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인태


홍익대와 뉴욕 브룩클린 칼리지 대학원에서 공부한 김인태 작가는 스테인리스 스틸, 동판, 아크릴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해 작업해 왔다. 최근 그는 책을 활용한 색다른 작업을 선보이며 눈길을 끌고 있다.
자본의 시대에 예술을 논하다
작가를 만나기에 서울 인사동만한 곳도 없다. 그곳에는 크고 작은 갤러리가 있어 이야기의 소재가 끊이지 않는다. 작가의 입장에서도 다른 작가들이 어떤 경향의 작품을 하는지, 최근 미술계의 트렌드는 어떤지 알아보기에 인사동만한 곳이 없다. 물론 친숙한 술집, 찻집이 있다는 점도 인사동의 매력이다.

작가 김인태를 만난 곳도 인사동의 한 노천카페였다. 카페에서 만난 김 작가는 전날 과음으로 속이 불편하다고 했다. 인터뷰를 앞두고 그러면 안 되는데, 동료 작가와 논쟁이 붙어 어쩔 수 없이 과음을 했단다.

논쟁의 불씨는 동료 작가가 지폈다. 대학 때 김 작가의 작품은 사회성을 담고 있어 작가로서 치열함이 엿보였는데, 지금은 시류에 너무 영합한다는 것이 동료 작가의 주장이었다. 술에 취해 한 말이었지만, 그게 발단이 돼 술자리가 길어졌다.



예술가는 사상가라고 믿었던 대학 시절

그의 최근 작품이 대학 때와 경향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그는 정치·사회적인 이슈를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했다. 하긴 그가 대학에 다니던 1980년대는 좌파가 아니면 의식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던 때였다. 그도 연극반을 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대학 시절 그는 정치·사회 이슈를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하다가 최근에는 이념보다는 인간적인 문제에 집중하게 됐다.
대학 시절 그는 정치·사회 이슈를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하다가 최근에는 이념보다는 인간적인 문제에 집중하게 됐다.
“군대에서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가 ‘예술가는 사상가다’라는 겁니다. 대학 내내 인체를 어떻게 예쁘게 만들까만 고민하던 저에게 충격이었죠. 그 뒤 칼 마르크스와 루시앙 등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책을 탐독했죠. 그 영향으로 작품도 체제 전복적인 주제를 담은 게 많았습니다.”

홍익대 대학원 시절에도 작품 경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대학원 졸업 후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그는 또 다른 세계에 눈뜨게 됐다. 뉴욕은 모든 예술가의 꿈의 고향이다.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술가가 한번쯤은 뉴욕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유학 갈 만큼 집이 여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원만 졸업하면 밥벌이를 할 줄 알았던 아버지를 설득해 그는 1992년 뉴욕으로 떠났다.

예술의 도시, 뉴욕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대학 내내 인체만 배우다 대학원에 가서야 겨우 추상과 반추상에 눈을 뜬 그에게 설치미술과 미디어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는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김 작가가 추구하는 게 결국은 비주얼아트다. 그는 피나바우처 같은 무용가들의 공연을 보면서 춤에서 비주얼아트의 본질에 접근하게 됐다. 커다란 어항 안에서 춤을 추다 어항을 깨고 튀어나온 물고기들이 바닥에 퍼덕이는 것을 보면서 춤이야말로 비주얼아트의 첨병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용가 안은미 씨를 알게 된 것도 그즈음이었다.

음악도 그에게 뮤즈 역할을 했다. 뉴욕 생활 이전 알던 음악이라야 록과 재즈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뉴욕 할렘가의 공연장에서 접한 헤비메탈은 문화의 다양성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저는 잡식성입니다. 음악도 대금부터 헤비메탈까지 다양한 장르를 들었어요. 그런데 뉴욕 생활을 마감하고는 또 10년 가까이 음악을 듣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최근에 음악감독 출신이 하는 술집을 알게 됐는데, 거기서 실컷 음악을 듣게 됐습니다. 요즘은 그 재미가 쏠쏠합니다.”
“작가가 하고 싶은 작업을 계속하면서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게 필요한 거죠.”
“작가가 하고 싶은 작업을 계속하면서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게 필요한 거죠.”
예술가의 자양분이 돼준 뉴욕 유학 시절

1992년에 시작한 뉴욕 생활은 1997년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그는 뉴욕시립대 브룩클린 칼리지 대학원을 다니며 뉴욕의 문화를 온몸으로 겪었다. 백남준을 필두로 유행하던 미디어아트에서 행위예술과 춤, 그리고 음악까지.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그는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도출해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귀국 후 그는 성곡미술관을 중심으로 여러 미술관에서 다양한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당시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작가 김인태의 실험정신을 보여준 시기. 그러나 세상은 보다 쓰임새가 있는, 틀이 있는 작품을 원했다.

유학 후 통과의례처럼 미술관 순례를 마쳤더니 불러주는 갤러리가 더 이상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사회적인 문제, 생태학적인 문제 등을 다룬 정치색이 강한 작품을 했다.
자본의 시대에 예술을 논하다
“예술가는 사회라는 칼의 날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칼끝이 무디면 칼이 제 기능을 못하잖아요. 예를 들어 통일을 보자고요. 통일만큼 강한 폭발력을 가진 주제도 없거든요. 소외계층 문제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것을 사회적 이슈로 강하게 부각시키는 게 예술가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마흔에 가까워지면서 생각이 조금씩 변했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그는 이념보다는 인간적인 문제에 집중하게 됐다. 사회적 이슈보다는 개인의 문제, 인간 본성에 천착한 작품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요즘 그러잖아요. ‘좋은 작가=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라고. 예전에는 그 말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 작업에도 한계가 생기더라고요. 그렇다고 시류에 너무 편승해서도 안 되고요. 작가가 하고 싶은 작업을 계속하면서 대중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게 필요한 거죠.”



사과, 책 등 새로운 물성에 매료돼 선보인 근작

의식의 변화와 함께 시도한 게 사과 작품이다. 김 작가를 알게 된 것도 실은, 2008년 우연히 들른 갤러리에서 본 그의 사과 작품을 통해서였다. 작품 제목은 <사과 모자상> (母子像)이었는데, 직각으로 절단한 단면 속에 같은 구조의 작은 얼굴상을 배치해놓은 모자상을 사과 형태로 대치한 것이었다. 엄마와 아기로 비유되는 사과 모자는 전통적인 조각의 소재로 자주 다루어져 왔던 모자상의 현대적 변주로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당시 그의 작품을 두고 “그가 생명 현상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은 그가 선택하는 대상이 다름 아닌 생명을 지닌 식물의 형상이란 데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간과 같은, 생성되고 소멸되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가 구현해내는 질료(質料)가 아무리 건조하고 무기적이라도 형태가 지닌 원래의 생명 현상으로 인해 밝고 건강한 은유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평했다.
자본의 시대에 예술을 논하다
사과 작품에 이어 2010년에는 책을 소재로 한 작품을 시작했다. 책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책 속에 담긴 언어와 책 자체가 갖는 속성 등에서 새로운 의미를 끌어낼 수 있을 듯했다. 책 작업은 그렇게 출발했다.

책 작업을 시작하며 그는 고서점이 있는 청계천은 물론 중국 예술특구인 베이징의 798단지와 뉴욕에서 미술잡지 등을 구했다. 어렵게 구한 책의 단면을 잘라내고, 잘라낸 단면에 다시 의미를 새겼다. 어찌 보면 책 작업은 물질 만능주의와 예술이 가고자 하는 엇갈린 방향에 대한 그만의 문제 제기인 셈이다.

“최근에는 책 작업에 탄력을 받아 가구로 쓸 수 있는 대형 작품까지 만들게 됐습니다. 내년 한국국제아트페어(KIAF)에는 사과, 책 등 새롭게 발견한 물성을 가지고 대형 작품을 내볼 생각입니다.”




김인태 작가는 최근 사과, 책 등 새로운 물성을 통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