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작가 김경민 & 권치규 부부

권치규 작가와 김경민 작가는 캠퍼스 커플로 맺어진 부부다. 성신여대 대학원 재학 중 서로에게 끌려 결혼에 골인한 두 사람은 한때 비닐하우스에서 살면서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세 아이를 키우면서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이름을 얻은 작가 부부를 만났다.

[Friends] “꾸준한 작업이 진정한 작가의 길”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서울 삼청동 선컨템포러리에서 김경민 작가의 개인전이 열렸다. 개인전을 통해 김 작가는 그녀 특유의 해학성과 섬세한 모델링, 드라마틱한 연출이 돋보이는 신작 13여 점을 선보였다.

난해함이 일반화된 현대미술에서 쉽고 재치 있는, 그리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그녀의 작품은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 그녀의 작업은 거창한 미학적 내용을 표방하는 대신, 미술사적 흐름과 시대의 변화에도 불변하는 인간의 기본적 윤리를 담음으로써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김 작가는 주변의 소소한 풍경과 인물을 작가적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해 이를 경쾌한 조각 작품으로 표현한다. 작가이자 동시에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생활의 주 무대인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모습에 그녀만의 풍부한 상상력을 덧씌워 입체적인 인물상으로 빚어냈다.

김 작가의 개인전이 있고 2개월 후 이번에는 남편 권치규 작가의 개인전 소식이 날아들었다. 아이 셋을 키우는 부부가 나란히 개인전을 연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개인전을 하루 앞둔 8월 말 인사동 선화랑을 찾았다.

인터뷰에 앞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선화랑을 찾았다. 전 1, 2층에 걸쳐 전시된 신작들은 작가 특유의 구상성과 구조적인 연출이 돋보였다. 작품은 신축력 있는 라텍스 고무판으로 주변의 오브제를 감싼 후 다시 후반 작업을 통해 탄생한 것들이었다. 권 작가는 사물의 실루엣과 주름을 통해 그만의 독특한 조각적 언어를 세상에 이야기하고 있었다.

1, 2층에 전시된 신작들을 둘러본 후 갤러리 대표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작가 부부가 갤러리에 도착했다. 나란히 갤러리에 들어선 작가 부부는 최근 다녀온 스페인 여행을 화제에 올렸다.
<Life-Desire> 연작, 2011년, F.R.P.
연작, 2011년, F.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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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와 함께 떠난 10일간의 스페인 여행

권치규 작가(이하 권 작가) 결혼하고 처음으로 해외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10일 정도 스페인에 머무르며 여행을 했어요. 물론 아이들도 데려갔죠. 아이가 셋인데 12세, 11세, 7세예요.

김경민 작가(이하 김 작가) 안달루시아에서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주로 스페인 남부를 다녔어요. 제 개인전을 오픈하고 2주 지나서 떠났다가 개인전이 끝나기 전에 돌아왔어요. 다녀와서 남편 개인전을 열고요. 스페인은 순전히 가우디 건축을 보고 싶은 제 욕심에 떠나게 됐어요. 제안도 제가 먼저 했고요. 둘이서 가기에는 아이들한테 좀 미안해서 다같이 가기로 한 거예요.

권 작가 이번 여행은 저희에게 여러 의미가 있었어요. 지금까지 앞만 보고 너무 열심히 달려온 듯해서 한번쯤 쉼표를 찍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김 작가 이번 여행은 기대 이상이었어요. 앞으로도 온가족이 함께 하는 여행을 해보려고요. 요즘은 캠핑에 꽂혔어요. 여행을 통해 아이들에게 이 우주가 얼마나 넓고 그러면서 좁은지를 보여주고 싶어요. 그런 과정을 통해 아이들이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어떤 일인지 빨리 찾았으면 해요.

여행을 다녀와서 큰아이가 자기 꿈이 건축가로 바뀔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스페인에서 가우디를 봤던 그 짧았던 순간이, 아이에게 건축가의 꿈을 키워준 거죠. 그러면서 자기가 살 집을 그리고 20년 후 자신의 모습에 대해 일기를 썼더라고요. 큰아이는 아마 그림이든 설계든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아, 일기에 남편상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는데, 큰돈은 못 벌어도 필요한 만큼만 벌면 좋겠다고 아주 구체적으로 썼더라고요. 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그런 꿈을 안 가졌을 거잖아요.

권 작가 박물관에서 중세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볼 때는 별 말이 없더니 피카소 미술관에 가서는 “나도 이런 그림은 그릴 수 있겠다”고 하더군요. 최근에 제가 박사 학위를 받았거든요. 아무도 모르게 사과 그림을 그려서는 박사 학위 받은 선물이라고 주더군요. “왜 사과냐”고 물었더니 제 작품을 보고 그렸대요. 제 작품의 주제가 욕망이라 사과를 소재로 많이 사용했거든요. 참 기특했어요. 아마 아이 셋 중에 둘은 미술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신여대 대학원 1호 커플
[Friends] “꾸준한 작업이 진정한 작가의 길”
김 작가 지금은 아이들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많이 나눠요. 물론 저희도 초기에는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고요.

권 작가 대학원 때 만나서 지금까지 함께 했으니까 꽤 많은 시간이 흘렀잖아요. 그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조율한 거죠. 작품이나 생활에서 각자가 추구하는 방향도 알고요.

그 범위 내에서 도와주고 조언해주는 거죠. 생활과 작업을 하다 보니 서로 상충하는 부분도 있지만 조율하는 거죠. 아내가 바쁠 때는 제가 아이들을 픽업하고 가사 일을 할 때도 있고요. 제가 바쁠 때는 아내가 아이들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거죠.

작업에서도 같은 분야이다 보니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번 개인전이 열일곱 번짼데요, 제 나이에 비해서는 적지 않은 횟수입니다. 집사람도 그 정도 전시를 했고요. 아마 서로 도울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거라고 봅니다.

김 작가 처음 만나 연애하고 결혼했을 때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많이 도와줬어요. 지금은 서로 스케줄이 바빠서 예전보다 못한 게 사실이에요. 작업할 때도 초기에 방향이 맞는지 정도는 의논하지만 그 이상은 어려워요. 어떤 이야기를 하면 싫어하는지, 어떤 때 삐치는지 아니까 피하는 거죠.(웃음) 이번 개인전을 앞두고도 순조롭게 준비하기 위해 밥해주고 작업실 청소하고, 전체 일정을 매니저처럼 봐주는 정도만 했어요.

그 대신에 전시 일정은 서로 고려해서 잡아요. 한 사람 끝나야 다른 사람이 하는 식이죠. 개인전 임박해서 예민할 때는 서로 피해요.(웃음) 가시 돋친 얘기를 해도 그때는 그냥 넘어가요. 똑같이 겪는 일이니까 이해가 되는 거죠.

권 작가 연애할 때부터 그게 몸에 익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가 성신여대 대학원 조소과에서 만났거든요. 그게 1996년입니다. 성신여대 대학원 커플 1호가 저흽니다. 처음에는 다른 원생들 몰래 만났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작업하니까 굳이 드러낼 필요도 없었고요. 학교에서 1년, 졸업하고 1년 총 2년을 만나고 결혼했습니다.

김 작가 남편이 다섯 살 연상이라 대학원 졸업할 때쯤엔 이미 결혼할 나이가 됐거든요.

권 작가 젊은 대학원생들이 다들 그렇듯이 그 시절에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면서 작업을 했습니다. 선배들 도와주고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재료를 살 때였으니까요.

김 작가 예술 하면 굶어죽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한 집에 한 사람도 아닌 둘이 예술을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아마 대학에서 만났다면 둘 중 한 사람은 미술을 그만뒀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진로를 정하고 대학원에서 만났으니까 그럴 일이 없었어요.

더구나 당시는 이미 저는 MBC한국구상조각대전 대상을, 남편은 대한민국예술대전 우수상을 받은 후였거든요. 두 사람 모두 작가로서 한참 작업에 매진할 때니까 다른 길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편은 예고며 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밤 10시, 11시에 돌아와서 작업을 했어요. 저도 아이들 가르치면서 작업을 했고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작업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던 거예요. 결혼할 때 양쪽 부모님이 작업하라고 조그마한 땅을 사주셨거든요. 나중에 돈을 좀 벌어서 그 위에 집을 짓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비닐하우스에서 시작한 신혼생활
<Life-Desire>, 2011년, F.R.P.
, 2011년, F.R.P.
, 2011년, F.R.P.">권 작가 조각가들은 작업의 특성상 떠돌면서 작업하는 게 어렵습니다. 그걸 아신 부모님들이 한 곳에 정착해서 작업하라고 뜻을 모아주신 거죠.

그 대신 다른 건 돈이 안 들었어요. 결혼식장도 무료로 쓸 수 있는 곳에서 했고, 혼수도 안 했거든요. 신혼 때는 작업실 옆에 있는 농사용 창고에 세 들어 살았습니다. 둘째를 낳을 때까지 거기서 살았어요.

김 작가 신혼 때는 기름 살 돈이 없어서 나무를 떼고 산 적도 있어요. 직접 나무를 하러 가기도 했어요. 그러다 2001년 저희 땅에 집을 지었어요.

권 작가 원래 농사용 창고는 임대를 할 수가 없거든요. 구청에서 단속을 나오기도 했는데, 다행히 주인아저씨가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산다고 배려를 많이 해주셨습니다. 단속에 비닐하우스를 지어주셨거든요. 선배를 도와서 군산 개항 100주년 탑 작업을 하던 때였는데, 탑이 굉장히 높잖아요. 비닐하우스 높이가 그에 못 미치는 겁니다. 천장을 높일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땅을 파서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땅의 냉기가 굉장했어요. 냉기가 올라와서 짚단으로 살림방을 두르기도 했으니까요.

김 작가 그때는 힘든지 몰랐어요. 주변 작가들이 다들 그렇게 살았거든요. 그래도 그런 시기를 잘 보내고 집을 지었으니까요.

권 작가 1998년 첫 개인전을 준비하는데 난로를 안고 있어도 등이 시렸어요. 기름값이 너무 비싸서 나무를 땠을 때는 연기로 작품이 노랗게 변색된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둘째 낳은 직후에 집이 완공돼서 산후조리는 새 집에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집사람도 저도 고생했다는 생각이 별로 없어요.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어려웠지만 동네에 살던 조각가들과 우리 집에 자주 모여 파티도 했고요.

김 작가 그런 분들이 옆에 계셔서 힘든지 몰랐던 건지도 모르죠.

권 작가 그런데 신기하게 둘째 아이의 친구가 우리가 살던 그 창고에 살더라고요. 필리핀 다문화 가정의 아이인데, 둘째가 그 집에 다녀와서 그 친구가 불쌍하다는 거예요. 얘기를 듣다 보니까 우리가 살던 바로 그 집이더라고요.
해학과 드라마틱한 연출이 돋보이는 김경민의 신작 <여행을 꿈꾸는 자>(사진 5), <쉿>(사진 6), <운전중>(사진 7)
해학과 드라마틱한 연출이 돋보이는 김경민의 신작 <여행을 꿈꾸는 자>(사진 5), <쉿>(사진 6), <운전중>(사진 7)
(사진 5), <쉿>(사진 6), <운전중>(사진 7)">
인생을 길게 보고 갈 수 있는 여유가 필요

권 작가 이사 후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선배들이 일을 주기도 하고 큰 조형물을 의뢰받기도 하고요. 그때부터 크게 힘든 게 없었어요. 우리는 아이들이 자기 먹을 것뿐 아니라 엄마, 아빠 먹을 것까지 갖고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김 작가 셋째를 낳고는 정말 좋은 일만 생겼어요.

권 작가 서른셋에 막내가 태어났는데, 그때 10억 원짜리 부천의 상징 조형물 공모에 당선됐거든요.

김 작가 저희는 둘 다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어요. 둘 다 넉넉하진 않지만 부족함 없이 컸고, 그래서인지 성격이 굉장히 낙천적이에요. 어려서부터 도심 한복판에 살았어요. 도시적이고 팝(pop)적인 제 작품의 분위기는 아마 거기서 비롯된 듯해요.

작업의 정서는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작업을 하기에는 일산 변두리처럼 조용한 곳이 좋아요. 사실 아이들 때문에 일산 신도시에 나가 산 적이 있어요. 그런데 1년 만에 다시 돌아왔어요. 신도시에서는 아이들 교육 경쟁이 너무 심했는데, 우리 아이는 그렇게 키우기가 싫었어요. 지금 학교는 전교생이 100여 명인 학교에서, 다문화 가정 등 다양한 아이들과 어울려 살아요.

권 작가 가끔 우리 작업을 돕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라는 게 정서적으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 작가 자라면서 남의 상처도 알고 어려움도 알아야죠. 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어려운 환경 정도는 겪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작업실에 있는 학생들이 “작업을 해서 돈 벌 수 있을까”, “재능이 있는가” 등의 질문을 해요. 제 생각은 그런 것보다 꾸준히 작업하는 게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 중에는 피카소처럼 스타 작가나 고갱과 고흐처럼 죽은 후에 뜨는 작가 등 다양한 작가가 있어요. 그 모든 작가의 공통점은 꾸준히 작업을 했다는 겁니다. 저희 부부의 가장 큰 장점도 지금까지 별 흔들림 없이 꾸준히 작업을 해왔다는 거예요.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이상 바람이 없어요.

권 작가 저도 마찬가집니다.(웃음)

김 작가 연예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게 평범한 사람의 삶에도 상승과 하락이 있잖아요. 연예인들은 그 기복이 더 심하잖아요. 사람들이 그런 걸 좀 이해하고 편안하게 봐줬으면 좋겠어요. 인생을 좀 길게 보고 갈 수 있는 여유들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희 부부도 어느 순간 아무도 저희 작품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더라도 무던하게 잘 견뎌서 작가로서 꾸준히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점이 저희 부부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글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