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cel Duchamp

프랑스 예술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1887~1968)은 현대미술의 영역을 레디메이드(ready-made)로 확장시킨 시대의 풍운아다. 1917년 어느 날 뒤샹은 배관공들을 위한 물품 상점에서 변기를 하나 구입했다.

그는 ‘리처드 머트(R. Mutt)’란 이름으로 변기에 서명한 후 제목을 <샘>(Fountain)이라고 붙여 그해 뉴욕 독립미술가협회전에 출품했다.

이 전시는 누구든지 6달러만 내면 작품 두 점을 출품할 수 있었는데, 전시위원이기도 한 뒤샹은 전시기획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자 뉴욕의 공중화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성용 소변기를 출품한 것이다.

서명은 뉴욕의 세라믹 소변기 제조회사인 ‘모트 워크스(Mott Works)’의 이름을 슬쩍 변형해 차용한 것이다. <샘>은 전시되자마자 곧 철거돼 전시 기간 내내 전시장 칸막이 뒤에 쳐박혔다.

뒤샹의 의도대로 이 작품이 배척당하자 그는 심사위원들 앞으로 편지를 쓰고는 편지의 내용을 친구들과 함께 창간한 잡지 장님(The Blind Man) 제1호에 게재했다.
1963년 로스앤젤레스 패서디나 미술관 자신의 작품 <샘> 앞에 앉아 있는 마르셀 뒤샹. 줄리안 와서 촬영
1963년 로스앤젤레스 패서디나 미술관 자신의 작품 <샘> 앞에 앉아 있는 마르셀 뒤샹. 줄리안 와서 촬영
앞에 앉아 있는 마르셀 뒤샹. 줄리안 와서 촬영">
"분명히 어느 예술가라도 6달러를 내면 전람회에 참여할 수 있다. 머트 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아무런 의논도 없이 그의 작품이 사라졌다. 머트 씨의 <샘>이 배척당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의 의도는 적중했다. 전시위원들은 전시 배제에 대한 자신들의 결백을 알리려는 듯 그들이 발간하는 잡지에 혁신적이고 거의 고결해 보이기까지 하는 <샘>의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샘>, 1917·1964년, 레디메이드: 남성용 소변기, 36×48×61cm
<샘>, 1917·1964년, 레디메이드: 남성용 소변기, 36×48×61cm
, 1917·1964년, 레디메이드: 남성용 소변기, 36×48×61cm">“변기가 부도덕하지 않듯이 머트 씨의 작품 <샘>은 부도덕하지 않다. 배관수리 상점의 진열장에서 우리가 매일 보는 제품일 뿐이다. 머트 씨가 그것을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을 선택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이 실용적인 특성을 버리고 새로운 목적과 시각에 의해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생각으로 창조된 것이다.”

뒤샹은 예술이 예술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기성품, 즉 공장에서 생산된 레디메이드 제품도 예술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했다. <샘>은 전시 후 분실되고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훗날 뒤샹이 다시 서명한 복제품이다. 원작은 사라지고 아이디어만 작품으로 남은 것이다.
3. <자전거 바퀴>, 1913·1964년, 레디메이드: 자전거 바퀴(지름 64.8cm)를 등받이 없는 걸상에 고정, 뉴욕 현대미술관(MoMA). ⓒ최선호 2010/4. <회전하는 유리판>, 1920년, 120.6×184.1cm·99×14cm(유리판), 뉴헤이븐 예일대 미술관
3. <자전거 바퀴>, 1913·1964년, 레디메이드: 자전거 바퀴(지름 64.8cm)를 등받이 없는 걸상에 고정, 뉴욕 현대미술관(MoMA). ⓒ최선호 2010/4. <회전하는 유리판>, 1920년, 120.6×184.1cm·99×14cm(유리판), 뉴헤이븐 예일대 미술관
, 1913·1964년, 레디메이드: 자전거 바퀴(지름 64.8cm)를 등받이 없는 걸상에 고정, 뉴욕 현대미술관(MoMA). ⓒ최선호 2010/4. <회전하는 유리판>, 1920년, 120.6×184.1cm·99×14cm(유리판), 뉴헤이븐 예일대 미술관">
이것도 예술인가?

1913년, 뒤샹은 <자전거 바퀴>(Bicycle Wheel)라는 제목으로 기성품 탁자 위에 자전거 바퀴를 올려놓고 돌아가게 했다. 처음 대중에게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이것도 예술인가. 그것도 예술이다. ‘예술작품은 이래야 된다’라는 고정개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옮기는 ‘재현’ 행위를 전면 부정하고 ‘예술가가 예술이라고 말하는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반전통적인 사상은 미술에서 ‘레디메이드’라는 용어와 개념으로 정착됐다.

뒤샹의 <자전거 바퀴>가 함축한 것은 ‘예술은 더 이상 풍경이나 인물을 손으로 재현하는 테크닉이 아니다’라는 메시지였다. 예술은 예술가의 정신, 그에 따른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뒤샹은 예술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었고, 뒤샹의 미학은 물건이 넘쳐나는 대량생산 시대의 미학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뒤샹의 <회전하는 유리판>(정밀광학)은 키네틱아트의 선구다. 이 작품은 다섯 장의 채색된 유리판을 회전시키고 1m 떨어진 거리에서 보면 하나의 원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생각이 행위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개념미술이라면 오브제가 회화보다 새롭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 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뒤샹이 처음으로 만든 움직이는 기계다. 움직이는 무엇이 고정된 평면의 사물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던져준다.
5. <신선한 과부>, 1920년, 합판 위에 푸른색을 칠한 나무에 8개의 가죽, 독일 슈베린 국립박물관(Staatliches Museum, Schewin)/ 6. 만 레이, <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 1920년경, 흑백 사진, 필라델피아 미술관
5. <신선한 과부>, 1920년, 합판 위에 푸른색을 칠한 나무에 8개의 가죽, 독일 슈베린 국립박물관(Staatliches Museum, Schewin)/ 6. 만 레이, <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 1920년경, 흑백 사진, 필라델피아 미술관
, 1920년, 합판 위에 푸른색을 칠한 나무에 8개의 가죽, 독일 슈베린 국립박물관(Staatliches Museum, Schewin)/ 6. 만 레이, <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 1920년경, 흑백 사진, 필라델피아 미술관">
뒤샹은 타고난 망상가이자 호기심 덩어리였다. <신선한 과부>(Fresh Widow)는 작품 아래 ‘COPYRIGHT ROSE SELAVY 1920’이라고 적어 놓았는데, 뒤샹이 1920년 뉴욕에서 만들어낸 여성적 자아인 로즈 셀라비로 서명한 첫 작품이다. 작품은 제목과 걸맞지 않게 기성품처럼 보이는 문짝이다. 불투명한 유리창은 안팎에 아무것도 없다.

뒤샹의 작품에는 항상 남녀 양성의 느낌이 있다. 여기에도 보는 것과 보지 않는 것, 여인의 닫힌 개방성, 죽음의 퍼즐 같은 양면성이 느껴진다. 뒤샹은 로즈 셀라비라는 엉뚱한 이름으로 작품에 서명한 후 실제로 여자로 분장하고 타인의 행세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1960년대 팝아트의 절정기, 앤디 워홀이 사용했던 가발과 분장의 모델이기도 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만 레이가 찍은 <로즈 셀라비로 분장한 뒤샹>을 보면 고급 모피목도리에 비엔나풍의 장식적 문양이 들어간 모자와 화려한 반지, 여기에 화장을 한 그윽하고 깊은 표정과 여인의 손짓까지 뒤샹은 완벽한 여인으로 바뀌어 있다.

‘로즈’라는 이름은 유명한 유대인 동성애자 거트루드 스타인이 만든 장미 시단(詩壇)을 간접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셀라비란 ‘그것이 인생(C’est la vie)’에서 따온 말로, 뒤샹 자신이 ‘Pi Qu’habilla Rose Selavy(Picabia l’arrose c’est la via와 발음이 같음)’라 했던 것처럼, ‘에로스 그것은 인생’이나 ‘마셔! 삶을 즐겨라’ 같은 말의 유희는 뒤샹 작품의 기저를 이룬다.

뒤샹의 생각은 인생만큼 복잡했다. 로즈의 명함에는 “정밀광학 로즈 셀라비/ 뉴욕과 파리/ 구레나룻과 발차기의 완벽한 선”이라고 적혀 있다. 과연 뒤샹이었다. 1919년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인쇄된 엽서에 모나리자 얼굴에 연필로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넣고 제목을 으로 써 넣었다.

제목을 프랑스어로 읽으면 ‘Elle a Chaud au Cul(그녀의 엉덩이는 화끈하다)’와 같은 음이 된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그 작품을 보고 뒤샹이 환상의 실제를 창조한 것이라고 환호하며 반겼다.
7. 1919·1940년, 보완된 레디메이드: 모나리자 복제품에 연필, 19.9×12.4cm, 필라델피아 미술관 /8. <앙드레 브르통의 산토끼에 안전한 체리나무 묘목 커버 디자인>, 1946년, 레디메이드 책, 하우스튼, 메닐 컬렉션
7. 1919·1940년, 보완된 레디메이드: 모나리자 복제품에 연필, 19.9×12.4cm, 필라델피아 미술관 /8. <앙드레 브르통의 산토끼에 안전한 체리나무 묘목 커버 디자인>, 1946년, 레디메이드 책, 하우스튼, 메닐 컬렉션
, 1946년, 레디메이드 책, 하우스튼, 메닐 컬렉션">
예술가의 아이디어

뒤샹의 장난기 어린 작품은 요즈음 놀이공원이나 백화점 쇼윈도 앞에 얼굴만 비워놓고 서 있는 위인이나 배우의 사진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구멍 뚫린 얼굴에 각자의 얼굴을 들이밀고 사진을 찍으면 영락없이 얼굴은 나지만 몸은 그 사람이 된다. 이런 재미있는 아이디어의 발상이 뒤샹의 작품 <앙드레 브르통의 산토끼에 안전한 체리나무 묘목 커버 디자인>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뉴욕의 자유여신상 엽서에 전신사진 얼굴을 콜라주한 이 작품은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예술가는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왜 우리는 빵과는 상관없는 예술에 집착하는지를 잘 대변해 준다.
9. <현상수배, 현상금 2000달러>, 1923년, 수정한 레드메이드: 포스터 위에 포토콜라주, 49.5×35.5cm, 개인 소장 /10. <몬테카를로 채권>, 1924년, 채색 석판화 위에 레이가 찍은 마르셀 뒤샹의 사진으로 포토콜라주, 31.5×19.5cm, 20·30번, 개인 소장
9. <현상수배, 현상금 2000달러>, 1923년, 수정한 레드메이드: 포스터 위에 포토콜라주, 49.5×35.5cm, 개인 소장 /10. <몬테카를로 채권>, 1924년, 채색 석판화 위에 레이가 찍은 마르셀 뒤샹의 사진으로 포토콜라주, 31.5×19.5cm, 20·30번, 개인 소장
, 1923년, 수정한 레드메이드: 포스터 위에 포토콜라주, 49.5×35.5cm, 개인 소장 /10. <몬테카를로 채권>, 1924년, 채색 석판화 위에 레이가 찍은 마르셀 뒤샹의 사진으로 포토콜라주, 31.5×19.5cm, 20·30번, 개인 소장">
이러한 뒤샹의 코믹은 1923년에 제작한 <현상수배, 현상금 2000달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포스터 위에 포토콜라주한 이 작품은 현상금으로 지목된 범인을 바로 뒤샹 자신의 얼굴로 대체하고 있다.

엉뚱하고 기막힌 발상의 전환은 워홀의 <현상수배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워홀은 수없이 많은 작품과 아이디어를 뒤샹에게서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니 워홀의 명성은 뒤샹 없이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뒤샹은 워홀과의 교류에 대해 “최근에 코르디에 엑스트롬의 집에서…워홀은 카메라를 가지고 와 내게 포즈를 취해 달라고 부탁했어. 입을 꽉 다문 채 20분 동안 있으라는 거였지…”라고 회상한다.

‘그 선생에 그 제자’라고 워홀도 대단한 예술가였다. <몬테카를로 채권>은 채색 석판화 위에 레이가 찍은 뒤샹의 사진으로 포토콜라주한 작품이다. 뒤샹은 룰렛 게임을 위한 모임을 만들고는 게임자금에 쓰려고 한 장에 500프랑짜리 채권을 발행했다.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될 만한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한 것이다. 머리에 거품을 묻혀 상업과 과학을 주관하는 로마의 신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머리 모양을 한 뒤샹의 얼굴을 레이가 촬영해 채권에 인쇄했다. 예술가의 머릿속은 아이디어 창고다.
<회전부조 옵티컬 디스크> 부분, 1935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회전부조 옵티컬 디스크> 부분, 1935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부분, 1935년, 필라델피아 미술관">
예술가의 삶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예술이다. ‘나는 사람이다’는 ‘나는 예술가다’와 같은 말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느끼고 만지는 모든 것들은 예술적 감성을 자극한다.

예술가의 손으로 기성품을 전시하면 ‘고급 예술품’으로 당당히 자리하고, 일반인의 손에 들려진 기성품은 그냥 ‘실용품’일 뿐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세라믹 변기는 예술품이 되고, 무교동 낙지집의 찌그러지고 낡은 조개탕 냄비는 가난하고 고단한 세월의 미학이 묻어있는 알루미늄 ‘서민 식기’로 언젠가는 고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변기’는 뒤샹이라는 작가의 브랜드가 곧 정신적 가치와 직결돼 있다. 사람들은 예술가의 작품은 ‘나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무엇일까를 대중이 고민하는 사이에 ‘변기’는 진정한 예술작품이 된 것이다.

그에 반해 ‘조개탕 냄비’는 조개 국물로 넘쳐도 변형되지 않는 경제적 실용용기로 선택된, 아무도 그 고졸한 아름다움에 눈길을 주지 않는, 단지 냄비일 뿐이다. 결국 물건의 사용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예술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예술은 사기다”라고 말한 백남준의 말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예술가로서 살아오며 가장 만족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뒤샹은 “그림을 그린 것, 삶을 이해하는 요인으로 삶의 방식(modus vivendi)을 창조하기 위해 예술을 한 것, 살아 있는 동안 그림이나 조각 형태의 예술작품들을 창조하는 데 시간은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내 인생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라고 대답했다. 뒤샹에게 예술은 인생의 전부였다.

“어떤 천재나 위대한 화가 또는 위대한 예술가이건 작품 제작과 관련해 자신의 삶에서 손꼽을 수 있는 작품은 4점 또는 5점뿐이다. 나머지는 매일매일 빈틈을 채우는 것일 뿐이다. 나는 희소성, 즉 고급 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다.

예술가가 뭔가를 하면 그것은 언젠가 대중이나 관객이 개입하면서 알려지게 된다. 그 뒤에는 후세로 전해지고 이런 사실은 이것들이 양면에서 생산되기 때문이다. 한쪽은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고, 또 한쪽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다. 내게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 똑같이 중요하다.” 결국 예술은 고급을 알아보는 눈과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이루어진다.

“예술은 색을 칠하거나 구성할 수도 있지만 단지 선택만 할 수도 있다.” 뒤샹의 이 말은 혁명에 가까운 미학적 사고의 전환을 보여준다. 그는 작품 활동이 왕성했던 예술가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실험을 순차적으로 실시했던 과학자이자 기존 관념에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시했던 철학자였다.

뒤샹은 1887년 7월 28일, 프랑스 블랭빌 근교에서 중산층 가정의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평생 체스를 사랑하고, 화가 피카비아와 시인 아폴리네르, 사진가 만 레이와 교유하다가 1968년 10월 2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영원한 세상과 만난다. 뒤샹은 자신의 죽음도 타인의 눈으로 바라보듯 무심하게 묘비명을 적어놓았다.

‘게다가, 죽는 것은 언제나 타인들이다(D’ailleurs, c’est toujours les autres qui meurent).’ 레디메이드, 이것도 예술인가? 그것도 예술이다.
[최선호의 아트 오딧세이] 레디메이드, 이것도 예술인가?
최선호 111w11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