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닥터이지치과 원장

‘치과의사 이지영은 앨범을 발표했다.’‘가수 이지(EG)는 서울대 치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 어색한 두 문장이 ‘참’이다. ‘노래하는 치과의사’ 이지영 닥터이지치과 원장의 이야기다.
욕심 많은, 욕심보다 용기가 많은 ‘노래하는 치과의사’
이지영 원장은 치과의사다. 서울대 치대를 졸업했다.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땄고 서울대병원 치주과 전임의사, 을지의과대학병원 치과 과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닥터이지치과를 개원했다. 이렇게만 보면 그의 삶은 무미건조해 보인다. 어쩌면 흑백일 수도 있던 그의 인생에 색을 입혀준 것은 가수 이지라는 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지’는 이 원장이 가수로 데뷔하면서 지은 예명이다. 이 원장은 2003년과 2006년 두 장의 앨범을 낸 엄연한 2집 가수다. 2006년에는 그의 노래 ‘아파도 사랑합니다’가 온라인 음원차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대학 다닐 때 미술 동아리를 했어요. 미술대전을 끝내고 뒤풀이를 하니까 자연스레 라이브 노래도 불렀거든요. 그때 선배의 지인으로 합석했던 방송계 관계자께서 제 노래를 듣고 가수 한 번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를 했어요. 제가 워낙 어릴 때부터 무대 체질이라 노래하고 남의 이목을 끄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가수를 생각해보진 않았는데, 그런 제의가 들어오면서부터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시작했죠.”

그러나 이 원장은 대학시절 들어온 가수 제의를 모두 흘려보냈다. 치대에 들어온 이상 의사로서 먼저 자리매김하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차라리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때 부딪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당시만 해도 가수라는 새로운 길이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다.



두 장의 음반과 한 권의 에세이

그렇게 한 발 물러섰던 그의 꿈은 2001년 다시 시작된다. 병원에서 만난 음반업계 관계자와 대학시절 받았던 제의에 대해 얘기하던 중 지금이라도 가수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치과의사로서 어느 정도 자리 잡았을 무렵이었기 때문에 망설임을 버리고 음반을 내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전문가들을 만나며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후 의견을 모아 음반의 콘셉트를 정하고 프로듀서를 섭외했다. 기획사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든 음반 작업을 직접 뛰어다니며 해야 했고, 보컬 트레이닝도 따로 받아야 했다. 낮에는 치과의사로서, 저녁엔 가수로서의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오후 6시에 진료를 마치고 부랴부랴 녹음에 들어가 새벽까지 작업하기 일쑤였다.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새로 시작하려니 시간 관리와 체력 관리가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체력 관리가 되지 않으면 집중도 안 되니까 주업까지 지장이 와요. 본래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또 시간을 지혜롭게 안배하는 것도 필요해요. 초짜로 시작하는 일인데 실수하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만 하죠. 저도 시간을 잘게 쪼개서 직접 관리했거든요.”

월드컵 열기로 뜨거웠던 2002년을 그렇게 보내고 2003년 마침내 1집 앨범‘STORM’을 발표했다. 사실 그는 음반 작업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시작했다. 멀쩡한 치과의사가, 나이까지 들어서 별짓을 다한다는 주위의 반대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선후배나 친구는 물론 부모도 모르게 진행된 ‘극비작업’이었다. 대학교수로 계시던 아버지가 안식년으로 마침 외국에 머물고 계셔서 극비작업은 훨씬 수월했다.

“후에 비밀로 음반 만든 것을 부모님께서 아시고는 ‘삭발을 시키겠다, 방에 가둬놓겠다’며 노발대발 하셨죠. 당시에 부모님이 상당히 보수적이셔서 가수 활동을 많이 반대하셨거든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 끼는 부모님한테서 물려받은 것 같아요. 어머니는 원래 기악과를 지망하셨던 분이고, 아버지도 전라도 가요대회 출신이시거든요. 그래서인지 나중에는 제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인정해 주셨어요. 방송에 나갈 땐 ‘까불지 말고 조신한 캐릭터로 나가라’며 모니터링도 해주시고 기사 나오면 스크랩도 하시고요.”

아쉽게도 이 원장의 1집 앨범은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노래보다는 그의 독특한 이력이 집중을 받았고, 의사가 낸 음반이라 질이 떨어질 것이라는 선입견도 강하게 작용했다.

실패를 맛보면 기가 죽을 만도 하건만 이 원장은 오히려 2집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아쉬움과 미련이 남으니 욕심이 더 나더라는 것이다. 결국 2006년 두 번째 앨범 ‘My Favorite’을 발표했고, 첫 번째 앨범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원장과 같이 다른 일에 도전하고 싶지만 용기가 없어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팬클럽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새로 시작하려니 시간 관리와 체력 관리가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체력 관리가 되지 않으면 집중도 안 되니까 주업까지 지장이 와요. 본래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죠. 또 시간을 지혜롭게 안배하는 것도 필요해요. 초짜로 시작하는 일인데 실수하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만 하죠.”



가수 활동으로 ‘사람’얻고‘겸손’배워

대중매체를 통해 이 원장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시련이 오기도 했다. 인터넷 악성댓글에 시달리게 된 것. 주로 의사가 돈이 많아서 생각 없이 음반을 냈다는 비판이었다. 이 원장은 악성댓글에 크게 개의치는 않았지만 자신의 꿈과 열정이 매도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런 선입견을 깨고자 에세이 <나는 날마다 발칙한 상상을 한다>를 출간했다.

“많이들 하시는 말씀이 ‘가수 하고 음반 내는 것 보니 욕심이 많아 보인다’였어요. 사실 어릴 때부터 욕심 많고 지기 싫어하긴 했지만요. 그런데 전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욕심보다 용기가 많은 거라고요. 사실 누구나 욕심은 많아요. 단지 꿈꾸는 것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용기가 없는 거잖아요. 전 그런 용기가 좀 더 많았을 뿐이죠.‘발칙한 상상’이란 말은 제게 의사라는 틀이 있지만 그것을 깨고 음반을 낸 도전하는 삶에 대한 얘기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서 쓴 단어예요. 제목을 보고 어떤 사람은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같이 야한 내용이냐고 묻기도 하지만요. (웃음)”

가수로 알려지면서 ‘치과의사’ 이지영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매체를 통해 이 원장을 보고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가 늘어난 것. 특히 이 원장의 인간적인 모습이 비춰진 휴먼 다큐 프로그램을 보고 안 그래도 무서운 치과에 권위적인 의사가 있을까 걱정하는 환자들이 이 원장을 찾았다.

이렇게 환자가 찾아오면 진료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환자가 편안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면 의사도 진료하기 편하고, 환자와 의사 간의 신뢰 형성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 이 원장의 설명이다.

“가수 활동을 통해서 얻은 것이 또 하나 있다면 사람이에요. 모임에서도 그냥 치과의사 이지영보다 ‘치과의사 겸 가수’ 이지영이라고 하면 더 존재감이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제가 치과에만 있었다면 만나지 못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인간관계의 폭이 넓어졌죠. 허리 굽히는 법도 배웠어요. 제가 치과의사고 나이가 있어도 가수로서는 초보이고, 악성댓글에도 시달려봤죠. 어떻게 보면 저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셈이고,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안하무인이 됐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가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겸손함을 배운 점은 제 인생에 있어 큰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지친 몸을 추스르기 위해 잠시 치과의사라는 본분에 집중하고 있는 이 원장에게 아직 가수로서의 목표가 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있죠. 아직 구체적이진 않지만 조만간 디지털 음원 쪽으로 작업을 하려고 준비 중이에요. 누구나 들었을 때 ‘아, 그 노래요?’할 수 있는 히트곡을 반드시 하나 만들고 말 거예요.”
욕심 많은, 욕심보다 용기가 많은 ‘노래하는 치과의사’
“많이들 하시는 말씀이 ‘가수 하고 음반 내는 것 보니 욕심이 많아 보인다’였어요. 사실 어릴 때부터 욕심 많고 지기 싫어하긴 했지만요. 그런데 전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욕심보다 용기가 많은 거라고요. 사실 누구나 욕심은 많아요. 단지 꿈꾸는 것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용기가 없는 거잖아요. 전 그런 용기가 좀 더 많았을 뿐이죠.






글 함승민 기자 hamquixote@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