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디자인 오디세이

무지 창(窓)의 집, 2007년
무지 창(窓)의 집, 2007년
일본 도쿄(東京)의 중심가 긴자의 12월 풍경은 쓸쓸했다. 세계 경제 한파에 일본대지진 쓰나미로 경기는 완전 얼어붙고 크리스마스의 네온사인만 황량이 마쓰시다백화점의 외벽에 불을 밝혔다. 루이비통, 프라다, 에르메스 등 명품 숍도 한가하기는 마찬가지. 미스코시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만 마감시간 세일 코너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비가 내렸다. 12월 찬 비는 유라쿠조에 있는 무지(無印·MUJI) 매장의 유리창에 부딪쳐 흘러내렸다. 무지 매장은 크고 넓었다. 1층 의류와 생활잡화 코너에는 캐롤 음악이 흐르고 2층 가구와 가전, 식품 코너에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눈에 띄는 상품들이 가득했다.

실용적인 가구와 가전은 눈을 사로잡았고, 물건마다 무지의 단순단색 디자인이 돋보였다. 그 가운데 눈에 선뜻 들어오는 CD플레이어와 충전식 라디오가 있었다. 단순한 디자인은 마치 스마트폰을 대하듯 반가웠다. 디자인의 기본은 쓰기 편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제품의 품질과 기능은 두말할 것 없이 우수해야 하고, 거기에 디자인도 아름답고 가격까지 합리적이면 더할 나위 없다.
무지 CD 플레이어 ⓒchoisunho
무지 CD 플레이어 ⓒchoisunho
무지 충전 라디오 ⓒchoisunho
무지 충전 라디오 ⓒchoisunho
두 가전을 살펴보았다. 기능은 우수하다고 믿고, 디자인에 눈이 간다. 단순하지만 똑 떨어지는 미감이다. 바로 비례가 아름다운 상큼함이다. 가로, 세로, 두께의 쾌적한 맛과 묵직한 느낌은 마치 1920년대 독일 바우하우스(Bauhaus)의 심플한 디자인을 보는 듯하다. CD 스테레오 소리가 낭랑하다. 충전식 라디오는 더욱 인상적이다. 건전지와 충전식 두 타입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야외에서 건전지가 없어도 수동으로 충전기를 돌려 충전할 수 있도록 설계한 라디오에 휴대용 휴대전화 충전도 가능하고 조명도 겸해 등산 시 조난을 당했거나 하는 유사시 비상 발전기 역할을 하도록 설계됐다. 작지만 큰 아이디어를 단순함과 실용으로 만들어낸 무지의 힘이다.



비움의 미학

무지 디자인은 텅 빈 단순함이다. 무지는 실용성과 아름다움에 가격 경쟁력까지 겸비한 일본 생활용품 브랜드다. 무지 디자인의 뿌리는 일본 선종 사찰의 간결함과 자연주의 미학이다. 무지 제품은 식품으로부터 시작해서 가구, 의류, 가전, 문구류, 안경, 화훼류, 주택과 사무실 설계 시공까지 현대인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제품을 일본답게 구성하고 일본스럽게 진열했다.
무지 매장, 도쿄 긴자 ⓒchoisunho
무지 매장, 도쿄 긴자 ⓒchoisunho
독일의 디자인 혁명 바우하우스처럼 무지 디자인은 ‘이에(家) 프로젝트’를 통해 일본 주거공간의 혁신을 도모하고 있다. 빈틈을 규격화해 작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고 불필요한 제품 포장과 비용을 제거해 소비자에게 좋은 제품을 적당한 가격으로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도록 한 생활의 달인이다.

무지의 원래 제품명은 무인양품(無印良品)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제품’이라는 의미의 무인양품은 무인에서 불교적 냄새가 나지만 ‘좋은 물건’이라는 의미의 양품과 합쳐 곱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드는 명품 작명이다. 무지의 힘은 제품의 질도 좋고 가격도 적당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지가 지향하는 무지만의 고유 색깔에 있다. 마치 교토(京都)의 선종 사원 긴카쿠지(銀覺寺)의 다실처럼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깊이가 바로 무지 디자인이다.
교토 선종 사원 긴카쿠지의 다실
교토 선종 사원 긴카쿠지의 다실
무지 디자인

무지는 1980년 가을, 다나카 이코(田中一光)라는 크리에이터의 생활미의식과 일본유통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기업가 쓰쓰미 세이지(堤淸二)가 가진 교감에 의해 태어났다. 그 기본은 제품의 생산 과정을 철저하게 간소화함으로써 매우 간결하고 값이 싼 상품을 만들어 냈다. 내용을 중시하는 상품 개발과 간결한 포장 형태, 그리고 표백하지 않은 종이 소재의 사용은 매우 순수하고 신선한 제품을 출현시켰다.

예를 들자면, 히트 상품의 하나인 ‘깨진 표고버섯’은 형태를 완전하게 유지한 것만이 상품으로 만들어지던 그때까지의 건조표고버섯의 상식을 뒤바꾸어 종래에는 배제됐던, 형태가 좋지 않거나 깨진 것들만 선별해 상품으로 만든 것이다. 조리할 때는 잘게 썰기 때문에 버섯의 형태가 다소 이상하더라도 실용적으로는 전혀 손색이 없다는 발상의 전환에 의해 값싸고 질 좋은 건조표고버섯이 상품화됐다.

제품은 불티나게 팔렸고, 무지는 서서히 ‘이유 없이 싼 제품’이 아니라 ‘이유 있는 좋은 제품’으로 인식되게 됐다. 출발은 일상의 소소한 차별 상품이었지만 결과는 우량 제품의 무한 도전이었다. 여기에는 무지만의 개성과 철학이 담긴 제품 개발과 광고 전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됐다. 그것은 바로 무지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어떤 현상과 주제와 생각과 의지의 발현이다. 디자인은 만드는 사람과 쓰는 사람의 관계에서 재현되고 되풀이 된다. 그것은 동시에 새로운 미적 체험이기도 하다. 기능과 형태의 관계에서 다시 일상과 사용의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은 철저히 우리의 일상을 다시 디자인한다.

디자인을 거치지 않고 디자인을 통하지 않고 우리는 사물과 만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결국 디자인이 표방하는 건 사물이 아니라 우리의 미감이다. 미감은 디자인을 통해서 숨겨지거나 드러나는 삶의 또 다른 형태다. 그래서 디자인이 중요하다. 무지의 디자인 철학은 극도로 단순한 형태를 모색하면서 쓸데없는 힘을 들이지 않는 일상의 신선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무지의 디자인은 단순하다.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는 비움의 미학이 무지가 표방하는 디자인이다.
무지 잡지 광고, 2002년
무지 잡지 광고, 2002년
디자인의 철학

무지는 제품을 차별화하면서 디자인에도 새로운 전략으로 광고했다. 그것은 바로 ‘디자인 하지 않은 디자인’을 표방한 ‘노 디자인(no design)’이었다. 무지의 광고 콘셉트는 한마디로 말하면‘비움’이다. 즉, 광고가 명확한 메시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빈 그릇을 내보이는 것처럼 하자는 의미다. 무지의 광고에는 메시지로서의 광고 문구를 넣지 않았다.

무인양품이라는 로고타입은 어떤 의미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캐치프레이즈며, 브랜드 마크이기도 하다. 네 개의 글자도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적절히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그러한 의미로 상품을 사용한 광고에서는 상품만을 화면 중앙에 바꿔 넣으면서 화면의 어딘가에 무인양품의 로고가 배치되는 간결한 스타일을 만들었다. 간결한 디자인이 간결한 광고를 만든 셈이다.
무지 기업 이미지 광고
무지 기업 이미지 광고
무지의 제품 광고뿐 아니라 기업 이미지 광고에서도 기본적으로 동일한 방식이 사용됐다. 그것은 바로 장대한 규모의 텅 빈 그릇으로서 ‘지평선’의 사진을 사용했다. 지평선이란 아무것도 없는 영상이지만 반대로 모든 것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 모두를 바라보는 영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과 지구를 다루는 궁극적인 풍경이다.

화면을 확실하게 둘로 가른 남미 볼리비아 안데스 산맥 가운데 소금호수 우유니는 무지 콘셉트 광고 사진의 최적지였다. 우유니는 표고 3700m의 안데스 산맥 중턱에 있는 세계 최대의 소금호수로 정확하게 바싹 마른 소금평원이다.

순백색의 거대한 평면, 그곳에는 사방이 순백색인 대지와 푸른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텅 빈 공간이다. 그곳에 점처럼 서 있는 우유니 마을 14세 소녀는 모든 것을 다 버렸지만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 무소유의 극이다. 단순하지만 지구와 인간의 궁극적인 구도, 아무것도 없지만 그곳에 모든 곳이 담겨 있다. 그것도 무지 디자인 철학이 담긴 공간이다.



무인양품의 집

무지에는 제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집도 있다. 바로 ‘무인양품의 집(家)’이다. 나무(木)의 집, 창(窓)의 집, 아침(朝)의 집이 그것으로 오래 쓸 수 있고 변화가 실현 가능한 집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 무인양품의 집은 무지의 제품으로 기본을 채우도록 공간을 설계하고 가격과 건축 규모에서 일본의 중산층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마치 무지 매장의 일부인 듯한 풍경은 무지가 지향하는 디자인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하다. 자
창의 집 실내, 2007년
창의 집 실내, 2007년
연주의를 표방한 단순성이 불과 건평 25평의 작은 공간을 넓고 쾌적한 공간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비밀은 수납이다. 모든 것은 무지의 규격화하고 표준화된 제품 디자인이 집 안의 수납에 모두 사용됐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기능의 단열마감재와 외부 단열공법은 냉난방과 쾌적한 실내 공기를 유지하게 해 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했다.

물론 현대 건축의 발달과 마감재의 고급화로 어떤 건축 공간이라도 이러한 기본 기능에 충실하겠지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내 집을 장만할 수 있는, 그것도 생활에 품위를 유지하는 디자인하우스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고급 기능으로서의 제품이다. 이것은 마치 모든 회화, 조각, 공예 예술을 건축에 종결시키는 바우하우스의 이념처럼 무지의 모든 제품과 디자인은 ‘무인양품의 집’에서 완성을 보는 듯하다.

참으로 신선한 발상이면서도 지극히 일본 제품다운 발상이다. 에도(江戶) 시대 다다미집의 방 크기를 결정하는 다다미의 규격처럼 일본 디자인은 모든 것이 규격화됐다는 사실을 다시금 본다. 사람도 자동차도 건물도 생각도 모두 마찬가지다. 규격에서 벗어나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듯, 상품도 사람도 모두 규격에 갇혀 있다. 하지만 그 속에 순응하면 그보다 더 편할 수 없다. 그냥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모두 보통 사람의 삶이다. 일본의 보통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철학을 무지는 디자인의 철학에 담아 디자인하고 있다.


디자인의 디자인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다. 디자인 세상을 디자인한다. 어떤 건 조금 불편하고, 조금 덜 세련되고, 조금 투박하지만 나름 모두 자기만의 색이 있다. 다양성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법. 모두가 한결같다면 세상사는 일이 얼마나 지루할까. 화장하지 않은 세상, 디자인이 없는 세상은 원시자연의 상태다. 모던은 불편함이다. 디자인은 보다 편리한 생활을 이끌어 내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디자인에 맞게 품위를 지키는 일이 그것인가. 고급은 품위를 지키는 것부터 출발하고 정리정돈으로 마감한다. 단순하고 깨끗한 것은 비단 디자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네 삶의 정신 건강에도 마찬가지다. 비어 있을 때 비로소 그릇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처럼 정신도 비어 깨끗해야지 철학이 깃든다. 명언은 몇 마디로 끝난다.

최고의 디자인은 단순함이다. 단순한 듯 보이지만 그 속에는 진리라도 담을 수 있어야 비로소 명품 디자인이 된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수저의 역사는 인류가 도구를 발명한 순간부터 함께 진보해 왔다. 그 노력의 결과가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사용하는 보통 디자인의 수저임을 감안하면 단순함이야말로 생활 깊숙한 일상에서 우러나온 지혜의 소산이다.

무인양품의 제품은 일본 선종 사원의 비움과 일본인의 획일화에서 나온 지극히 일본다운 디자인의 발로다. 세상 사람들은 가까운 곳보다 멀리, 아는 곳보다 미지의 땅을 동경한다. 무지 디자인도 마찬가지다. 일본적이지만 남의 디자인이고 먼 곳의 디자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호기심과 관심을 갖는다. 나도 그렇다. 이유는 간단하다. 좋은 디자인의 덕목을 두루 갖고 있기 때문이다. 쓰기 편하고 눈에 아름답고 질 좋은 제품에 합리적인 가격이 그것이다. 소비자를 모두 만족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이것들을 충족시키는 것 또한 우량 기업이 해야 할 덕목이다. 무인양품에서 만들어 낸 무지 디자인은 그래서 좋다.
無印良品 더할 수 없이 간결한 아름다움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소장.

현재 전업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



편집자 주 : 그동안 동서양 화가들의 예술세계를 소개하는 ‘아트 오디세이’ 를 연재해 온 최선호 화가가 새 연재를 시작합니다. 세계적 디자인의 산실을 순례하는 ‘디자인 오디세이’에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