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퇴직연금이 도입된 지 6년이 지났다. 100세 시대의 노후 준비 수단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2012년 1월 말 현재 약 50조 원이 퇴직연금에 쌓여 있다. 과연 50조 원에 달하는 퇴직연금 적립금은 어떤 모습으로 쌓여 있을까.
[RETIREMENT PENSION] 안전의 덫에 걸린 퇴직연금의 ‘불안한 미래’
결론부터 말하면 대부분의 적립금이 원리금이 보장되는 상품에 들어, 안전한 창고에 잘 보관돼 있는 듯하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2년 1월 말 현재 퇴직연금 적립금은 49조9800억 원 정도다. 이 중 약 46조5000억 원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몰려 있다. 전체 적립금의 93%가 원리금보장형 창고를 선택한 것이다. 다소 위험이 따르긴 하지만 높은 기대수익을 추구하는 실적배당형 창고에 쌓여 있는 적립금은 전체 5.8%인 2조9000억 원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말해 퇴직연금 적립금이 안전의 덫에 단단히 걸려 있는 셈이다.

퇴직연금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직전인 2008년 1월 말의 데이터는 다소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2008년 1월 말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중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편입돼 있는 비중은 79.8%였다. 그러던 것이 지난 4년 동안 80%대를 훌쩍 넘어 이제는 9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퇴직연금 적립금을 안전한 피난처로 내몰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퇴직연금 운용의 문제점

퇴직연금 종류별로 보면 여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지난 4년간 적립금 운용의 보수화가 진행된 것은 분명하지만, 제도별로 구분해보면 우리나라만의 특징이 보다 확연해진다. 2012년 1월 말 현재 확정급여(DB) 형의 경우는 무려 97.7%가 원리금보장형을 선택한 반면에 확정기여(DC) 형의 원리금보장형 비중은 73.5%에 머물러 있다. 이는 퇴직연금 선진국과는 다른 양상으로 의아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개인보다는 기업의 운용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퇴직연금 선진국에서는 기업에서 적립금 운용을 책임지는 DB형 쪽이 DC형보다 다소 공격적인 운용 패턴을 보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럼 우리나라에서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DB형에서 극단적으로 원리금보장형에 치우쳐 있는 현상을 곰곰이 되짚어보면 나름 합리적 근거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DB형을 운영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적립금 운용수익률이 임금상승률보다 높으면 남는 장사가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임금상승률은 매우 낮은 수준을 유지해 왔다. 다른 한편으로 퇴직연금사업자는 제살 깎아 먹기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시장금리보다 훨씬 높은 원리금을 보장하는 자사 상품을 경쟁적으로 내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이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선택한 것을 두고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할 근거는 매우 취약하다.

그렇다고 이런 현상에 문제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DB형의 속성상 한방에 상황이 역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DB형은 퇴직금처럼 마지막 근무년도의 급여 수준에 따라 퇴직급여가 결정된다. 최근의 급여가 과거로까지 소급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비록 지금은 원리금보장형 상품에서 제공하는 금리가 임금상승률보다 높아 수지맞는 장사라 하더라도 나중에 금리와 임금상승률이 역전되는 순간이 되면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의 성과 역시 일거에 반전될 수 있다. 이러한 구조적 특성 때문에 DB형을 운영하는 선진국의 기업들은 DC형보다 더 자산 배분에 신경을 쓰는 것이다. 금리와 임금상승률이 언제 역전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그때를 대비하는 것 역시 DB형을 운영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퇴직연금 리스크관리라 하겠다.
실적배당형이 위험하다고 해서 회피하는 것은 퇴직연금의 속성과 맞지 않는 전략이다.
실적배당형이 위험하다고 해서 회피하는 것은 퇴직연금의 속성과 맞지 않는 전략이다.
운용 성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자산 배분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지나치게 편중된 지금의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방식은 균형이란 측면에서도 문제가 있다. 편식을 하면 건강에 해로운 것과 같은 원리다. 생활습관이나 경제 행위 등에서도 균형은 중요하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혼을 담은 그의 자서전에서 균형과 관련해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의 땅을 밟으면서 나는 날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이 공중에 뜬 초현실적인 꽃이 아니라,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흙을 먹어서 꽃으로 변형시키는 나무임을 점점 더 분명히 의식하게 됐다. 그리고 흙을 더 먹으면 먹을수록 더욱 오묘한 꽃을 피웠다. 고대인들의 찬란한 간결함과 균형과 평온함은 소박하고 조화를 이룬 종족이 쉽게 달성하는 자연스러운 경지는 아니었다. 그리스의 평온함은 섬세하고 비극적이어서 힘겹고 오랜 투쟁 끝에 대결하던 무서운 힘들이 서로 타협을 이루어 비잔틴 신비주의가 내세우는 초연함에 다다른 균형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노력의 정상이었다.”

카잔차키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찬란한 문명을 꽃피울 수 있었던 원인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의 탁월한 균형감각을 들고 있다. 그랬던 그리스가 지금 세계 경제 불안의 진원지로 전락한 것도 카잔차키스가 강조한 균형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기성세대의 편안한 여생을 위해 다른 중요한 많은 것들을 놓쳐버렸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처럼 균형은 작게는 한 사람의 육체적 건강에서부터 크게는 한 나라와 세계 경제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지금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에서는 이런 진리를 잠깐의 달콤함에 젖어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지금은 포근한 안전함을 맘껏 누리고 있지만 퇴직연금의 미래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생활비나 교육비처럼 사용 시기가 임박한 특정 목적자금과 달리 퇴직연금은 먼 미래의 생활자금이다. 지금 당장의 위험은 절박한 위험일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기회로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온통 원리금보장형으로만 운용을 하다 보면 안전이라는 심리적 효용은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높은 기대수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리게 된다. 기회비용 역시 만만찮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희망을 통해서만 그 너머의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 위험 속에 숨어 있는 희망의 빛을 찾아야 한다.

진리보다 더 진실한 것은 전설이라는 말이 있다.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과 관련해서도 유명한 전설이 있다. 운용 성과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매매 타이밍도, 종목 선택도 아닌 자산 배분이라는 연구 결과물이다. 이 전설을 잊지 말고, 전설로만 치부하지도 말고 은퇴 자금을 불리는 데 적용해보는 실용적인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요즘이다. 요즘 같은 인생 100세 시대에 운용 성과의 90% 이상이 자산 배분에 의해 결정된다는 연구 결과는 전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퇴직연금에서의 자산 배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제2의 인생을 기름지게 만들 수 있는 자양분이기 때문이다.



손성동 미래에셋 퇴직연금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