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시안(西安)에서 기차를 타고 20시간 남짓, 오른쪽으로는 끝없는 황무지가, 왼쪽으로는 만년설을 머리에 인 높은 산들이 이어진다. 이글거리는 오후 2시의 태양 아래 누렇게 솟아오르는 회오리바람.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바람을 타고 온 황사들이 잦아들 무렵, 구원처럼 나타난 푸른 숲의 오아시스 도시, 둔황(敦煌)에 이르렀다.
우는 모래 산, 달 어금니 호수, 지상 최고의 일몰- Dunhuang
우는 모래 산, 달 어금니 호수, 지상 최고의 일몰- Dunhuang

실크로드의 작은 도시 둔황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모가오굴(莫高窟), 더 정확히는 그곳의 수많은 굴들 중 하나인 장경동(藏經洞)에서 발견된 수만 점의 고문서와 그림, 기타 유물들 덕분이다. 때는 바야흐로 제국주의 세력의 중국 침략이 한창이던 1900년. 당시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둔황의 석굴을 홀로 지키던 도사 왕위앤루(王圓 )는 16호 굴을 청소하다가 한쪽 벽에서 속이 빈 듯한 공명 소리를 듣는다.
모가오굴에는 600여 개의 동굴과 2400여 개의 불상, 여전히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벽화들이 남아 있다
모가오굴에는 600여 개의 동굴과 2400여 개의 불상, 여전히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벽화들이 남아 있다
이상히 여긴 그가 벽을 헐어보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옛날 그림과 문서들이 5만 점가량이나 켜켜이 쌓여 있었다. 수백 년 전 모가오굴을 지키던 불교도들이 몽골과 이슬람의 잦은 침략 때문에 중요한 보물들을 이곳에 숨겨두고 벽을 봉해버렸던 것이다.
동굴마다 문을 달고 자물쇠를 채워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있다.
동굴마다 문을 달고 자물쇠를 채워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중요한 유물들은 거의 대부분 침략자들의 손에 넘어갔는데 그중에는 전설처럼 이름만 전하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돼 있었다. 약탈의 선봉에 선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중국학자 마크 스타인이 왕위앤루에게 푼돈을 주고 약 7000여 점의 장경동 유물을 가져간 것이 시작이었다.
동굴 앞에는 생동감 있는 조각상들을 품고 있는 다양한 형식의 탑들이 여행자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동굴 앞에는 생동감 있는 조각상들을 품고 있는 다양한 형식의 탑들이 여행자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그 뒤를 이어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이 모가오굴을 샅샅이 훑어갔다. 처음에는 중요한 유물만 골라(?) 가져가던 침략자들이 나중에는 동굴 벽화를 통째로 뜯어가기도 했다(그렇게 일본이 실크로드에서 뜯어온 벽화의 일부가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 아직도 남아 있는 점 또한 씁쓸하다).
모가오굴 앞의 쌍둥이 탑
모가오굴 앞의 쌍둥이 탑
그래도 다행히, 모가오굴에는 아직도 오호 16국에서 북송까지 이어지는 600여 개의 동굴과 2400여 개의 불상, 여전히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벽화들이 남아 있다. 그중에는 당의 측천무후가 자신의 모습을 따서 만들었다는 높이 33m의 북대불이 가장 유명하지만,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237번 동굴 벽화에 등장하는, 깃털 모자(조우관)를 쓴 신라인이다.
마치 하늘을 날 듯 날렵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비천상
마치 하늘을 날 듯 날렵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비천상
행여나 벽화가 상할까 입구를 막아선 커다란 철문을 열고 들어간 동굴 내부에는 아무런 조명이 없었다. 그 대신 철문 열쇠를 가지고 있는 중국인 가이드가 손전등을 비추며 유창한 한국어로 설명을 해 준다. 지금부터 1천 수백 년 전인 당나라 시대.

인구가 100만을 헤아렸다는 수도 장안(長安)의 모습을 그린 듯한 벽화에는 신라인뿐 아니라 아랍에서 동남아까지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전통 복장을 하고 모여든 사람들이 보였다.

또 하나, 내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었다. 다양한 모습의 비천상(飛天像) 중 하나가 허리를 꼬고, 머리 뒤로 비파를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수십 년 전 서양의 록스타들이 그랬던 것처럼. 20세기 로커들이 그 옛날 둔황의 그림을 어디에선가 봤던 것일까. 아니면 음악에 접신(接神)한 연주자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자세를 보이는 것일까.



우는 모래 산에서 본 지상 최고의 일몰

모가오굴을 나와 명사산(鳴沙山)과 월아천(月牙泉)을 찾았다. ‘우는 모래 산’과 ‘달 어금니 호수’라. 대체 어떤 곳이기에 이렇듯 멋진 이름을 가졌을까, 혹 흔히 보이는 중국인 특유의 과장법이 다시 한 번 작동한 것은 아닐까 하는 궁금증을 품고 도착한 곳에는 이름만큼이나, 아니 이름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광이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화염산’. 중국 서부의 사막은 끝없이 이어지는 화염산을 만들어냈다. 이곳의 표면 온도는 영상 60도를 넘을 때도 있다.
멀리 보이는 ‘화염산’. 중국 서부의 사막은 끝없이 이어지는 화염산을 만들어냈다. 이곳의 표면 온도는 영상 60도를 넘을 때도 있다.
사실 명사산 자체는 그저 사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다란 모래언덕에 지나지 않았다. 서역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오는 사람들은 마지막 사막의 끄트머리인 명사산을 넘어 오아시스 도시인 둔황으로 들어갔을 터다. 그런데 명사산 아래에는 초승달을 닮은 호수인 월아천이 정말 거짓말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수백 번이라도 묻고도 남았을 법한, 손바닥만한 호수가 수천 년 동안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명사산은, 월아천과 만나면서 독특한 풍광을 자아낸다. 거기에 옛 사람들은 건물 몇 채를 인공으로 더해 풍광을 완성했다. 사방으로 보이는 것은 모래 산뿐인데, 달 어금니를 닮은 연못 주위로 작은 풀밭이 있고, 여행자들이 쉬어갈 수 있는 건물 몇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것은 작은 연못과 야자수로 상징되는 중동의 오아시스와는 다른, 중국식(?) 오아시스를 대표하는 풍경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하다.
‘우는 모래 산’에서 본 ‘달 어금니 호수’의 풍경. 모래바람 한번에 금방 사라질 듯한 자그마한 호수가 수천 년 그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사실이 놀랍다.
‘우는 모래 산’에서 본 ‘달 어금니 호수’의 풍경. 모래바람 한번에 금방 사라질 듯한 자그마한 호수가 수천 년 그대로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사실이 놀랍다.
이미 첨단 자본주의로 거듭난 중국인들은 명사산 입구에 출입문을 해 달아 비싼 입장료를 받고(사방이 트여 있는 화염산도 한쪽을 막아 입장료를 받던 중국인들이다!), 역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명사산 낙타투어와 모래썰매, 모터글라이더가 조금 어색하기는 하지만, 명사산과 월아천이 빚어내는 풍광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좀 더 아름다운 월아천을 보기 위해 명사산 꼭대기까지 걸어 올라갔다. 낙타를 타고 편안히 오를 수도 있었지만, 왠지 모래에 맨발이 푹푹 빠지면서 올라가고 싶었다. 다행히 능선을 타고 오르니 생각보다 수월했다. 그렇게 30분 정도 올랐을까. 드디어 명사산 정상에 이르렀다. 월아천 쪽으로는 누런 모래만 펼쳐지는데, 반대쪽으로는 푸른 숲이 널따란 오아시스 도시, 둔황이 보인다. 그 옛날 실크로드의 여행자들도 명사산 꼭대기에 올라 이런 광경을 보며 가슴 벅찬 감상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그렇게 사방을 둘러보며 앉아 있는데, 이윽고 땅거미가 어둑어둑 깔리기 시작했다. 낙타도 관광객도 모래썰매도 썰물처럼 빠져나간 시간, 마침내 사막의 일몰이 찾아온 것이다. 둔황에 도착하는 날 버스 안에서 보았던 일몰도 아름다웠지만, 명사산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특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둔황 기차역에서 시내까지 가는 버스에서 본 일몰. 처음부터 둔황의 일몰은 심상치 않은 빛을 띠고 있었다.
둔황 기차역에서 시내까지 가는 버스에서 본 일몰. 처음부터 둔황의 일몰은 심상치 않은 빛을 띠고 있었다.
지금까지 꽤 많은 곳들을 여행하면서 사막과 화산, 정글과 만년설에서 다양한 일몰을 보았지만, 명사산의 일몰만큼 아름답고 다양한 색깔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해가 진 직후부터 1시간가량, 사막의 하늘과 구름은 말 그대로 ‘색의 향연’이었다. 모가오굴 벽화의 다양한 색감이 여기서 나왔구나. 더불어 둔황에 석굴을 파고 벽화를 그리고 불상을 깎던 사람들의 신심(信心)도, 사막의 일몰에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는 모래 산, 달 어금니 호수, 지상 최고의 일몰- Dunhuang
Dunhuang 글·사진 구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