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가 김춘옥 & 권상능 조선화랑 대표

동양화가 김춘옥의 작품은 전통을 버리지 않으면서 현대적인 방법론을 잘 소화해낸다. ‘촉각적 회화’라 불리는 그의 작품은 화선지를 여러 겹 배접하고 그 위에 채색을 한다. 전망이 좋아 10년 전 터를 잡은 경기도 김포 작업실에 권상능 조선화랑 대표가 격려차 찾았다.

작업실로 쓰는 김포의 한 아파트에 들어서자 김 작가는 거실로 기자를 안내했다. 거실 창 밖으로 아파트 공사에 동원된 중장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김 작가는 창문 밖 공사현장을 가리키며 원래는 김포평야의 일부였다고 했다. 처음 이사 왔을 때만 해도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 벼가 들판을 가득 채우고, 겨울이면 철새 떼가 군무를 펼쳤다고 아쉬운 듯 말했다.
“갤러리스트 그림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갤러리스트들도 미술계의 일원으로 한국 미술의 발전에 대한 일종의 소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갤러리스트 그림으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갤러리스트들도 미술계의 일원으로 한국 미술의 발전에 대한 일종의 소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김 작가가 작업을 바꾼 것도 김포로 작업실을 옮긴 후다. 이전 성내 작업실 시절에는 수묵화를 고집했다. 그의 수묵화에는 추상적 기운과 구상적 연상이 동시에 담겼다는 평을 받았다. 추상과 구상은 흔히 대립되는 양식이지만 그의 화면에선 그러한 대립적 기운이 서로 침투되고 용해돼 추상과 구상의 느낌을 동시에 주었다.

현재의 화선지 작업은 이곳으로 이사를 오며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한지를 여러 겹 덧댄 후 종이에 채색을 하고 뜯거나 찢기를 반복한다. 한 장 한 장 뜯거나 찢을 때 나타나는 색감의 미묘한 차이와 은은하게 드러나는 바탕색의 느낌은 ‘유현(幽玄·Profundity)’의 미학에 근접해 있다.

유현이란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 빚어지는 관계성의 미적 범주이며 전체적인 조망을 필요로 하는 개념이다. 바뀐 그의 작품을 보고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작업 환경이 바뀌니까 작품도 변한다”며 찬사를 보냈다.
권 대표가 작업 중인 작품에 대해 김 작가에게 질문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적 오리지널리티를 중시하는 권 대표는 동양화에 특히 관심이 많다.
권 대표가 작업 중인 작품에 대해 김 작가에게 질문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적 오리지널리티를 중시하는 권 대표는 동양화에 특히 관심이 많다.
작가와 화상이자 중학교 선후배로 맺은 인연

그 같은 찬사 이면에는 김 작가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을 터다. 화선지를 찢거나 밀어서 뜯는 고정이 보통 고역이 아니다. 그는 오랜 작업 탓에 손금이 없어졌다고 했다.

작업실과 보관된 그림을 본 후 김 작가는 부엌으로 기자를 이끌었다. 그가 손수 끓인 커피를 내오고 1시간여가 흘렀을까. 대중교통을 이용해 김포로 오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며 권상능 조선화랑 대표가 작업실로 들어섰다.

권상능(이하 권): 늦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김 선생 인터뷰에 동참하게 돼 영광입니다.

김춘옥(이하 김): 먼 곳까지 와주셔서 제가 더 고맙습니다. 권 회장(권 대표는 한국화랑협회 회장을 세 차례나 역임했다. 그 때문에 화단에서는 그를 회장님이라고 부른다)님은 저를 아껴주시는 화상이기도 하지만 제 중학교 선배이시기도 합니다.

권: 1998년 조선화랑 기획전 때 처음 만났으니까 인연을 맺은 게 15년이 다 돼 가네요. 그때는 김 선생이 수묵화를 할 때였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작품이 좋았어요.

김: 그때가 IMF 직후였어요. 경기가 안 좋던 때라 전시회를 앞두고 걱정이 많았어요. 회장님께 괜찮으시겠느냐고 여쭸더니 화랑을 하면서 좋았던 때는 거의 없었다며 계획대로 하자고 하셨어요.

권: 그때 서울과 대구에서 동시에 전시를 했어요. 서울에서는 조선화랑, 대구에서는 송아당화랑에서 했죠. 김 선생 고향이 대구예요. 고향에서 전시회를 갖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죠. 대구 전시를 기획할 때부터 김 선생이 모교인 경북여고에 100호짜리 그림 한 점을 기증할 뜻을 비쳤어요. 전시를 마치고 기증식을 하는데 전교생이 모여서 “언니,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었어요. 여러 모로 뜻 깊은 전시였죠.

김: 제게도 의미 있는 전시였어요. 경기가 어려울 때라 송아당화랑에서 자신 없어 했을 거예요. 회장님이 나서서 대관을 하고 전시회를 열었어요.
[Friends] 뜻 그림인 동양화의 새로운 발견
40년 화상으로 산 권 대표의 작품관

권: 그게 인연이 돼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죠.

김: 2002년 개인전이 처음이었어요. 김포로 이사 온 후 새로운 작품으로 연 첫 전시였어요. 이전과 다른 작업이라 걱정도 많았는데 다행히 오광수 선생님 같은 분이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평해주셨죠.

권: 오광수 선생 자신이 동양화를 하던 분이라 동양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죠. 그런 분의 좋은 평 하나가 작가들에게 큰 힘이 되죠. 개인적으로는 김 선생이 예전 수묵 작업도 병행했으면 좋겠어요. 다양한 형태로 작업하는 게 좋을 듯해요.

김: 10년 넘게 이 작업을 하니까 이제야 익숙해진 듯해요. 처음에는 저도 많이 어색했어요.

권: 저도 그랬습니다. 차츰 눈에 익다 보니까 한지만의 독특한 느낌이 새롭고, 그걸 또 회화적으로 표현하니까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어요. 작가 김춘옥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로 자리 잡은 거죠.
[Friends] 뜻 그림인 동양화의 새로운 발견
김: 회장님 평이 정확할 거예요. 40년 넘게 화랑을 하시면서 얼마나 많은 작품을 보셨겠어요.

권: 화랑을 오래 했지만 김 선생처럼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온 작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김 선생이 조선화랑을 대표하는 작가인 셈이죠.

김: 저 말고도 유명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셨잖아요.

권: 지금 인기 있는 젊은 작가들은 그리 많지 않죠. 제가 조선화랑을 연 게 1971년입니다. 1970년 문을 연 현대화랑(지금의 갤러리현대) 다음이 조선화랑입니다. 올해로 만 40년이 됐네요.

김: 한국화랑협회 창립에 권 회장님의 공이 컸다고 들었어요. 또 협회 3대와 9대, 11대 회장을 맡으면서 한국 미술시장이 기초를 다지는 데 많은 기여를 하셨죠.

권: 미술계에 발을 들이면서 저는 한국적 오리지널리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세계시장에서도 그게 통한다고 봤거든요. 처음 화랑을 하던 1970년대만 해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작가들도 프로정신이 부족했고요. 화랑협회를 만든 것도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981년 국제교류전을 연 것도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기획한 것이죠. 서울전 답례로 1983년에 프랑스 피에르가르댕 화랑에서 한불협회작가 15명의 초대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한국 미술계가 풀어야 할 현안
[Friends] 뜻 그림인 동양화의 새로운 발견
김: 요즘 갤러리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런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을 듯한데요.

권: 그림을 가지고 돈을 벌려고 접근하면 안 됩니다. 갤러리가 그림을 거래하기도 하지만 다른 역할도 분명히 있거든요. 그걸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1980년대만 해도 외국 나가기가 좀 어려웠습니까. 외국 전시를 가려면 비행기만 20시간 이상을 탔습니다. 길바닥에 돈을 뿌리고 다녔죠. 지금처럼 기업의 스폰서를 기대할 수도 없던 때였습니다.

김: 최근에 미술계의 좋지 않은 면들이 많이 부각돼서 큰일입니다. 가뜩이나 미술시장이 좋지 않은데요.

권: 결국은 미술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작가들도 문제는 있습니다. 외국 작가들에 비해 한국 작가들은 프로정신이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랑스만 하더라도 작가들의 작업량이 어마어마합니다. 여기에 비하면 한국 작가들은 다른 데 에너지를 너무 쏟는 듯해요.

김: 대학에서 강의하는 걸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사실 작업에만 매진하고 싶을 때가 많아요.

권: 김 선생은 그래도 교수직을 맡지는 않았잖아요. 전업미술가협회 이사장도 오래 하셨고요. 문제는 작가들이 교수 자리에 너무 연연한다는 점입니다. 대학교수는 교육자지 작가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교수가 돼야 주목을 받고 그림 값도 오르는 게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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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도 통하는 한국적 오리지널리티

김: 어려움도 있지만 화랑을 하면서 보람을 느낀 적도 많으시잖아요.

권: 제가 후원한 화가가 성장했을 때 보람을 느끼죠. 제 경우에는 작가 육근병이 그랬습니다. 1992년 독일 카셀도큐먼트에 초대를 됐는데 작가가 돈이 없는 겁니다. 1억 정도 비용이 드는데 저한테 도와달라더군요. 저도 어렵던 상황이라 다른 곳에서 후원할 사람을 알아봤는데 마땅치가 않습디다. 결국 제가 어떻게 구해서 보냈죠. 그 뒤 육근병 씨가 작가로서 입지를 다지게 됐죠.

김: 사실 저도 회장님의 도움을 받은 작가잖아요.

권: 김 선생 작품이 좋아서 그런 겁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저는 한국적 오리지널리티를 중시하는데, 김 선생 작품에는 그런 한국성이 담겨 있거든요. 외국인들도 그런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김: 2004년 개인전 때도 외국인이 제 그림을 사갔잖아요. 독일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였어요. 1년 뒤에 찾아와서 개인전 때 본 그림을 사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개인전을 연 조선화랑에 가서 사라고 했죠.

권: 맞아요.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독일 바이올리니스트였는데, 개인전 때 보고 1년 뒤에 찾아왔었죠. 현금을 들고 와서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한국적인 게 해외에서도 통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계기 중 하나입니다.
언젠가 지금의 작업이 힘에 부치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겠죠. 앞으로도 한국적 전통에 현대적 미감을 결합하는 노력은 계속 할 겁니다.
언젠가 지금의 작업이 힘에 부치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겠죠. 앞으로도 한국적 전통에 현대적 미감을 결합하는 노력은 계속 할 겁니다.
작가의 낭만, 그리고 미술인들의 소명의식

김: 그 그림 팔고 파티를 열었잖아요. 술이야 수시로 마시지만요.(웃음)

권: 작가들이 그런 낭만은 있어야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중국 전람회에 참가했을 땝니다. 베이징(北京) 아트페어 첫 해였어요. 전시회를 마치고 작가, 평론가, 화랑 대표들이 모여 새벽까지 놀았죠.

김: 그날 바람은 제가 잡았죠. 평론가들도 늦게까지 술을 마셨잖아요. 어떤 분은 흥에 취해 춤도 추시고요. 우리 유흥의 역사는 사실 오래 됩니다. 1998년 송아당화랑에서 기획전을 할 때 10일간 대구에 내려가 있었어요. 날마다 여고 동창생들이 와서 회장님과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서 놀았죠.

권: 작품이 잘 팔렸으니까요.(웃음) 그런 과정이 있었으니까 지금의 김 선생이 있는 겁니다. 김 선생도 벌써 60대 중반이고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잖아요. 하지만 제 생각은 노력에 비해 대접은 아직 부족하다고 봐요. 그럼에도 계속 작업하는 건 작가로서의 소명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40년 동안 화랑을 하면서 저도 그런 소명의식이 생기는 듯합니다.

김: 저도 언젠가 힘이 부치면 다른 작업을 하겠죠. 그때까지는 열심히 지금 하는 작업을 즐겨야죠. 한국적 전통에 현대적 미감을 결합하는 노력을 계속할 겁니다.

권: 맞습니다. 한국의 주체성이 뒷받침 돼야 한국 문화의 발전도 있는 것입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