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삶은 열정이다. 그림 그리기가 쉽지 않다. 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을까. 누워서 떡 먹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살아 숨쉬기가 쉽다고 말한다면 정말 숨 막히는 다급함을 못 느껴서이겠지. 아프리카 평원의 제왕 사자도 생쥐 한 마리를 잡으려면 덩치 큰 가젤을 잡을 때처럼 온 힘을 다해서 잡듯, 아무리 쉬워 보이는 일도 알고 보면 쉬운 일은 없다. 쉬워 보일 뿐이다.

화가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붓을 들면 금방 세상을 모두 그릴 것 같지만 붓 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과 마음의 각오를 다져야 하는지. 잘 그려질 때는 하루에도 서너 장 그리지만 안 될 때는 하루, 이틀, 한 달, 석 달이 지나도 안 된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 선생 같은 대가도 지기의 부탁을 받은 <침계> ( 溪) 편액 글씨를 30년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완성했을 만큼 어려운 것이 예술이다.

예술가는 고독하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가난과 불안과 광기로 자신의 삶을 고독하게 만든다. 그래서 예술가는 영원히 삶의 아웃사이더다. 사람들은 그 소외되고 절박한 예술가의 아웃사이더적인 삶을 즐긴다. 그게 현실이다. 마치 투우장에 투우가 투우사의 칼에 찔려 비틀거리면서도 사력을 다해 투우사에게 돌진할 때처럼. 그때 관중들은 열광한다.

마지막 투우사의 붉은 깃발 아래 번쩍이는 칼로 투우의 심장을 어깨 죽지에서 깊숙이 내려 꽂아 거대한 덩치의 흥분한 투우가 대지에 넘어질 때, 마치 예술가가 마지막 투혼으로 자신의 열정을 불사르고 절필하는 그 순간, 사람들은 열광한다.

올레, 올레! 화가는 투우장의 투우다. 예술이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미련하게 자기 세계를 고집해야 하고, 예술가의 길이 고독하고 불행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99.999% 예술가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걸어가는 미련한 존재다. 역사상 스페인 투우에서 소가 투우사를 넘어트려 그 소가 승리하고 영광의 삶을 살다간 전설의 투우 이름을 들어 보았는가.

투우는 죽을 운명으로 투우장에 들어온다. 화가는 예술이라는 미명 하에 죽을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그 마지막 순교의 길 위에 섰을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를 예술가로 보기 시작하고 인정한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기억한다. 그가 예술가였다고.



<레드 큐브>
<레드 큐브>, 1968년, 빨강 페인트칠을 한 강철, 뉴욕 ⓒ최선호
<레드 큐브>, 1968년, 빨강 페인트칠을 한 강철, 뉴욕 ⓒ최선호
, 1968년, 빨강 페인트칠을 한 강철, 뉴욕 ⓒ최선호">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1904~88)는 예술가다. 조각, 건축, 조명, 공연 무대, 의상, 가구, 정원 등 그의 손길이 미치는 모든 곳이 다 그의 예술품이다. 뉴욕 맨해튼 월스트리트의 브로드웨이 140번지 마린 미들랜드 은행 앞에는 미국인 조각가 노구치의 거대한 사각 조형물 <레드 큐브>(Red Cube)가 있다.

두꺼운 강철판에 붉은색 페인트를 칠한 <레드 큐브>는 맨해튼 스카이라인의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가운데 어떤 것과도 어울릴 것 같지 않다. <레드 큐브>의 강렬한 대각선의 위태로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사각의 모서리로 지탱하는 큐브는 실은 정사각형이 아니라 약간 왜곡돼 있으며, 사각형 가운데 둥근 구멍이 있고, 그 안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금을 그어 반대편 하늘로 이어져 있다.

이 구멍을 통해 보면 하늘로 향한 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레드 큐브> 아래 뉴요커들의 바쁜 걸음들이 지나간다. 가까이서 보면 거대하고 위태로운 조형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맨해튼 빌딩 숲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이다. 회색 도시에 찍은 빨강 점처럼, 빨강 꽃 한 송이다. 예술가의 정신이 사물로 구체화해 빚어낸 걸작이다.
Isamu Noguchi수도승의 내면을 보는 듯한 만년의 이사무 노구치, 준 미키 사진
Isamu Noguchi수도승의 내면을 보는 듯한 만년의 이사무 노구치, 준 미키 사진
노구치는 1904년 로스앤젤레스(LA)에서 미국 유학 중이던 일본 근대 개화기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노구치 요네지로(野口 米次郞)와 미국 여류 작가이자 시인인 레오네 길모어(Leonie Gilmour)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다. 아버지 요네지로는 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서둘러 일본으로 귀국했다.

노구치가 세 살 때 길모어는 어린 노구치를 데리고 도쿄로 남편을 찾아가지만, 요네지로는 노구치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만나주지 않아 노구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다. 비정한 아버지는 1912년 결국 일본 여자와 결혼해 도쿄에 살면서 1947년 사망할 때까지 부자지간의 정을 단 한 번도 나누지 않았다.

노구치의 얼굴은 아버지의 풍모를 닮아 일본인 모습에 더 가까웠다. 유년 시절을 일본과 미국에서 보내며 스스로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졌던 그는 스스로를 “소속이 명확하지 않은 무리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비극은 가족사뿐 아니라 성장하면서 사회로부터 받은 냉대와 천시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다.

여덟 살에 입학한 지가사키의 일본 초등학교에서는 ‘미국 혼혈’로 놀림을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적국인으로 취급당해 수용소에 강제 수용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뿌리 없는 노구치, 국적 없는 신세, 아버지 없는 사생아였다. 이러한 불행했던 개인사는 그의 예술적 감성을 자극해 자신을 더욱 단련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에게는 어머니 길모어의 헌신적인 사랑이 있었다.
<광휘>(Brilliance), 1979년, 현무암, 185.4×73.6×63.5cm, 뉴욕 이사무 노구치 가든 뮤지엄
<광휘>(Brilliance), 1979년, 현무암, 185.4×73.6×63.5cm, 뉴욕 이사무 노구치 가든 뮤지엄
(Brilliance), 1979년, 현무암, 185.4×73.6×63.5cm, 뉴욕 이사무 노구치 가든 뮤지엄">
노구치와 브랑쿠시

노구치는 20세 되던 1924년 뉴욕 컬럼비아대 예비 의과과정에 입학했다. 하지만 아들의 예술적 재능을 감지한 어머니의 권유로 그는 맨해튼의 레오나르도다빈치 미술학교에 들어가 아카데믹한 드로잉과 초상화 누드 수업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조각적 재능을 발견하고 스스로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926년 뉴욕에서 열린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1876~1957)의 미니멀한 전시를 보고 큰 감동을 받는다. 노구치는 자기가 설 곳은 뉴욕이 아니라 파리라 생각하고 파리 유학을 결심, 드디어 1927년 구겐하임 재단의 장학금을 받고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파리에서 처음 만난 장 아르프와 호안미로의 초현실주의 미술과 피카소의 입체 조각에서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노구치에게 진정 큰 영향을 미친 예술가는 뉴욕에서부터 흠모했던 루마니아 태생 프랑스 조각가 브랑쿠시로 노구치가 브랑쿠시의 작업실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부터였다.

브랑쿠시는 성직자 같다. 플라톤과 11세기 티베트 성자 밀라레파와 노자에 심취했던 그의 모습은 덥수룩한 수염과 깊은 성찰의 눈동자, 적당히 마른 수도자적 체형 등 마치 성직자의 내면을 보는 듯하다. 노년의 노구치도 수도자의 눈빛이었다. 브랑쿠시의 수도자적 취향은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일본 선종의 승려처럼 선과 도를 닦고 심신수련을 연마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07년, 브랑쿠시는 당시 구상조각의 대가인 오귀스트 로댕의 작업실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의 재주와 사람됨을 눈여겨 본 로댕은 브랑쿠시에게 자신의 조수로 들어와 작업할 것을 제의한다. 하지만 브랑쿠시는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는 말을 새기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지금도 생각하면 당시 무명의 루마니아 시골 청년에게 주어진 행운 같은 기회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브랑쿠시는 “사실에 접근할수록 죽은 형체를 만들 뿐”이라는 그의 말처럼, 로댕의 조각은 재현의 재현에 불과한 무의미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과거의 재현에 머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재현된 사실 그 너머 대상의 본질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우물>, 1970년, 현무암, 높이 60cm, 뉴욕 이사무 노구치 가든 뮤지엄
<우물>, 1970년, 현무암, 높이 60cm, 뉴욕 이사무 노구치 가든 뮤지엄
, 1970년, 현무암, 높이 60cm, 뉴욕 이사무 노구치 가든 뮤지엄">이러한 브랑쿠시 조각 표현의 절제와 생략이 빚은 미니멀 아트의 원형은 노구치의 작품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브랑쿠시는 고대 로마로부터 미켈란젤로를 경유해 로댕으로 이어지는 이 오랜 구상조각의 전통과 결별하고 새로운 조각 개념을 제시한 혁명적인 조각가였다. 그는 모든 형태 너머의 원형, 현상 너머의 본질을 움켜쥐기를 꿈꾸었고, 그 꿈에 값하는 작품들을 빚어 낼 수 있는 열정과 재능이 있었다. 노구치에게 브랑쿠시는 천하의 스승이자 은인이었다.

노구치의 회고에 의하면 “브랑쿠시는 루마니아 출신으로 영어를 못 했고 자신은 미국인으로 불어를 못해서 서로 눈빛과 행동으로 대화를 했다”고 한다. 브랑쿠시는 조각용 끌을 어떻게 쥐어야 하고, 톱은 어떻게 사용하며 재료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일본 검도 용어에 ‘미도리 게이코(見取り 稽古)’라는 말이 있는데, 아무런 대화 없이 상대방의 수련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술을 전수받는 것을 의미한다.

브랑쿠시는 노구치에게 일종의 미도리 게이코를 행한 것이다. 이러한 ‘어깨 너머 배우기’ 혹은 ‘마당 일부터 시작해서 배우는 견습생의 눈썰미’는 노구치의 예술 세계를 이루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예술은 모방이다. 예술가에게 모방이란 창조와 같이 중요하다. 보고 배운다는 말이 허사가 아니듯, 노구치는 스승 브랑쿠시 조각을 열심히 보고 배웠다. 브랑쿠시의 영향은 그가 죽기 전까지 평생을 걸쳐 이어갔다. 노구치는 브랑쿠시라는 걸출한 예술가가 없었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자연의 관조

노구치의 조각에는 자연의 관조에서 정적의 공간으로 옮겨온 고요를 머금고 있다. 수도승이 도를 닦듯 자연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무릇 예술은 예술가의 정신을 담아낸 그릇이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의 취향에 맞추는 것은 디자이너의 실용이다. 자신의 생각을 자신만의 고집으로 세상과 사물과 정신과 타인과, 그리고 자신과 싸워 다치고 망가지고 상처받고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이다. 어머니의 산고로 새 생명이 태어나듯 예술은 예술가의 고뇌와 절망이 빚어낸 산물이다.
<활>(The Bow), 1970년, 대리석과 현무암, 137×43.8×78.7cm, 뉴욕 노이버거 미술관
<활>(The Bow), 1970년, 대리석과 현무암, 137×43.8×78.7cm, 뉴욕 노이버거 미술관
(The Bow), 1970년, 대리석과 현무암, 137×43.8×78.7cm, 뉴욕 노이버거 미술관">
노구치의 조각에는 형태가 주는 이미지는 없다. 작품에서 보이는 형태와 물성, 그리고 감각이 보는 이로 하여금 느끼는 심상이다. 뉴욕 이사무 노구치 가든뮤지엄에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일본관에 있는 것과 같은 노구치의 작품 <우물>이 있다. 자연 현무암의 상단과 측면 부분을 인공으로 절단하고 연마한 다음 상단 가운데를 우물처럼 깊게 공간을 파고 그 가운데에서 물이 솟아나게 했다.

물은 작품의 표면을 따라 넘쳐흘러 아래의 둥근 자갈로 스며든다. 인공으로 자갈 사이로 시냇가 여울물처럼 졸졸 흐르는 소리를 들려준다. 관객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작품을 지켜본다. 정적이 흐른다. 숨 막히는 고요한 경개 사이로 시냇물 소리가 들린다. 자연의 품속에 든 듯 관객과 작품이 하나가 된다. 노구치가 원했던 순간이다. 마치 일본 선종사찰에서 찻물 끓일 때 사용하는 다암(茶菴)의 샘물을 보는 듯 우리는 일본 속으로 빠진다.

서양인은 동양적이라 말하고 나는 일본적이라고 느낀다. 선적(禪的)인 경개, 사무라이의 칼 끝에서 빛나는 섬광 같은 찰나의 이미지가 스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노구치의 핏속에는 아버지의 나라 일본이 있다. 유년기 자신을 그토록 멸시하고 조롱했던 아픔의 나라였지만 그는 끝내 어머니보다 아버지의 핏속으로 자신의 영혼을 불살랐다.
일본 이사무 노구치 가든뮤지엄에 설치한 ‘아카리’ 종이 등(燈), 다카마츠
일본 이사무 노구치 가든뮤지엄에 설치한 ‘아카리’ 종이 등(燈), 다카마츠
1988년 세밑을 하루 앞둔 뉴욕에서 84세의 적지 않은 세월을 마감하기까지 맨해튼의 <레드 큐브>와 미국 연합통신사(AP) 빌딩의 부조작품, 파리 유네스코 광장, 하와이 경기장, 디트로이트의 시민광장 분수, 뉴욕 체이스 맨해튼 은행과 존 핸콕 빌딩의 조각정원, 마사 그레이엄, 머스 커닝햄 같은 무용가를 위한 무대 디자인, 일본 전통 오징어잡이 집어등에서 차용한 ‘아카리 등(燈)’으로 불리어지는 조명예술, 그리고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모에루마 공원(モエレ沼 公園) 등 그의 업적은 실로 다양하고 무궁하다.

노구치는 일본 다카마츠에 자신의 작업장을 미술관으로 꾸며 일반에게 공개하고 뉴욕 퀸스 롱아일랜드에 이사무 노구치 가든뮤지엄을 열어 자신의 조각 작품과 건축 모형, 그리고 사진을 영구 전시하고 있다. 그는 진정 불우한 역경을 극복하고 20세기 조각예술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진정한 예술가였다.


글 최선호(화가)
자연의 관조에서 정적의 공간으로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소장.
현재 전업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