때만 해도 갈릴레이는 의기양양하고 자신만만했다. 그가 발견한 진리는 너무나 확고했기 때문에 당시 종교 지도자까지도 설득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심지어 갈릴레이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갈릴레이: 진리란 시대의 아이지 권위의 자식이 아닙니다. (중략) 내 말을 들으시오. 진실을 모르는 자는 단지 한낱 바보에 그치지요. 그렇지만 진실을 알고도 그것을 거짓이라고 칭하는 자는 범죄자란 말이요. 내 집에서 꺼지시오!
지식인은 정신노동에 주력하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이나 노동 또는 정신적 모욕 등에 대해서 심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 부분을 위협하면 한없이 나약해질 수 있다.
지식인은 정신노동에 주력하기 때문에 육체적 고통이나 노동 또는 정신적 모욕 등에 대해서 심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어서 이 부분을 위협하면 한없이 나약해질 수 있다.
너무나도 나약한 지식인 갈릴레이

갈릴레이는 1616년의 제1차 재판에서 경고를 받은 뒤 가능하면 교회와 직접 부닥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려고 천동설의 방법적 오류를 수리적으로 지적해 간접적으로 나타내는가 하면(황금계량자), ‘대화(Dialog)’란 교묘한 용어를 써서 피해보려고 했지만 끝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브레히트는 그의 극에서 나약한 지식인인 갈릴레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교황: 최악의 경우, 그에게 고문기구들을 보이는 정도로 해요.

종교재판관: 그것으로 족할 것입니다. 성하, 갈릴레이 선생은 기구들이 뭔지를 알고 있으니까요.

이 대화는 더욱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과장된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인이란 육체적인 위협에 대해 이처럼 너무나도 나약한 면이 있다는 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직접적인 표현은 없지만 전령사의 목소리를 통해 비굴하게 굴복해 자기의 주장을 철회한 갈릴레이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전령사의 목소리: 피렌체의 수학 및 물리학 교수인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태양이 세계의 중심으로 한 지점에서 붙박여 있으며 지구는 중심도 아니고 붙박이도 아니라는 본인의 지금까지 학설을 맹세코 부인합니다. 본인은 진심으로, 가식 없는 믿음으로 이 모든 이단행위들, 요컨대 교회를 거역하는 일체의 다른 오류와 다른 의견을 부인하고 저주합니다.



진실의 처형

희곡에서는 진실을 철회한 갈릴레이에 대한 그의 추종자들의 배신감을 갈릴레이의 가정부의 아들인 안드레아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진실의 처형’이란 말로 나타내고 있다.

안드레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저자들이 진실을 처형하고 있단 말입니다! (중략) 마치 산이 “나는 물이다”라고 말한 것 같아요. (중략) 시정의 필부와 우린 말했지요. “선생님은 죽으면 죽었지, 결코 철회하시진 않을 것이오”라고. 선생님은 돌아오셨습니다. “나는 철회했네. 그렇지만 살아갈 걸세”라고 하시면서. “선생님의 손은 더럽혀졌습니다”라고 우리는 말했지요. 선생님은 “지금, 빈손보다는 얼룩진 손이 낫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말에 갈릴레이는 고뇌에 빠진다.

갈릴레이: (전략) 나는 천직을 배반했네. 나와 같은 행위를 하는 인간은 학문 대열에서 용납될 수 없어.



지식인의 신념에 대한 마지막 반전

제2차 종교재판 이후 갈릴레이는 피렌체 근교에서 연금 상태로 여생을 보냈다. 1636년 일흔 셋의 나이에 시력을 잃은 상태에서 헌신적인 딸의 도움으로 최후의 역작인 ‘두 개의 신과학에 관한 수학적 논증과 증명(약칭 Discorsi)’을 완성하고 이 원고를 이웃 나라로 넘겨 2년 뒤에 네덜란드에서 출판했다. 이것을 브레히트는 마지막 15장에 ‘갈릴레이의 저서 디스코르시, 이탈리아의 국경을 넘어가다’란 제목으로 달고 ‘갈릴레이의 생애’ 희곡의 막을 내렸다.

브레히트는 결코 지식인의 나약함을 매도하려고 이 극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마지막 장을 넣음으로써 지식인의 ‘약하지만 강한’ 저력을 보이고자 했다.




일러스트·추덕영

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