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DAQ_좀비 기업 ‘폭탄 돌리기’

상장사에 대한 회계감사와 상장폐지 요건이 강화되면서 이전 최대주주의 횡령혐의가 덮힌 상태로 계속 거래되는 ‘좀비 상장사’가 늘고 있다.

“내가 이 회사에서 150억 원을 횡령했는데 어떻게 덮어 줄 겁니까?”

모 상장사 대표인 박 모 회장은 최근 코스닥기업을 인수하기 위해 마땅한 회사를 알아보다 황당한 일을 당했다. 재무제표상으로는 건실해 보이는 회사가 인수·합병(M&A) 시장에 나와, 그 회사의 최대주주를 만났더니 회사를 인수하면 자신의 횡령을 어떻게 가려줄 수 있는지부터 묻는 것이었다.

박 회장은 “횡령을 덮어주는 대신 경영권 인도가격은 할인해주겠다고 하더라”며 “나는 손을 땠지만 똑같은 방식으로 곪아 가는 회사가 코스닥에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코스닥 시장에 이전 최대주주의 횡령혐의가 덮인 상태에서 계속 거래되는 ‘좀비 상장사’가 늘고 있다. 횡령으로 대부분의 자산이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은 상태에서 거래되다 갑자기 상장폐지를 맞는 등 애꿎은 소액주주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

상장사에 대한 회계감사와 상장폐지 요건이 강화되면서 상장폐지 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코스닥 시장의 다른 단면이다.

횡령한 쪽에서 오히려 협박

지난 4월 18일 상장폐지가 결정된 유니텍전자가 단적인 예다. 지난해 3월 최대주주가 교체된 이 회사는 전 최대주주의 횡령 사실을 올 2월에 공시했다. 담당 회계법인의 감사의견 거절 발표를 한 달 앞둔 때였다.

코스닥업계 관계자는 “인수 시점에 기업에 대한 면밀한 실사를 진행하는 등 횡령 사실을 1년간 몰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회계법인 감사로 상장폐지가 임박하자 뒤늦게 내용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 최대주주는 지난해부터 회사 지분을 처분해 소액주주들은 “현 최대주주까지 챙길 것은 다 챙긴 뒤 회사를 상장폐지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횡령 기업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상장폐지 실질심사제도의 도입으로 이 같은 ‘좀비 상장사’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코스닥 시장에서 한계기업 M&A로 유명한 정 모 씨는 “횡령 사실을 밝히면 회사가 상장폐지 되므로 인수하는 측에서도 섣불리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횡령한 전 최대주주는 횡령을 덮는 조건으로 싸게 경영권을 넘기고, 기업을 인수한 쪽에서는 횡령을 저지르거나 주가를 부양한 뒤 주식을 매각하는 방법으로 투자금을 회수한다.

정 씨는 “이 같은 ‘좀비 상장사’의 M&A는 연간 감사의견 제출이 마무리된 4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며 “회사를 인수한 쪽이 다음 감사의견 제출 전까지 6개월에서 1년의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Market Issue] 상장폐지 실질심사 시대의 신종 코스닥 횡령 수법
현금 360억 원 네이쳐글로벌 거덜 낸 ‘횡령 거래’

새로 경영권을 인수한 쪽은 주가 부양을 위해 갖가지 호재를 발표하게 되는 만큼 투자자들은 이중으로 손해를 입게 된다. 코스닥 시장에서는 올해 1월 상장폐지 된 네이쳐글로벌이 전형적인 사례로 지목된다.

전 최대주주가 리조트 투자를 명목으로 수백억 원의 회사 돈을 횡령한 뒤 지난해 4월 경영권을 물려받은 박 모 씨는 바로 주가 띄우기에 나섰다. 풀무원 경영진과의 친인척 관계를 부각시킨 박 씨는 풀무원에 납품할 예정이라며 각종 식재료 생산 계획을 발표한 것이다. 박 씨는 이 과정에서 13억 원 규모의 전환사채(CB)를 편취하고 56억 원어치의 타 법인 주식도 임의로 처분해 횡령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2009년 말 재무제표에서 360억 원에 이르렀던 네이쳐글로벌의 현금성 자산은 두 명의 최대주주를 통해 대부분 증발했다. 작년 8월 반기보고서에서 감사의견 거절을 낸 담당 회계법인은 회사 소유의 현금 266억 원과 다른 상장사 주식 56억 원어치를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박 씨는 횡령 사실 발생을 묻는 한국거래소(KRX)의 조회공시에 해외 장기 출장을 이유로 세 차례나 답변을 회피하며 피해 다녔다. 소액주주들은 “실제로는 오래전에 상장폐지 됐어야 할 회사의 횡령이 묻히면서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었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2008년까지 증시에서는 매출 기준 미달 등 재무제표상의 문제와 시가총액 수준 등을 들어 기업을 상장폐지시켰으나 2009년 2월부터 코스닥에 상장폐지 실질심사제가 도입되면서 횡령 기업에 대한 퇴출이 강화됐다. 상장폐지 실질심사제는 올 4월부터 유가증권 시장에서도 시행되고 있어 제도가 보완되지 않으면 ‘좀비 상장사’는 더욱 늘 것으로 우려된다.

횡령 덮고 빠져나가는 교묘한 방법

횡령꾼들의 손을 거치는 동안 껍데기만 남은 회사가 상장폐지 되면 투자자들은 투자금액을 전부 날리게 된다. 하지만 정작 횡령꾼들은 돈만 챙기고 빠져나가는 경우도 많다. 제도상의 허점을 교묘하게 이용하기 때문이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수법은 ‘고의 상장폐지’다. 회계감사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지 않는 수법으로 일부러 감사의견 거절을 받은 뒤 회사를 상장폐지시키는 방법이다. 지난 4월 12일 상장폐지 된 포휴먼은 담당 회계법인에 재무제표를 비롯한 회계자료 일체를 제공하지 않았다. 증권가에서는 “경영진이 횡령 사실을 숨기기 위해 회사 장부를 불태웠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횡령 이후 상장폐지까지를 전문적으로 책임지는 ‘설거지꾼’도 등장한다. 최대주주로부터 수수료를 받고 소액주주들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회사가 상장폐지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이들의 일이다.

지난해 11월 상장폐지 된 A사는 설거지꾼이 5월부터 들어와 활동했다. 최대주주가 횡령을 하고 빠져나간 자리에 들어와 기존 이사진을 내쫓고, 소액주주들의 주주총회 개최 요구는 조직폭력배를 동원해 틀어막았다.

회사를 제3자에게 넘기기도 한다. 지난해 12월 루티즈를 통해 우회상장을 한 금성테크는 증시 입성 3개월이 채 못돼 거래가 정지됐다. 회사의 재무 상태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전 최대주주와 이전 최대주주의 횡령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코스닥업계 관계자는 “횡령을 덮기가 여의치 않으면 자본시장의 어두운 기업가에게 회사를 넘긴 뒤 도주할 시간을 벌기도 한다”고 말했다.

횡령꾼에 대한 미약한 당국의 처벌 의지는 횡령을 부채질한다. 검찰은 지난해 코스닥에서 상장폐지 된 20개 회사에 대해 추가 수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지만 대부분 지지부진한 상태다.

바지사장 역할을 맡은 강 모 씨가 해외로 도주한 아구스 등 해당 회사들의 대표가 잠적해 수사가 중단됐기 때문이다. 조성재 아구스 소액주주 대표는 “‘바지’가 사라졌다는 이유로 횡령을 주도한 ‘몸통’에 대한 수사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한번에 수백억 원을 챙기는 것에 비해 횡령에 대한 처벌은 허술해 ‘횡령을 안 하면 바보’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노경목 한국경제 증권부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