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신화’를 찾는 사람들
내 안의 보물을 찾는 진정한 연금술사
나는 파울로 코엘료가 쓴 <연금술사>를 무척 좋아한다. 아마 다섯 번쯤 읽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양치기 청년 산티아고가 소문으로만 들은 보물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겪는 여러 사건들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을 느끼는 이유는 주인공인 산티아고의 여정에서 만나는 집시 여인, 늙은 왕, 연금술사 등 수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은유적인 대화가 바로 나 자신의 살아가는 이야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산티아고처럼 나만의 보물을 찾고 싶어 한다. 책을 읽는 내내‘나만의 보물’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 읽었는데, 이 책의 맨 앞부분과 끝 부분에 그 답을 제시하고 있었던 것을 미련스럽게도 책을 세 번쯤 읽은 뒤에야 알게 됐다.

이 책의 서문에서 인용한 오스카 와일드의 짤막한 나르키소스 에피소드에 바로 그 해답이 들어 있었다. 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숲의 요정 오레이아스들이 호숫가에 왔고, 그들은 호수가 쓰디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숲의 요정이 말했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호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호수가 눈물을 흘린 것은 아름다운 모습의 나르키소스의 죽음이 아니라 나르키소스의 죽음으로 인해 나르키소스의 눈동자 속에 비친 ‘호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더 이상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자아의 신화’다. 우리 모두는 나르키소스가 그랬듯이 결국에는 남을 통해서 ‘자아만을’ 사랑하고 인생이란 바로 이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아! 무생물인 호수조차 자신만을 사랑하다니.


그리스 신화 속의 미다스와 중세의 연금술사

인간의 물질에 대한 욕망은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손으로 만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박한 인간의 소망을 표현한 것이 바로 그리스 신화 미다스 이야기다.

미다스는 디오니소스 신의 친구로서 숲의 신인 실레노스를 사로잡았으나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어서 디오니소스가 그 보답으로 소원을 하나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의 소원은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을 금으로 변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디오니소스는 그 소원을 들어주었고 음식마저 금으로 변하게 해 거의 굶어죽게 된 뒤에야 미다스는 잘못을 깨닫고 원상태로 돌려줄 것을 빌었다. 디오니소스는 그에게 팍톨루스 강(지금의 터키 사르디스 근처라고 함)에서 목욕하게 해서 벗어나도록 했으며 그 뒤 그 강에는 사금이 생기게 됐다는 전설이 있다.

오늘날에도 미다스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오로지 금, 돈만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믿고 추구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바로 오늘의 미다스다. 그러나 그들은 죽을 때가 다 돼서야 비로소 스스로의 행동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깨닫는다.

미다스의 신화에서 한 단계 더 진화한 것이 중세의 ‘연금술(鍊金術·alchemy)’이다. 연금술은 납이나 구리, 쇠 등 흔한 금속을 귀금속인 금으로 정련하려는 시도였다. 연금술사들은 몇백 년이나 실험을 거듭했으나 납을 금으로 바꾸지 못했다.

그 대신 파생적으로 화학, 금속학, 물리학, 약학 등에서 엄청난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연금술은 납을 금으로 만드는 물리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무지몽매한 인간을 단련시켜 고귀한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승화시킨다는 철학적 ‘은유’로 발전되기도 했다.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바로 이런 이야기를 우화 형식으로 들려주어 우리를 감동시킨다.


만물은 저마다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다

피라미드(피라미드는 이야기 속에서 산티아고가 찾아가는 보물을 찾을 수 있는 꿈의 장소다)에 도착하기 이틀 전에 연금술사에게 말하는 산티아고의 말은 우리의 꿈을 대신 말하고 있다.
“이제 곧 스승님과 헤어져야 하는 거라면, 제게 연금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연금술이라면 그대도 이미 알고 있네. 만물의 정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 만물의 정기가 우리 각자를 위해 예정해둔 보물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 걸세.”

“제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닙니다. 납을 금으로 바꾸는 기술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자 연금술사는 다시 사막의 침묵 속으로 들어간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연금술사의 결론은 이 책의 서문에서 이야기한 나르키소스의 자아의 신화를 다시 한 번 들려주는 것이었다. 연금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금만을 찾으려는 자들이 있었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 비밀을 찾아내지 못했어. 납과 구리, 쇠에도 역시 이루어야 할 자아의 신화가 있다는 걸 잊었던 걸세. 다른 사물의 자아의 신화를 방해하는 자는 그 자신의 신화를 결코 찾지 못하는 법이지.”

바로 이것이다. 납은 납대로 구리는 구리대로 쇠는 쇠대로 만물은 각자의 정기가 있어서 스스로 이루어야 할 신화가 있고, 그것을 누구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고유한 정기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발견하는 자신만의 피라미드

작가 코엘료는 책의 말미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연금술사는 세 부류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첫째는 연금술의 언어를 아예 이해하지 못한 채 흉내만 내는 사람들이고, 둘째는 이해는 하지만 가슴으로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에 좌절해 버리는 사람들이고, 셋째 사람은 연금술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삶 속에서 ‘철학자의 돌’을 발견해낸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셋째 부류의 연금술사를 설명하면서 덧붙인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성모 마리아께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수도원을 찾으셨다. 사제들이 길게 줄을 서서 성모께 경배를 드렸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시를 낭송했고, 어떤 이는 성서를 그림으로 옮겨 보여드렸다. 성인들의 이름을 외우는 사제도 있었다.

줄 맨 끝에 있던 사제는 볼 품 없는 사람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은 적이 없었다. 곡마단에서 일하던 아버지로부터 공을 가지고 노는 기술을 배운 게 고작이었다. 다른 사제들은 수도원의 인상을 흐려 놓을까 봐 그가 경배 드리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진심으로 아기 예수와 성모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고 싶어 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오렌지 몇 개를 꺼내더니 공중에 던지며 놀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그가 보여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재주였다. 아기 예수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으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성모께서는 그 사제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 볼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기 예수가 환하게 웃으며 기뻐한 사제의 ‘오렌지 던지기’ 재주처럼 내가 가진 소중한 ‘자아의 신화’는 무엇일까를 계속 생각해 보고 있다. 나중에 천천히 더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서둘러 쓴다.

전진문 영남대 경영학부 겸임교수
일러스트·추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