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et Management in Crisis

세계 경제에 대공황의 트라우마를 상기시켰던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세계 경제는 더블 딥의 우려 속에 여전히 벼랑 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의 재정위기는 유로존 붕괴의 우려까지 낳고 있다. 미국 또한 국가 신용등급 강등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말해주듯 경제 분야에서의 글로벌 리더십을 상실했다. 멀게는 1997년의 동아시아 외환위기부터 리먼 사태로 촉발된 2008년 금융위기, 그리고 최근 미국과 유럽에서 일고 있는 재정위기 등 세계 경제에는 위기 상황이 반복된다. 경제 환경을 둘러싼 변동성이 큰 요즘, 과거 경험을 통해 자산 관리의 지혜를 배워본다.
[Cover Story] 1997년 외환위기 시절의 교훈
외환위기를 무색하게 만든 우량 자산 1·2·3
[Cover Story] 1997년 외환위기 시절의 교훈
1997년 외환위기는 대한민국의 경제 지도를 바꾸었다고 할 만큼 한국 경제에 중요한 변환점이었다.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일반의 믿음을 비웃듯 대기업들이 하나둘씩 무너졌고, 환율은 급등했다.

주가는 바닥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폭락했으며, 금리는 20% 이상 치솟았다. 기존의 경제 상식으로는 내일을 예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격동의 상황에서 현명한 투자자들은 발 빠른 자산 관리를 통해 톡톡히 재미를 봤다.

현금을 보유한 자산가들은 높은 금리를 활용해 부를 축적하거나 부동산 등 가격이 급격히 떨어진 자산을 매입해 재산을 늘렸다. 당시 현명한 투자자들이 톡톡히 재미를 본 주요 투자처 세 가지를 되돌아본다.


첫째, 묻지마 채권(비실명 만기 채권)

얼마 전 비자금 의혹으로 수사를 받은 태광그룹의 경우 일명 ‘묻지마 채권’으로 수천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묻지마 채권은 외환위기 당시 지하에 잠들어 있던 음성 자금을 끌어내기 위해 1998년에 처음 등장했다.

이 채권은 금융 실명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발행된 비실명 장기 채권으로 1998년 증권금융채권(한국증권금융), 고용안정채권(근로복지공단), 중소기업구조조정채권(중소기업진흥공단) 등 세 종의 채권이 발행됐다.

외환위기 시점에서의 채권금리가 20%에 육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연 5.8%에서 7.5%의 금리를 지급하는 비실명 장기 채권이 부유층 고객에게 크게 인기를 끈 가장 주요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정부가 이 채권에 대한 금융 실명 확인, 자금 출처 조사 및 상속·증여세 등 세금을 면제시켜 줬기 때문이다.
[Cover Story] 1997년 외환위기 시절의 교훈
비실명 장기 채권은 발행 시 실명 확인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채권 소지인에 대해서도 자금 출처를 조사하지 않고, 이를 과세자료로 해 해당 채권 취득 전에 성립한 어떤 세금도 부과하지 않는 금융실명거래법상 인정되는 특정 채권이다. 여기에서 채권 소지인이라 함은 특정 채권을 보유하고 있는 자와 특정 채권의 발행기관 또는 금융기관으로부터 만기 상환 사실을 실명으로 확인받아 만기 상환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2004년 국정감사에서 문성호 열린우리당 의원은 “3조8734억 원 규모로 발행된 묻지마 채권의 경우 2003년 말 만기가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2004년 7월 기준으로 6139억 원에 달하는 미상환액이 발생했고, 미상환된 묻지마 채권으로 20여억 원씩 증여가 이뤄질 경우 1500억~1800억 원에 이르는 세수 탈루가 예상된다”고 주장했다. 문 의원은 이 채권으로 인한 직전 5년 동안의 세수 탈루액은 최소 2838억에서 최대 1조 원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부유층에 있어 10%의 추가 수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최대 50%에 이르는 증여세 및 상속세에 대한 부담일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본 채권의 활용은 그야말로 최고의 수익성 상품(?)이었다.


Case Study
비실명 무기명 채권을 자산 이전 수단으로 이용한 사례

부유층 고객의 경우 당장 눈에 보이는 수익만 추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K 씨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비실명 무기명 채권을 10억 원씩 매입해 3명의 손자들에게 물려주었다. 일반적인 과정을 통했다면 증여액이 30억 원 이상이기 때문에 50%의 증여세를 내야 하고, 자식이 아닌 손자에게 물려주면서 발생하는 세대 생략 세금 30%를 추가로 내야 한다.

하지만 비실명 무기명 채권을 활용함으로써 모두 절약할 수 있었다. 액수로는 약 5억8500만 원의 증여세를 절세한 것이다. 여기에 당시 금리 연 7%를 감안하면 K 씨의 경우 각각의 손자들에게 원금 10억 원에 해당 기간의 이자까지 증여세 없이 물려준 셈이 된다.

외환위기 당시 20% 이상이었던 고금리 예금이나 일반 채권에 투자했을 때와 비교해도 훨씬 좋은 투자처였던 셈이다. 이처럼 부자들은 일반인보다 돈의 흐름을 확실히 꿰뚫는 통찰력을 지녔다. 당장의 이익만을 추구해서는 좋은 투자처를 발굴하기가 쉽지 않다. 항상 당장의 현안보다는 자신이 처한 모든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한 투자다.


둘째, IMF 불패신화의 주인공 ‘부동산’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주로 언급되는 요소가 바로 인구와 관련한 부분이다. 특히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부동산 가격 폭등과 관련해 베이비부머의 영향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베이비부머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이 속칭 ‘58년 개띠’라고 불리는 세대다. 오죽하면 지나가다 부딪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바로 ‘58년 개띠’라고 하는 농담이 있을까.

우리나라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1956~65년 연간 평균 105만 명씩 총 1000만 명이 넘는 인원을 이루고 있다. 1000만 명이나 되는 집단이 동조화 현상을 보이면서 자산 시장을 왜곡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부동산 전문가들이 언급하는 ‘부동산 10년 주기설’도 베이비부머 세대의 영향 중 하나라 언급할 수 있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처음으로 주택을 구입한 평균 연령은 30대 중반이었다. 베이비부머의 출발점인 1956년생이 30대 중반이 되는 시점은 1990년대 초반이다. 1000만 명이나 되는 집단이 한꺼번에 주택을 구입함에 따라 주택 수요가 증가하게 되면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30대 중반의 가구가 처음으로 주택을 구입할 경우 소형 주택에 대한 수요가 높을 것이라는 점에서 1990년대 초반에는 소형 주택 수요의 폭발 시기로 볼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은 1980년대 3저 현상(저금리·저유가·저달러)에 의한 수출 증대 및 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위한 정부의 경기부양책 시행 등으로 인해 시중에 유동성 자금이 매우 풍부한 시기였다.

이러한 유동성 자금이 베이비부머의 소형 주택 수요와 맞물리면서 1990년대 초반 부동산 가격의 급등을 초래하게 된다. 당시 이러한 가격 급등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노태우 정부가 시행한 정책이 바로 ‘1기 신도시’ 건설을 통한 200만 가구 건설이었다. 실제로 1기 신도시 건설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주택 가격은 안정세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0년대 초반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40대 초·중반으로 접어드는 시기로 주택 확장에 대한 수요가 충만한 시기였다. 문제는 이러한 수요에 대응하는 공급이 이 시기에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이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수많은 건설사들이 도산하면서 2000년대 초반까지 시장에서 주택에 대한 공급 물량은 급격히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더불어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김대중 정부가 시행한 부동산에 대한 규제 철폐 정책이 부동산 가격 급등세에 기름을 부어 넣은 효과를 발휘한다.

당시 대한민국 부동산의 중심지라고 일컬어지는 강남 지역의 재건축 아파트는 3~4배가 넘는 가격 상승폭을 시현하면서 전국이 부동산 열풍에 휩싸이게 된다. 이러한 가격 급등을 막기 위해 노무현 정부는 1가구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 제도 시행 등의 수요 억제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했으나 결국은 실패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Case Study
부동산 투자로 10년 만에 1500% 수익률 올린 L 씨의 교훈

외환위기 이후 2000년까지는 부동산 가격이 폭락해 현금 자산에 대한 선호도가 굉장히 높았다. 그런 상황에 부동산에 과감하게 투자해 재미를 본 투자자들이 적지 않다. L 씨가 대표적인 사례. L 씨는 2000년에 현금 6억 원을 가지고 용산에 땅을 보러 다녔다. 당시 분위기는 서로 자신의 땅을 사달라고 부탁하던 시기였기에 금싸라기 땅 용산에서도 목 좋은 도로변에 위치한 땅 약 495.9㎡(150평)를 10억 원에 매입할 수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 땅은 어떻게 됐을까. 용산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각광받는 곳이 됐다. 용산 개발로 인해 당시 매입했던 토지는 개발 지역에 포함돼 감정평가를 받고 있다. 2011년 현재 주변 시세가 평당 약 1억 원 이상임을 감안하면, L 씨가 보유한 땅의 평가액은 약 150억 원에 이른다.

대한민국 부동산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지만 이처럼 단기간에 가치가 상승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 L 씨의 사례를 보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시기가 투자자들에게는 가장 좋은 투자 시기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3년 전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던 당시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당시 골드만삭스에 투자함으로써 높은 수익을 얻은 것을 보면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투자는 가장 자신 있는 부분에, 모든 투자자가 좋다고 생각하는 자산 항목에, 그리고 여윳돈으로 장기적인 관점으로 투자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최근 버핏이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투자한 것을 보면 금융 상황이 굉장히 어려울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지난번 금융위기에 버핏이 주당 115달러에 매입한 골드만삭스의 주가가 한때 47달러까지 하락한 것을 감안하면 투자의 귀재 버핏도 최저점을 알기는 쉽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버핏은 47달러까지 하락했을 때도 기다릴 줄 알았다.

그만큼 자금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L 씨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여윳돈으로 자신이 잘 알고 꼭 필요한 땅을 매입했기에 일시적인 땅값 하락도 견딜 수 있었다.
[Cover Story] 1997년 외환위기 시절의 교훈
셋째, 확정금리 보험 상품의 활용 ‘장기투자의 마술’

외환위기 당시 20%에 육박하는 예금금리에 비해 10%대의 금리를 제시한 보험 상품의 경우 투자 메리트가 현저히 낮아 보이는 것은 일견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 경기가 회복세로 접어들면서 금리는 급격하게 낮아지는 모습을 보여 최근에는 4%대의 금리만 해도 감지덕지한 세상이 도래하게 됐다.

외환위기 때 K 생명보험사의 무배당 연금보험 상품의 경우 8.5% 확정금리를 제시하고 있었다. 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의 금리 17~19%에 비하면 매우 보잘 것 없는 수익률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보험사의 연금보험은 연금 개시 시점이 되기 전까지 장기간 운영되는 상품임을 감안해야 한다.

1998년 40세인 계약자가 10년을 납입한 후 65세에 연금 개시가 되는 무배당 연금보험에 가입했다고 가정할 경우 이 계약자는 8.5%대의 확정금리를 25년 동안 누리게 됨을 알 수 있다. 보험회사 측면에서는 역마진으로 인해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상품으로 인식될 수 있겠지만 확정금리 보험을 가입한 계약자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고수익 안정 상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투자 기간을 짧게 설정한 경우다. 외환위기 당시 보험차익에 대한 비과세 기간은 5년으로서 대부분의 상품이 5년 납입, 5년 만기의 저축성 상품으로 판매되는 모습을 보였다. 2003년이 돼 8.5%대의 확정금리를 수령하고 다시 유사한 상품으로 가입해 운영했던 수많은 계약자들은 5%대의 낮은 금리를 수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만약 위의 사례에서처럼 납입 기간은 단기로 하더라도 장기로 운영할 수 있는 연금형 상품에 가입해 연금 개시 시기를 최대한 늦췄더라면 8.5%대의 확정금리를 상당 기간 확보할 수 있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자산 운용에 있어 장기투자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서민들에 비해 복리의 마술은 장기투자에서만 제대로 발휘될 수 있음을 알았던 부유층 고객들은 더 쉽게 외환위기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Cover Story] 1997년 외환위기 시절의 교훈
Case Study
장기 확정금리 상품의 매력

외환위기가 한창일 때는 금융 회사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어려웠다. 보험 회사에 근무하는 자산관리사(FP)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영업이 어려웠다. 그때 보험사 FP들의 숨통을 열어준 게 확정금리 상품이었다.

평소 많은 보험에 가입했던 K 씨는 외환위기 당시 보험사에서 판매한 7년 만기 확정금리 상품에 가입해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당시 보험사 상품의 확정금리는 8.5%였다. 20%대를 웃돌던 은행권의 상품에 비해서는 금리가 무척 낮은 편이었다. 하지만 7년의 장기 상품이란 점이 나중에는 큰 투자 메리트로 작용했다. 결국 상품 만기가 돌아온 2003년 중반에는 큰 수익율을 얻을 수 있었다.


공동 기획 한경 MONEY·교보생명 노블리에 기획·정리 신규섭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