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시작될 무렵이면 신은 와인 생산에 흉작을 주고,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평작을 주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풍작을 준다”는 말이 있다. 프랑스 농부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와인과 전쟁에 관한 이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완벽히 증명됐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됐다. 유럽을 포화 속으로 몰아넣은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5월 9일 독일의 항복이 정식 발효되면서 유럽에서는 끝을 맺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의 완전한 종식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전쟁이 종식된 날짜로 치는 것이 정확하지만 여기서는 와인과 관련된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이므로 유럽에서 전쟁이 종식된 5월 9일을 종전으로 보고 이야기를 전개하려고 한다.

[와인 재테크] 와인과 전쟁의 역사
흉작으로 시작해 최고 빈티지를 탄생시키며 끝난 제2차 세계대전

전쟁이 나던 1939년은 20세기 최악의 흉작이었다. 전쟁은 9월 1일 발발했는데 포도 수확기를 바로 앞둔 때였다. 그런데 이 해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에는 이른 눈이 내려 ‘방당주 수 라 네주(vendange sous la neige)’ 즉, 눈 위에서 수확을 해야 했다.

게다가 보르도에는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묽은 포도주를 만들어야 했고, 샹파뉴에는 젊은이들이 전쟁에 동원돼 포도원 농사 경험이 없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수확에 나서야 했다. 이들이 따온 포도 중 절반은 제대로 익지 않은 것이었다. 알자스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만든 와인의 평균 알코올 도수는 8.4도였다. 정상적인 와인의 알코올 도수보다 무려 4도나 모자랐다. 1939년 생산된 와인을 두고, 보르도 와인업자는 “와인이 아니라 개숫물”이라고 표현했고, 알자스의 농부는 “완전한 쓰레기”라고 표현했다.

이에 비해 1945년에는 20세기에 만들어진 와인 중에서 최고라는 극찬을 받았다. 전쟁이 시작되자 무통 로트칠드(Mouton Rothschild)의 주인은 독일군을 피해 포도원을 비워두고 도망을 가야 했다. 하지만 오랜 전쟁에 지친 인류에게 신은 전쟁의 종식과 함께 극상품의 와인을 선물했다. 완벽한 와인의 대명사인 1945년 무통 로트칠드는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부르는 것이 값이지만 몇 년 전에 국내의 모 수입업체에서 이 와인을 12병 수입해 국내에 보관하고 있다.

19세기까지 와인은 전쟁의 필수품이었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전쟁에 나서는 군인들에게 매일 2리터의 와인이 지급됐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할 때마다 거의 1병의 와인을 마신 셈이다. 전쟁에서 와인은 마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상처를 소독할 때도, 식수로 사용하기 힘든 물을 소독해 마실 때도 사용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와인을 지급하는 전통은 기원전 6세기경으로 올라간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은 병사들에게 세균 감염과 질병에 대한 해독제와 예방약으로 와인을 마시라고 했다. 로마의 시저도, 프랑스의 나폴레옹도 같은 생각에서 필수 병참 품목으로 와인을 준비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쟁에서 진 것은 병참로 확보에 실패해 샴페인 대신 벨기에산 맥주를 마시며 싸웠기 때문이라는 속설도 있다.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알려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참호에서 공포와 외로움, 추위를 달래준 것이 바로 와인이었다. 이때 참호 속의 군인들에게 지급된 것은 ‘뱅쇼(Vin Chaud)’라는 뜨거운 와인이었다. 독일에서 ‘글루 바인(Gluh Wein)’이라고 불리는 이 뜨거운 와인은 요즘도 유럽의 겨울 거리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기 음료다. 특히 스키장에서의 인기가 대단하다. 20세기 들어 안전한 물과 소독약 등이 와인을 대신할 때까지 와인은 전쟁의 필수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 제3제국의 병사들은 아돌프 히틀러를 위해 프랑스 최상품 와인을 대거 약탈, ‘독수리 둥지’의 지하 저장실에 보관했다. 베르크호프라 불린 히틀러의 별장은 거대한 궁전 같은 요새로 만들어졌고, 약탈된 수많은 예술품들이 이곳에 보관됐다. 이곳에서도 1000m나 더 높은 곳에 건설한 ‘독수리 둥지’는 산 밑 바위 속에 설치돼 있는 엘리베이터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거의 아무도 가본 사람이 없고 누구의 방문도 허락되지 않았다. 히틀러 자신도 단 세 번밖에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도가 너무 높아 숨쉬기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수집한 최고의 와인들
로마네 콩티
로마네 콩티
사실 와인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히틀러의 보물창고에는 50만 병의 와인이 저장돼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5월 4일 미군부대와의 경쟁을 겨우 따돌린 프랑스군 탱크부대는 베르크호프가 있는 별장지대 베리히테스가덴에 도착했다.

부대원 중 베르나르 드 노낭쿠르 중사가 샹파뉴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출돼 오베르잘츠부르크 산꼭대기에 있는 ‘독수리 둥지’ 공략 책임을 맡았다.
로마네 콩티 포도원
로마네 콩티 포도원
천신만고 끝에 ‘독수리 둥지’ 앞에 도착한 프랑스 병사들은 철문을 열기 위해 곡괭이와 쇠망치를 휘둘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에는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기로 했다. 폭발의 충격으로 산봉우리가 흔들리고, 바위와 파편들이 산사태를 일으켰다. 연기와 먼지가 가라앉은 다음 프랑스 육군의 노낭쿠르 중사가 열린 철문 틈새로 들어가 저장실에 들어 있는 와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샤토 라피트 로트칠드(Chateau Lafitte-Rothschild), 샤토 무통 로트칠드(Ch. Mouton Rothschild), 샤토 라투르(Ch. Latour), 샤토 디켐(Ch. d’Yquem), 로마네 콩티(Romanee-Conti) 등 극상품 와인으로만 50만 병이 나무상자에 담기거나 선반 위에 놓인 채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샤토 라피트 로트칠드
샤토 라피트 로트칠드
한쪽에는 포트와인과 코냑도 있었는데 대부분 19세기에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노낭쿠르의 눈길을 끈 것은 바로 1928년 빈티지의 살롱 샴페인이었다.

그 샴페인은 전쟁 전에 노낭쿠르가 일하던 와인 회사에 독일 병사들이 들이닥쳐 약탈해갔던 바로 그 샴페인이었다. 1940년대 히틀러가 수집한 와인 리스트는 21세기 초에 운영되고 있는 와인 펀드의 투자 리스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와인 재테크] 와인과 전쟁의 역사
히틀러는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자 트럭을 차출해 베르크호프에 소장돼 있는 수많은 예술품들과 ‘독수리 둥지’에 보관돼 있는 와인을 베를린으로 실어오려고 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휘하에 있는 장군들은 예술품과 와인 대신 독일 병사들을 트럭에 태웠다. 결국 이 보물들은 독일 병사들을 대신해 프랑스에 남겨질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에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 장군이 마지막 순간에 배를 동원해 엄청난 중국 본토의 보물들을 빼돌려 대만에 세계 4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을 설립하게 한 것에 비하면 히틀러는 너무나 귀한 보물들을 놓친 셈인가.

김재현 하나은행 WM본부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