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일단 부닥뜨려 볼 요량으로 21일 새벽 대구를 향해 출발했다. 기자가 공식 행사장인 대구텍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8시. 검은색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웅성거리며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2층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 들어서자 긴장감이 돌았다. 잠시 후 정문을 통해 검은색 긴 링컨 콘티넨탈이 모습을 드러냈다. 문이 열리고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백발의 버핏 회장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했다. 이때 시각이 8시 50분.
버핏 회장과의 만남이 시작됐다. 공식 스케줄대로라면 회사 앞에서 기념 촬영부터 시작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 갑자기 공장 견학부터 하겠단다. 순간 수행원들과 행사진행자가 뒤엉켜 여기저기서 불만스런 목소리가 터졌다. 수행원들과 사진기자들 간의 치열한 자리싸움이 벌어졌다. 더구나 공장 안은 보안을 이유로 기자들의 출입을 금했다. 그가 소유한 비즈니스와이어와 CNBC의 기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30여 분간의 공장 견학을 마친 버핏 회장은 기념 촬영을 위해 전동 카트를 타고 본관으로 이동했다. 행사 진행자가 사진 촬영을 위해 ‘파이팅’을 요청하자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힘차게 ‘파이팅’을 외쳤다.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기공식은 10시에 시작됐다. 모세 샤론(Moshe Sharon) 대구텍 사장의 인사말이 끝나고 버핏 회장이 단상에 올랐다. 미소를 지으며 오른 그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인사말을 시작했다.
손을 바지에 넣고 기자회견을 하고 악수를 했다가 입방아에 올랐던 스타인버그 미 국무부 부장관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 “대구텍은 계속 확장될 것이고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의 말에 환호와 박수가 이어졌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면서 몇 컷의 사진을 찍자 그의 시선은 가끔씩 카메라를 향했고 옆에 앉은 에이탄 베르트하이머 IMC(International Metalworking Companies) 회장과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연출하는 센스를 발휘해 주기도 했다.
시종일관 그의 표정은 진지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편안함을 유지했고 항상 미디어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0시 40분쯤 기공식을 마친 후 본관 마당에 마련된 핸드 프린팅 행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핸드 프린팅을 위해 버핏 회장이 윗도리를 벗었을 때 슈트 안쪽에 ‘MR. WARREN E. BUFFETT’이라는 이름과 ‘TRANDS’라는 제품 브랜드가 눈에 띄었다. 세계 3위의 부자가 입는 옷이니 수제 명품일 거라 짐작하고 취재를 해보니 뜻밖에 그 옷은 중국산 기성복이었다.
그는 2007년 중국 다롄(大連)을 방문했을 때 다양촹스(大楊創世)라는 회사에서 만든 트랜즈(TRANDS) 슈트를 처음 알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이후 갖고 있던 슈트를 다 버리고 트랜즈 슈트 9벌을 샀다”고 말했다.
또한 “나는 외모로 찬사를 받아본 지 오래됐는데 다양촹스 리 여사의 트랜즈를 입고부터는 늘 찬사를 듣는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그리고 자신의 파트너인 멍고와 빌게이츠에게 “옷가게를 열어 미국에서 트랜즈 슈트를 팔면 언젠가 부자가 될 것”이라는 농담도 했다. 이런 얘기들이 알려지면서 다양촹스 주가가 70% 이상 급등하기도 했다. 핸드 프린팅 행사 후 2층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에 버핏 회장이 에이탄 회장과 함께 들어섰다. 버핏 회장의 자리에는 어김없이 코카콜라가 놓여 있었다. 그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몇 차례 콜라를 마셨고, 아예 콜라 캔을 들고 말하기도 했다.
계산된 비즈니스 제스처였다. 그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고 다소 곤란한 질문에도 재치 있게 응대했다. “한국 몇몇 기업에 아직 투자하고 있다. 포스코도 그중 하나다.” “투자는 업종이 아니라 10년 후의 전망을 보고 결정한다.” 30분쯤 회견을 진행한 후 선물 증정식이 이어졌다. 대구텍이 준비한 선물은 한복이었다. 옥색 한복을 입은 버핏 회장은 “원더풀”을 외치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후 버핏 회장과 내빈들은 1층 오찬장으로 이동했다. 점심 메뉴는 역시 코카콜라와 맥도날드 햄버거였다.
11시 30분쯤 버핏 회장 일행이 오찬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수행원과 보안요원들에게 둘러싸인 버핏 회장 일행이 2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가는 사이 기자는 그들과 일행인 것처럼 행세하며 뒤쪽으로 바짝 따라붙었다. 덕분에 계단 입구에 있던 보안요원들의 출입제한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2층에 도착한 버핏 회장은 접견실로 들어갔다. 이때가 11시 51분. 복도에는 보안요원들과 관계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자라는 사실이 들통 나면 바로 쫓겨날 상황이었다.
관계자처럼 보이기 위해 주위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얘기를 건넸다. 얘기를 하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 접견실 문이 열리고 버핏 회장과 가장 근거리에 있던 에이탄 회장이 나오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거다 싶었다. 화장실에서 나오는 에이탄 회장을 붙잡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버핏 회장님께 드리고 싶은 책이 있다. 한국경제매거진에서 만든 버핏 회장님의 얼굴이 담긴 MONEY 라는 잡지다.” 가지고 간 두 권의 잡지를 보여 주니 그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관심을 보였다.
대답은 “That’s OK”. 가능하다면 잡지를 들고 사진을 찍을 수 있으면 더 좋겠다고 하자 에이탄 회장은 너무나 흔쾌히 잡지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조금 있다 나올 테니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으라”며 접견실로 들어갔다. 20여 분 뒤 에이탄 회장이 손짓으로 기자를 부르며 다가와 두 권 중에 어느 것을 들길 원하느냐고 물었다. 얼굴이 크게 나온 것이 좋겠다고 하자 그것을 위로 올려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버핏 회장 앞에 다가섰다.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던 버핏 회장에게 에이탄 회장이 MONEY를 건네며 함께 사진 찍기를 권했다. 순간 버핏 회장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손사래를 치면서 “No. Business”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에이탄 회장은 들고 있던 책을 몸 뒤쪽으로 급히 감추고는 기자에게 책 없이 그냥 사진만 찍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버핏 회장에게 다가서면서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러자 버핏 회장은 다시 웃음을 되찾으며 카메라 앞에 섰다. 짧은 순간 두 컷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주위에 있던 보안요원들이 기자에게 누구냐고 묻기 시작했고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급히 자리를 옮겼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에이탄 회장은 이스라엘 최고 부자이며 존경받는 가문 출신이다. 사람을 귀히 여기는 기업문화와 사회공헌에 대한 기업가 정신이 투철하다고 한다. IMC가 기업공개(IPO)를 통한 자금 조달을 배제하고 버핏 회장의 투자를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한다.
IPO를 통하면 기업문화가 손상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런 인연으로 맺어진 버핏 회장과 에이탄 회장은 친구나 가족과 같은 관계라고 한다. 그런 에이탄 회장의 부탁을 단호히 거절하게 한 것은 그의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였다. 자신이 MONEY 잡지의 홍보에 사용될 가능성을 우려한 순간적인 반응이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니 이번 방한 중 가까이서 접한 버핏 회장의 손짓 하나, 몸짓 하나, 말 한 마디는 모두 비즈니스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투자한 회사의 콜라와 햄버거를 고집하고 돌발 상황에서도 “No. Business”를 말하는 것. 그런 비즈니스 마인드가 그에게 투자의 귀재라는 칭호를 가져다준 것이다.
글·사진 이승재 기자 fotolees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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