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갑 전 대림요업 대표

지난 11월 8일 아침, 이학갑 전 대림요업 대표를 만나기 위해 서울 남산에 올랐다. 목적지는 산중턱에 위치한 국궁장 석호정. 욕실 전문기업 대림요업(현 대림B&Co) 를 이끌던 이 전 대표는 지난해부터 국궁에 푹 빠져 살고 있다. 최고경영자(CEO)의 건강에는 국궁만한 게 없다는 것이 이 전 대표의 국궁 예찬론이다.


서울 남산 석호정. 정확한 시초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활을 쏘던 활터다. 이 유서 깊은 활터에 흰색 궁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가 사대에 자리를 잡고는 잠시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곧바로 거궁 자세를 취했다. 짱짱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자 화살이 날쌔게 가을 하늘을 갈랐다. 부드러운 곡선이 하늘에 그려졌다. ‘쿵.’ 145m 앞, 화살이 튕겨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과녁에 고정된 스티로폼에서 울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관중(貫中)이었다. 관중한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학갑 전 대림요업 대표였다.
“국궁이 CEO에게 딱 맞는 운동이죠”
국궁은 종합 헬스 효과를 내는 스포츠

이 전 대표는 기자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국궁 자랑을 시작했다. 그는 일반인에게 국궁을 가르치기 위해 석호정에 마련된 칠판까지 동원해 하나부터 열까지 국궁이 왜 좋은지에 대해 설명했다.

“활 쏘는 것이 가만히 서서 팔 힘으로만 하는 운동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전신운동입니다. 게다가 오면서 느끼셨겠지만 활 쏘러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도 벌써 유산소 운동이 되고, 숲속이라 피톤치드(phytoncide: 숲 속의 식물들이 만들어 내는 살균성 물질)도 실컷 마시니 몸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활을 쏠 때는 전신의 근육을 쓰기 때문에 종합 헬스를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한다. 곧은 자세가 중요하다 보니 몸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해 위장병이나 디스크를 치료하는 데도 효과가 크다. 이 전 대표는‘정(丁)’자 꼴도 아니고 ‘팔(八)’자 꼴도 아닌 각도를 뜻하는 ‘비정비팔(非丁非八)’ 자세로 활시위를 당기고 있노라면 항문이 꽉 조여져 요실금 예방에도 효과 만점이라고 귀띔한다.

“저는 오십견 때문에 쑤셔서 밤에 잠을 잘 못 잤어요. 병원에 다녀도 잘 낫지 않았는데 활을 쏘면서 많이 나아졌죠. 녹지에서 먼 곳을 응시하다 보니 눈이 좋아져서 안경 도수도 낮췄고요.”

이 전 대표는 ‘국궁 예찬론’을 털어 놓으면서 골프와 비교해 설명하는 일이 잦았다. 사람의 마음 상태에 민감한 멘탈 스포츠이고,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결과도 크게 달라지는 면에서 비슷하기 때문. 그러면서도 그는 국궁이 골프보다 낫단다.

“활쏘기가 훨씬 간편합니다. 인원 수를 맞춰 갈 필요도 없고, 언제든 가까운 곳에 가서 쏠 수 있으니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아요. 장비도 골프에 비해 훨씬 싸고 가볍고요. 시위를 당기고 과녁에 집중하다 보면 잡념도 없어집니다. 바쁘고 업무 스트레스가 많은 CEO들에겐 정말 유익한 운동이죠.”
“시위를 당기고 과녁에 집중하다 보면 잡념도 없어집니다. 바쁘고 업무 스트레스가 많은 CEO들에겐 정말 유리한 운동이죠.”
“시위를 당기고 과녁에 집중하다 보면 잡념도 없어집니다. 바쁘고 업무 스트레스가 많은 CEO들에겐 정말 유리한 운동이죠.”
술은 내일의 힘을 끌어 쓰는 CEO의 적

이 전 대표는 1975년에 대림산업에 입사해 2002년까지 대림그룹에 몸담았다. 1995년 대림흥산 대표, 1997년부터는 욕실 전문 기업 대림B&Co의 전신인 대림요업의 대표를 역임했다. 화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얀 곰 로고가 바로 대림B&Co의 것이다. 그는 비교적 성공이 빠른 직장인이었다. 34세부터 회사의 임원이 됐다.

“대림에 들어가기 전에 은행에서 잠깐 일했어요. 그때 은행연합회에서 하는 연수를 갔는데 브리핑 요령을 가르쳐 주더라고요. 그걸 잘 배워둬서 두고두고 써먹었죠. 그렇게 배운 브리핑 실력 덕분인지 승진이 빠른 편이었습니다.”

그는 임원으로 있는 동안 17명의 CEO를 가까이서 보필했다. 그 시간은 각 CEO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해서 CEO로서 자신의 길을 만들 수 있는 시기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대림요업을 이끄는 동안 큰 실적을 올렸다. 300억 원, 80억 원 적자이던 회사의 연매출과 순이익을 700억, 140억 흑자로 끌어올렸다.

빠른 승진과 성공 때문에 개인 시간은 없어졌다. ‘주인정신으로 일하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일하자니 주 7일 근무도 모자랐다. 운동은 엄두도 못 냈다. 다행히 담배는 일찍 끊었고 술도 즐기지 않는 편이라 큰 병치레는 없었다.

“CEO가 술을 많이 하면 안돼요. 술을 많이 하면 음주운전하듯 회사가 비틀비틀 가요. 그래서 저도 1차만 우리 직원들한테 권유했지 2차, 3차 가지 않았어요. 술이란 게 내일의 에너지를 오늘 밤에 당겨서 쓰는 거예요. 2차를 가면 모레의 에너지를 당겨 쓰는 것이고.”
이학갑 전 대표에게는 아직 궁사로서의 목표가 있다. 바로 5발 연속으로 관중하는 ‘몰기’다.
이학갑 전 대표에게는 아직 궁사로서의 목표가 있다. 바로 5발 연속으로 관중하는 ‘몰기’다.
취미로 시작해 ‘국궁 전도사’로

이 전 대표가 활을 처음 잡은 것은 지난해 7월이다. 대림대에서 겸임교수로 마케팅과 리더십 강의를 하던 중 제자의 소개로 연익모 대한국궁문화협회 총재를 만나면서 국궁을 시작했다. 국궁 인구를 늘리기 위한 연 총재의 교육 사업을 돕기 위해 함께 상식과 교양 강의를 하면서 차츰 국궁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후 매일같이 이곳에 와 시위를 당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대한국궁문화협회 상임고문이라는 직함을 달고 일반인에게 국궁을 가르치는 ‘국궁 전도사’가 됐다.

국궁 전도사가 되고 나서 그는 주위에 국궁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그의 친구들은 “나이가 많아 그런 걸 할 수 있겠느냐”면서 괜히 겁을 내지만 약한 활부터 시작해 자기 힘에 맞는 활을 당기기 때문에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권장할 만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국궁을 찾는 사람이 많이 늘었어요. 대기업에서 야유회로 오기도 하고, 얼마 전에 개봉한 활에 대한 영화 <최종병기 활>을 보고 찾아오는 학생도 많습니다. 사람이 많은 주말이면 국궁 체험을 할 수 있는 이곳 석호정에 100명 넘게 찾아와서 밥도 못 먹고 활쏘기를 가르칠 때도 있죠.”

이제는 ‘좀 쏜다’고 할 만한 실력이지만 이 전 대표에게는 아직 궁사로서의 목표가 있다. 바로 5발 연속으로 관중하는 ‘몰기’다.

“이제 4발은 자주 맞추니까 조만간 몰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공자께서 사불주피(射不主皮: 활을 쏠 때 과녁을 맞추는 데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셨지만 조금은 욕심이 나네요.(웃음)”




글 함승민 기자 hamquixote@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