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화단의 외교관 박광진 화백 & 영화감독 김수용

서양화가 박광진 화백은 1935년에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한국 화단의 1세대와 2세대의 중간에 있는 박 화백은 작품뿐 아니라 다양한 대외 활동으로 유명하다. 1957년 목우회 창립 멤버로 참여한 이후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제조형예술가협회 수석부회장, 국무총리 정책자문위원 등 미술 정책과 경영에 깊이 관여했다.

작가로서도 일가를 이룬 박 화백이 오랜만에 충무로 나들이에 나섰다. 사범학교 선배이자 충무로 터줏대감인 원로 영화감독 김수용이 그를 맞았다. ‘ 한국 화단의 외교관’박 화백의 작품은 2000년을 전후로 큰 변화를 보였다.

이전 작품들은 주로 한국의 명산인 백두산과 한라산을 비롯해 초가집, 갈대 등 일반적인 자연을 소재로 했다면 2000년 이후에는 직선의 그래픽 띠가 가미된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했다. 평론가들은 이를 시적 사실주의라고 명명했다. 시처럼 군더더기를 뺀 그의 화풍은 감미로우면서 이데아에 대한 향수를 부른다.
[Friends] 캔버스와 스크린 두 거장들의 60년 우정
시적(詩的) 자연주의의 끝없는 진화

그의 작품은 제주도가 주요 배경이다. 1960년대 동료 작가와 제주도를 찾았다. 그 정취에 매료돼 지금도 일주일에 사나흘은 제주도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에게 전화를 넣었을 때도 그는 제주도에 있었다. 대담을 요청하자 상대를 찾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그는 원로 영화감독이자 사범학교 선배인 김수용 감독과 함께 나가겠노라고 연락해 왔다. 박 화백은 이어 김 감독이 문화계에서 알아주는 재담꾼이라 대담이 재밌을 거라고 부연했다.

박 화백은 예술원 회장을 지낸 선배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김 감독의 거처가 있는 충무로에서 보자고 했다. 약속 장소는 충무로의 한 카페. 원로작가 권옥연 화백의 충무로 작업실이 들어 있는 건물의 1층에 있는 카페로 권 화백의 자제가 운영하는 카페라고 했다. 약속 장소에 들어서자 먼저 도착한 박 화백과 김 감독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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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진 화백(이하 박): 회장님(박 화백은 예술원 회장을 지낸 김 감독을 회장님이라고 불렀다), 지난번에 전화 드렸더니 도쿄에서 받으셨잖아요. 얼마나 계시다 오신 거예요.

김수용 감독(이하 김): 한 일주일 있다 왔죠. 그나저나 오늘따라 박 선생 의상이 너무 튀는 것 같습니다.(웃음)

박: 사진 촬영을 한다기에 신경 좀 쓰고 나왔습니다.

김: 박 선생 그림 하고도 잘 어울리는 듯해요. 우리 집에 그림이 몇 점 있는데, 박 선생 그림도 한 점 있어요. 올해 그린 <파리의 봄>이라는 작품인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박: 회장님이 서울사범학교 선배시거든요. 회장님이 1회고 제가 6회 졸업생입니다. 사범학교 시절에 회장님이 미술부장을 하셨어요. 한국전쟁 통에 여러 일을 겪으신 다음 영화를 하셨지만 미술에 대한 조예가 남다르십니다.

김: 움직이는 그림이 영화잖아요. 영화를 하면 그림을 안 볼 수가 없어요. 예술원 회장하면서 화가들하고도 친분이 있고요. 이 집 주인인 권옥연 선생도 잘 알고, 그분 누드 작품도 한 점 있습니다.

박: 권 선생님의 누드 작품을 갖고 계십니까. 그게 흔치 않은 작품인데….

김: 정말 좋아요.

박: 권 선생님과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자주 뵈었죠. 2005년 파리 개인전 할 때도 권 선생님 내외가 찾아주셔서 무척 고마웠죠. 1999년 평양에 갈 때도 제가 모시고 갔고요.

원로작가 권옥연 화백의 예고 없는 출현

두 사람의 대화가 익어갈 무렵 예고도 없이 권 화백이 카페에 들어섰다. 오랜 지기들이 왔다는 소식에 1층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권 화백은 약속이 있어 나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고 했다.

김: 제 집이 여기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있어요. 여기 커피가 제 입에 맞고 분위기도 좋아서 하루에 한 번은 내려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계신 줄 알면서도 연락을 못 드리겠더라고요. 불편하실까 봐요.

권옥연 화백(이하 권): 요즘은 건강이 좋지 못해서 외출을 잘 안 해요. 오늘은 파리에서 친구가 온다고 해서 오랜만에 길을 나서는 겁니다.

박: 권 선생님이 제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이셨어요. 사범학교 출신 중에 작가들이 몇 분 계세요. 전회진이나 이숙자 같은 분들이죠. 제가 사범학교에 다닐 때 권 선생님이 잠깐 가르치신 적이 있어요.

권: 내가 그런 일을 오래는 못해요. 젊어서 점쟁이가 나는 누구 밑에 있으면 제 명에 못 산대. 그래서 관직에도 오래 못 있었나 봐요. 예전에 대학에서 교수 제의를 받은 적이 있어요. 교수들과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데, 그분들 손을 보니까 너무 고와요. 작가의 손이 없어. 노동을 모르는 손인 거지. 그 길로 안하겠다고 하고 나왔어요.

김: 우리나라에 밤하늘에 별만큼 많은 작가들이 있지만, 권 선생님은 그중에서도 샛별 같은 분입니다. 사모님도 연극무대 연출가로 유명하시잖아요. 권 선생님은 인격도 훌륭하시고 모든 걸 갖춘 분이세요.

권: 이이(김 감독)가 다 좋은데 결점이 하나 있어요. 상대를 너무 추켜세우는 거예요.(웃음)

김: 제가 지금까지 영화를 109편 만들었거든요. 떡도 많이 만들다 보면 잘 만들게 돼 있어요. 그림이라고 예외겠어요. 오래된 작가들의 작품은 확실히 깊이가 달라요.

박: 회장님이 그만한 안목이 있으시니까요.

김: 박 선생 그림도 권 선생님 작품에 못지않아요. 난 또 야비하니까.(웃음) 박 선생하고 있으면 박 선생 그림이 최고이고, 권 선생님하고 있으면 그 작품이 또 좋고요.

권: 아니 정말, 우리 박 선생 작품이 좋아요.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해요. 요즘도 제주도에서 작업하시죠.

박: 네. 제가 제주도를 그리게 된 게 1964년부터입니다. 박상옥 선생하고 우연히 제주도에 갔다 거기 빠져서 그 뒤로 제 작업시간 중 60~70%는 제주도에서 작업을 합니다. 자주 가다 보니까 공기도 좋고 물도 좋고요. 몇 해 전에는 주소도 제주도로 이전을 했습니다.

김: 몇 해 전 가을에 박 선생 보러 제주도를 갔어요. 한라산 기슭을 지나는데 풍경이 너무 익숙한 거예요. 기억을 더듬어보니까 제가 한국전쟁 때 빨치산하고 싸우던 바로 그 장소인 거라. 아무튼 그때 작업실 보고 박 선생의 그림을 다시 보게 됐어요. 그즈음에 박 선생 그림이 많이 변했거든요.

박: 그런 면이 있죠. 작업을 오래하다 보니까 변화가 온 거죠. 제가 화단에서 1세대와 2세대 중간 정도 됩니다. 연배 높으신 선배님들하고 가끔 연락을 하는데, 아직도 작업을 하세요. 그런 분들을 뵈면 배울 점이 많죠.

김: 어느 분야든 예술가는 다 자기의 길을 가게 돼 있어요. 권 선생 같은 분은 모든 분야에 다 통하는 분이죠. 미술, 연극, 영화까지.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죠.

권: 김 선생 결점이 또 나오네요. 결점이야, 결점.(웃음)

박: 그림을 그만큼 아니까 하시는 말씀인 거죠.

김: 그림도 좀 알지만 사실은 작가 분들을 더 많이 알죠. 예술원 회장으로 있을 때는 그 많은 작가들 이름과 학력까지 다 외웠으니까요.

권: 사생활 전공이었지.(웃음)

김: 두 분을 안 것도 한국전쟁 전후였으니까 알 만큼은 알죠. 그래도 두 분은 다 용서해 드릴 게요.(웃음)

웃음을 뒤로 하고 권 화백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약속 시간이 거의 됐다고 양해를 구했다. 김 감독이 셋이 기념으로 촬영을 하자고 했다. 감독이니까 본인이 연출을 하겠다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면서 김 감독은 자신이 “노 화백 두 명을 인터뷰 하는 것 같다”며 즐거워했다.

이어 김 감독은 “두 분 다 인상도 그렇고 말씀이 너무 부드럽지 않느냐”며 “인품이란 달리 있는 게 아니라 그런 데서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

10분간 사진 촬영이 이어지자 피곤한 듯 권 화백이 손사래를 치며 그만하자고 했다. 권 화백이 자리를 비운 후 다시 차가 나왔다. 자리가 정돈되자 박 화백은 ‘한국 화단의 외교관’답게 한국 화단의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Friends] 캔버스와 스크린 두 거장들의 60년 우정
박: 권 선생도 그렇지만 우리 화단의 1세대 분들 중에 대단한 작가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그런 분들의 작품을 어떻게 보관하느냐는 겁니다. 제가 3년 반 전에 제주도에 150점 정도 작품을 기증했어요.

지난해 수장고에 가봤더니 관리가 엉망인 거예요. 100호짜리 인물화는 수리를 해야 할 정도였어요. 수리가 필요한 작품이 그것 말고도 더 있었어요. 하물며 제 것도 그런데 1세대 작가 분들의 작품은 오죽하겠어요.

김: 그런 점이 없지 않죠. 그런데 그걸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듯해요.

박: 1세대 작가 분들 중에 다음 세대에 작품을 남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관리가 어려운 걸 눈으로 확인하니까요. 우리 화단의 가장 시급한 문제가 작품의 관리라고 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돈을 남기고, 작가는 작품을 남기는 겁니다. 그게 우리 식의 사회환원인데, 이게 잘 안돼요.

화단에 대한 박 화백의 끝없는 애정

김: 화단에 대한 박 선생의 애정은 우리가 잘 알죠. 그러니까 그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정치인들을 미술에 눈뜨게 해주려고 노력도 했잖아요. 박 선생이 유명 정치인들의 미술 선생이었던 건 모르시죠.

박: 예전 정치인들 중에 그림을 좋아한 분들이 많았어요. 제가 1950년대에 일반 대중을 위한 그림 운동을 좀 했습니다. 1965년 시작한 한국일요화가회도 그중 하나였어요. 거기에 몇몇 정치인들이 입회를 해서 그림을 배웠죠.

이후엔 문화예술진흥법을 만드는 데도 참여했고요. 그때 나온 게 건축비의 1%에 해당하는 미술작품을 건축물에 설치해야 한다는 거였는데, 제가 한국미협 이사장으로 있던 1991년 그걸 강제규정으로 만들었죠.

김: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서 2년 반 전에 예술원 회원이 되셨잖아요.

박: 아직도 우리가 부족한 면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4월에 영국 테이트모던갤러리를 갔었습니다. 예전에 발전소로 쓰던 건물을 어떻게 그렇게 바꿀 수 있는지, 정말 대단했어요. 어디 그뿐인가요. 파리 오르세미술관은 기차역을 개조해서 만든 거잖아요.

김: 그러자면 예술에 상업성이 들어가야 해요. 순수미술은 상업성이 담보되지 않으니까 오래가기가 어려운 거죠. 유럽하고 한국은 문화적인 토대가 달라요.

박: 지난해 말 남프랑스에 있는 샤갈미술관에 갔어요. 그중 한 방에 100~150호짜리 그림이 20장 가까이 걸려있었어요. 샤갈의 컬렉터인 사업가가 미술관에 기증한 거래요. 유럽에서는 그런 멋진 일이 일어나거든요. 외국의 이런 기부문화가 한국에도 빨리 정착돼야 할 겁니다.

김: 우리나라도 요즘은 샤갈이나 피카소전을 하면 주말에 관람객들이 줄을 서잖아요. 노력하면 우리도 달라지겠죠. 샤갈만 하더라도 200년 전 사람입니다. 나중에 박 화백이 그러지 말란 법 없잖아요.

인터뷰는 2시간여가 지나 끝이 났다. 아침부터 떠들었더니 출출하다며 김 감독이 30년 단골 족발집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 자리에서 박 화백은 다시 “1세대 작가들의 작품 보관이 걱정”이라고 했다. 한국 화단의 미래를 걱정하는 그의 진심이 전해졌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