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옛 유럽의 영광을 되찾고자 자유사상가에 의해 구상된 ‘하나의 유럽’이라는 원대한 꿈이 이탈리아 사태를 계기로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가 발생한 지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단일 경제 현안으로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다. 지난해까지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과 같은 경제소국에서 올해 들어서는 스페인, 이탈리아 심지어는 독일과 함께 최후 보루 역할을 담당해온 프랑스까지 번지고 있어 앞으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탈리아 사태를 계기로 성격과 범위 면에서 새로운 국면에 진입

다른 국가와 달리 이탈리아는 유로랜드 3위, 세계 8위의 경제대국이다. 또 3년 전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방선진 7개국(G7)의 일원으로 글로벌스탠더드 제정과 이행을 주도해 왔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사태를 계기로 유럽 위기가 크게 두 가지, 즉 위기의 성격과 범위 면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는 것이 국제 금융시장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하나는 유럽 위기가 특정 회원국의 재정 문제에서 비롯됐으나 이제는 은행 혹은 금융위기로 악화되고 있다는 시각이다. 또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유로랜드 혹은 유럽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글로벌 위기 성격이 짙다는 점이다. 따라서 금융의 본래 기능을 감안할 때 이번 사태가 조속한 시일 안에 해결되지 않으면 세계 경제가 본격적인 침체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만큼 종전과 달리 이탈리아 사태가 발생하자마자 위기 극복 주체나 해결 방안에 있어서 새로운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그중의 하나가 위기 극복 주체가 교체되는 것으로 지금까지는 개별 회원국의 재정위기였던 만큼 통합에 따른 이점이 많았던 프랑스와 독일이 위기 극복의 책임을 맡아 왔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은행 혹은 금융위기로 비화된 만큼 주무부서인 유럽중앙은행(ECB)이 본격적으로 나설 태세다. 마리오 드라기 ECB 신임 총재가 취임 직후 기준금리를 전격적으로 인하하고 아직까지 제한적이긴 하지만 미국 중앙은행(Fed)처럼 국채 매입을 통해 양적완화(QE)를 추진하고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변화는 위기의 범위가 글로벌 성격을 띠는 만큼 국제 금융시장 안정의 책임을 맡고 있는 국제통화기금(IMF)이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점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브릭스(BRICs) 국가 등을 대상으로 재원 확충에 나서고 있다. 2012년 IMF 재원도 유럽 위기 해결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방향으로 변경했다.
유로 회원국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단일환율 적용으로 갈수록 심화돼 왔던 역내 회원국 간의 불균형 해소다.
유로 회원국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단일환율 적용으로 갈수록 심화돼 왔던 역내 회원국 간의 불균형 해소다.
ECB, IMF가 나선 것은 대부분 회원국에서 위기 가능성이 높기 때문

이탈리아 사태가 발생한 직후 ECB와 IMF가 직접 나선 것은 대부분 회원국에서 위기 가능성이 높게 나오기 때문이다. 특정 국가에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모리스 골드스타인의 진단지표가 자주 활용된다. 이 기준대로라면 단기투기성 자금의 이탈 여부는 자산 인플레이션 정도, 유입된 외국 자금의 건전도 등으로 평가된다.

중장기 위기 진단지표는 대상국의 해외 자금 조달 능력, 국내 저축 능력이다. 이 중에서 단기 위기 진단지표가 악화될 경우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우리도 경험한 것처럼 대상국의 해외 자금 조달 능력에 곧바로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민간 부문의 저축률과 재정수지로 표현되는 국내 저축 능력이 더 중시된다.

골드스타인의 위기 진단지표를 적용해 유로랜드 17개 회원국들의 위기 가능성을 진단해 본다면 독일과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회원국들에서 위기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유럽 재정위기 이후 경상수지가 악화되는 것이 유로랜드 회원국들의 위기 대응 능력을 급속히 악화시키는 주요인으로 나타났다.

앞으로 ECB, IMF가 유럽 위기 극복에 나선다면 다양한 해결책을 동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상당히 크다. 이탈리아 사태만 하더라도 기존의 긴축안과 구제금융안을 보다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뿐만 아니라 ECB가 위기국의 국채를 매입하거나 지급보증을 하는 방안과 IMF가 자본 부족 국가에 지급하는 예비 신용공여도 가능해진다.

네 가지 해결책의 도입 가능성을 살펴보면 이탈리아가 약속한 재정긴축안을 과감하게 집행해 위기 해결을 시도해 보는 방안이다. 그리스 등에서 위기가 발생하면 부채 감축과 경기 회복 등 자력으로 구제에 성공해 시장의 신뢰를 회복한다는 원론적인 방안이다. 하지만 이탈리아처럼 당장 엄청난 부채를 갚아야 하는 상황에서 국채 값이 떨어질 경우 현실성이 결여될 뿐만 아니라 긴축 강화에 대한 국민의 저항도 예상된다.

그 다음으로 IMF가 유동성 악화로 어려움을 겪는 국가에 통상적으로 취하는 예비적 신용공여다. 올 11월 초 프랑스 칸에서 열렸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에서 IMF는 이탈리아에 저금리 대출을 제시했고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에도 이 기능을 부여했다. 조건부로 신용공여 라인을 만들면 이탈리아가 한숨 돌릴 여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에서다.

충분한 규모가 아니면 투자자 불안을 더 촉발시킬 가능성도 높은 방안이다.
이탈리아 사태가 발생한 직후 ECB와 IMF가 직접 나선 것은 대부분 회원국 에서 위기 가능성이 높게 나오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태가 발생한 직후 ECB와 IMF가 직접 나선 것은 대부분 회원국 에서 위기 가능성이 높게 나오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가 재정긴축안 집행에 차질을 빚게 되거나 자구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경우 그리스처럼 구제금융을 받는 것도 쉽게 접근 가능한 방안이다. 이탈리아가 구제금융을 신청한다면 신용을 회복할 때까지 3년 정도 채권 시장에서 퇴출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관건은 구제금융 규모다. EFSF가 추가적으로 확보되지 않는 한 이탈리아의 부실 채무 규모가 워낙 커 구제금융이 불가능하다는 시각이 공감을 얻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밖에 ECB가 이탈리아 부채에 대해 무제한으로 지급보증을 하는 방안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일부 유럽 국가들이 주장하는 방안이다. ECB가 이탈리아에서 발행되는 모든 국채를 매입하거나 이탈리아에 저리 대출을 시행하는 등 위기 대응 기능을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EFSF와 IMF의 한계가 분명한 상황에서 다른 대안이 없어 제시되고 있으나 독일이 유럽연합(EU)의 근간이 되는 리스본 조약에 위배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이미 유럽 위기가 재정위기에서 금융위기로 악화되고 있고, 갈수록 글로벌 성격을 띠는 점을 감안하면 특정 방안보다는 네 가지 방안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혼합해 대처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스 등 위기발생국의 지도자가 속속 교체되고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

위기발생국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바로 정치적 포퓰리즘의 상징이었던 지도자들이 속속 물러나는 대신 ECB, IMF에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이 차기 지도자로 부각되고 있다. 앞으로 이들이 지도자가 될 경우 ECB, IMF가 제시한 해결책을 신속하게 수용할 가능성이 높아 그리스 사태 이후 계속해서 문제가 돼온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와 이에 따른 정책 실기(失機)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는 임시 연립정부를 이끌 총리로 루카스 파파데모스 전 ECB 부총재를 선출했고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차기 총리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다. 파파데모스 신임 총리는 대표적인 유로존 지지자로 그리스 재정위기를 풀어나갈 적임자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 때문에 1300억 유로 규모의 2차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긴축재정안을 통과시켜야 할 임무를 맡게 됐지만 전임자와 달리 국민 동의를 쉽게 얻어낼 것으로 기대된다.

이탈리아도 차기 총리로 마리오 몬티 밀라노 보코니대 총장이 유력하다. 몬티는 전임자였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냉철하고 개혁적인 인물’로 평가돼 왔다. 주요 평가기관과 외신들은 ‘전면적인 개혁으로 이탈리아를 위기에서 구해낼 것’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다.
이번 사태가 조속한 시일 안에 해결되지 않으면 세계 경제가 본격적인 침체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사태가 조속한 시일 안에 해결되지 않으면 세계 경제가 본격적인 침체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모든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는 ‘신뢰’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국민소득 대비 200%가 넘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채를 갖고 있는 일본이 ‘국가부도(default)’우려에 시달리지 않는 것은 95%의 국채를 갖고 있는 국민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ECB, IMF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위기발생국의 지도자가 교체된다면 막혔던 ‘신용선(credit line)’이 재개되면서 악화만 되던 유럽 위기가 극복 단계로 전환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럽 위기가 완전히 해결되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과제 남아

최근 들어 새로운 움직임이 감지된다 하더라도 유럽 위기가 완전히 해결되기까지 쉽지 않은 일이다. 세계 경제와 국제 금융시장 안정 차원에서 자본편중국인 중국을 비롯한 브릭스 국가와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위기 극복에 모두가 동참하는‘프로 보노 퍼블릭코(pro bono publico)’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유럽 국가들도 유로화 가치 설정, 재정 통합 결여 등 통합이 갖고 있는 내부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유로 회원국들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단일환율 적용으로 갈수록 심화돼 왔던 역내 회원국 간의 불균형 해소다. 이론상 변동환율제를 채택하면 대외 불균형이 발생했을 때 자국 통화가치가 하락함으로써 균형을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유로랜드는 환율이 고정돼 있기 때문에 회원국의 대외 불균형이 가격 변수의 경고를 받을 수 없다. 따라서 계속 확대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original sin)를 갖고 있다.

단일통화 정책과 개별 회원국별 재정 정책 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통화 정책과 재정 정책은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어 정책 운용의 조화(policy mix)가 거시경제 안정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유럽통화동맹(EMU)은 단일통화 정책을 실시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제약 등으로 단일 재정 정책을 수행하는 재정 통합은 이루지 못한 상황이다. 따라서 역내 회원국 간 재정의 동질성을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EMU는 ‘역내 단일통화 정책―개별 사정을 고려한 국가별 독립적 재정 정책’ 체제로 운영돼 왔다.

재정 통합이 어려운 EMU의 입장에서 반드시 준수해야 할 핵심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반한 회원국들에 대한 제재 수위가 미온적 조치에 그친 관용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위반에 대한 최종 벌칙은 벌금 부과이며 그마저도 실행에 옮긴 사례가 전무하다. 이처럼 제재 조치가 강력하지 못한 것은 제재를 결의하는 주체가 자신들도 언젠가는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에 다른 회원국을 강하게 제재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 회원국 국가부도 등 EMU 체제를 동요시킬 만한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처하기 위한 비상대책(contingency plan)을 마련하는 일도 중요하다. 유럽 재정위기 사태에서 확인됐듯이 비상대책 부재는 시장의 불확실성을 높이고 EMU 체제에 대한 불신을 야기하는 주된 요인이다. EU 조약상 회원국 자격을 강제로 박탈할 수는 없고 회원국의 자발적 판단에 의해 탈퇴할 수는 있으나 이 경우 유로화 표시 대외 부채의 자국통화 재산정, 국가 신인도 하락에 따른 자금 유출 등 단기적인 부작용이 커서 이마저도 가능성이 낮다.

이 밖에 EU 회원국 확대의 실익 논쟁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강력한 유럽’을 만든다는 정치적 고려에 의해 회원국을 확대하고 경제 체질이 허약한 국가들도 유로지역에 포함시키는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2001년 EMU 가입 당시 그리스는 조세 기반이 되지 않는 불법 고용, 매춘 등 지하경제를 국내총생산(GDP)에 포함시킨 데다 재정 적자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음에도 가입한 것이 유럽 재정위기를 낳게 한 주범이다.

이상과 같은 근본적인 과제를 풀어가는 모습에 따라 향후 유럽 재정위기는 현 체제 유지(muddling through), 유럽통합 및 유로화 강화(bonds of solidarity), 유럽통합과 유로화 동시 붕괴(the collapse), 유럽통합 질서 회복(resurgence) 등의 네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할 수 있다.

‘현 체제 유지’는 유럽통합에 대한 회의론 확산에도 근본적인 변화 없이 중장기적으로 위기 관리 체제를 강화하면서 미비점을 보완하는 선에 그치는 시나리오다. ‘유럽통합 및 유로화 강화’는 유럽 재정위기로 붕괴 조짐을 보이는 유럽통합을 강화하기 위해 유로본드(E-bond) 도입, 유럽통화기금(EMF) 설립, 재정동맹 보완 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시나리오다.

반면 ‘유럽통합과 유로화 동시 붕괴’는 유럽 재정위기 회원국들이 독자 통화 도입을 위해 혹은 국내외 정치적 압력에 의해 유로통합을 탈퇴하고 잇달아 경제규모가 큰 회원국이 탈퇴하는 시나리오다. 가장 현실성이 높은 ‘질서 회복’은 특별한 조치 없이 주변국의 경쟁력 회복과 재정 개선 등으로 역내 회원국 간 불균형이 상당부분 해소되면서 유럽통합이 재정위기 이전 상황을 회복하는 시나리오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탈리아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극한 상황에서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던진 말 한 마디가 먼 훗날 제대로 평가받으면서 ‘지동설’이 확고해졌다. 이탈리아 사태로 유럽 위기가 끝이 보이질 않겠지만 그 속에서 움트고 있는 새로운 위기 극복의 싹을 경제주체들이 읽어야 나중에 좋은 결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한상춘 한국경제 객원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