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최울가


최울가는 우리 화단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화가다. 유아적이며 원시적인 그의 작품은 한국 화단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화풍을 보여준다. 미국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그가 연말을 맞아 잠시 한국을 찾았다. 한국에 오면 머문다는 경기도 파주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화단의 이단아, 회화의 정점에 서다
서양화가 최울가의 주요 활동 무대는 뉴욕이다. 맨해튼에 있는 집과 퀸즈에 있는 작업실을 오가며 생활한다. 미국 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뉴욕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데는 그만의 이유가 있다. 서양화의 원류는 유럽이다. 미감이나 시각이 서양 사회의 속성에 맞춰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면에서 뉴욕은 적잖은 매력을 간직한 곳이다. 뉴욕은 1930, 40년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모습을 간직한 곳이다. 근대와 현대가 충돌하며 만들어진 도시가 뉴욕인 셈이다. 다양한 인종과 그보다 훨씬 다양한 계층이 사는 곳, 뉴욕. 그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응축된 도시가 뉴욕이다. 뉴욕이 예술의 중심 도시가 된 데는 그 에너지를 무시할 수 없다.

뉴욕 이전에는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다. 그게 벌써 15년 전이다. 한국 화단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의 화풍은 어쩌면 한국 화단의 이단으로 살아온 최 작가의 삶을 대변해주는지도 모른다.
통역사였던 아버지 덕에 문화적 혜택을 누리며 자란 최울가. 그는 책을 통해 예술가들의 삶을 접하며 그들의 삶을 동경하게 됐다.
통역사였던 아버지 덕에 문화적 혜택을 누리며 자란 최울가. 그는 책을 통해 예술가들의 삶을 접하며 그들의 삶을 동경하게 됐다.
군대 생활과 정신분열증

“동료 작가들이 그래요. 최울가는 마약을 하지 않고 마약한 사람처럼 그림을 그린다고요. 사실 남다르다는 말은 어려서부터 숱하게 들었습니다. 아버님이 통역사셨는데, 그 덕에 책과 음악 속에서 자랐습니다. 예술가들의 삶을 책으로 접하면서 그들의 삶을 동경하게 됐죠.”

자유분방한 집안 분위기 덕에 어려서부터 그는 그림에 빠졌다. 그림도 남달랐다. 남들 다 하는 데생이나 정물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런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을 무시하기도 했다.

“말로는 무시했지만 사실 기술적으로는 친구들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어요. 친구들은 꽃이나 인물, 풍경을 그리는데, 저는 그런 데 관심이 없었어요. 오히려 광기가 서린 얼굴을 그리고, 그런 게 예술이라고 확신했으니까요.”

남다른 청소년기를 보낸 그에게 또 한 번 삶의 전환기가 찾아온다. 바로 군대다. 군대 시절 그는 고참과 장교들 눈 밖에 나 심한 얼차려를 받았다. 장교들과 마주치면 벽으로 숨어들 정도의 정신분열증을 경험하게 된다.

억압과 정신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심리학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그 상황을 벗어나는 첫걸음이 자신이 직면한 상황을 스스로에게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6개월간 그런 연습을 했고, 그 과정을 통해 작가로서의 독특한 시각을 갖게 됐다고 한다.
화단의 이단아, 회화의 정점에 서다
유화를 기본으로 다양한 재료로 변화 시도

군대를 나온 그는 1979년 부산 수로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슈르리얼리즘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전시였다. 당시 그의 작품을 본 한 평론가는 “이 친구 나이는 어린데 진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놈”이라며 “나중에도 그림 그리며 먹고 살 놈”이라고 평했다.

어린 작가에게 그 말은 크나큰 힘이 됐다. 이후 작품 활동을 하던 그는 1984년 홀연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그러나 가난한 동양의 예술가에게 파리는 냉혹한 곳이었다. 그때부터 15년 가까이 그는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1990년대 초반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최울가 식의 독특한 컬러는 화단의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연히 안티세력이 많았다. 간혹 “한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컬러를 쓰는 작가가 있구나”라는 평론가들의 말을 위안으로 삼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그때도 그는 다양한 시도를 많이 했다. 크레용, 아크릴 등 다양한 재료를 썼고, 깊이감을 주려고 한지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유화를 기본으로 하는 작품을 하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유화 자체는 역사가 오래된, 아주 클래식한 재료예요. 재료 자체로는 컨템퍼러리한 맛을 내는 데 한계가 있는 거죠. 그 대신 표현 자체에서 컨템퍼러리한 느낌을 내야 하는 거죠. 그런 느낌을 위해 크레용 등 다양한 재료를 쓰는 거예요.”

유화를 기본으로 하지만 크레용을 동시에 쓴다. 크레용은 1980년대부터 쓰다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쓰게 됐다. 컬러 라인을 내는 데 크레용만한 재료도 없기 때문이다. 크레용과 함께 스프레이와 다양한 오브제를 동원하고, 직접 색을 만들어서 쓰기도 한다.


변화를 위해 작품을 불사르다

1990년대 이후 한국 화단의 적잖은 주목을 받던 그는 새로운 그림을 찾아 뉴욕행을 결심했다. 파리 생활처럼 뉴욕에서의 생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쥐가 왔다 갔다 하는 소호의 화실에서 온종일 캔버스 앞에서 시름했다. 그런 생활을 통해 그는 자신만의 색을 찾았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블랙 앤드 화이트(Black & White)’ 시리즈가 바로 소호 작업실의 결과물이다.
<2009 XP Black Series>, 2009년, 캔버스에 유화, 163×130.3cm
<2009 XP Black Series>, 2009년, 캔버스에 유화, 163×130.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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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앤드 화이트는 색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 제품을 봐도 흰색, 아니면 검은색이잖아요. 그림도 마찬가집니다. 기법만 다를 뿐 똑같아요.”

하지만 예술에 대한 그의 광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벌써 2년 6개월 전의 일이다. 오랫동안 그림의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던 그는, 그때까지 작업한 모든 작품을 불살라버렸다. 100호에서 400호짜리 250여 점의 그림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 그 양이 얼마나 많았던지 5시에 태우기 시작해 밤 9시까지 타올랐다.

그라고 고민이 없을 리 없었다. 미국에서 1달러짜리 중국 음식을 먹으며 어렵게 그린 그림들이었다. 그는 지금도 그때 태운 모든 그림들이 기억난다고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예전 작품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새로운 작품이 안 나올 듯했다.

“돌파구에 대한 어떤 절박함이라고 해야 할까요. 다 태우고 나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기도 하더군요. 그런 시련을 겪고 나니까 한 걸음 더 나가는 듯했어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림 가격도 오르고요. 1000만 원 선에서 거래되던 100호짜리가 이후 4000만~5000만 원에 거래됐으니까요.”

예술가는 변화를 통해 새로 태어난다. 최울가는 그의 삶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의 변화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2010년 그는 또 한 번의 충격을 경험했다. 진원지는 뉴욕 73번가 가고시안 갤러리. 그곳에서는 데미안 허스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동양인이 서양화로 인정을 받으려면 그림을 통해 열정과 감정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림이 세밀하고 정교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죠.”
“동양인이 서양화로 인정을 받으려면 그림을 통해 열정과 감정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림이 세밀하고 정교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죠.”
“다이아몬드며 보석으로 해골을 만들고, 하여튼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했더라고요. 데미안 허스트니까 인정해주지, 제가 그걸 작품이라고 걸어놨어도 인정을 했을까요. 그때 깨달았어요. 서양화로 인정을 받으려면 그림을 통해 작가의 감정과 열정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요. 그 뒤 그림이 더 세밀해졌어요.”

짧은 체류를 끝으로 한국을 떠나면서 최 작가는 지난해에 100호 작품을 기껏 2개밖에 못했다고 아쉬운 듯 말했다.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는 작품은 내놓지 못하겠다는 작가 최울가. 완벽한 그림을 위한 그의 변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