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는 칠레와 함께 남미를 대표하는 와인 산지다. 풍요롭고 드넓은 대지를 자랑하는 자원 강국 아르헨티나는 백인이 많은 국가로 오랜 전통의 와인을 가진 나라다. 특히 아르헨티나 멘도사(Mendoza)는 오랜 와인 산지다. 이번 여행지는 칠레에서는 찾기 힘든 유서 깊은 와인의 전통을 간직한 멘도사 지방이다.
[와인투어] 와인의 전통이 살아 있는 아르헨티나 Mendoza로의 초대
멘도사에 가면 꼭 들러봐야 하는 곳이 루티니 양조장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오랜 전통의 와인 관련 제품들이 있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게 포도 짜개다. 18세기에 소가죽으로 틀을 짠 포도 짜개는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며 지난날의 와인 양조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가죽부대도 여럿 눈에 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와인을 담은 가죽 부대는 오랜 아르헨티나의 와인 문화를 대변한다. 라우라 카테나의 저서 <아르헨티나 와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멘도사에 사는 아흔의 한 노파는 유년 시절 그녀의 집에 물, 물과 와인 혼합주, 와인 이렇게 세 음료수만이 있었고, 몇 살이냐에 따라 와인의 양이 결정됐다.’
[와인투어] 와인의 전통이 살아 있는 아르헨티나 Mendoza로의 초대
아르헨티나 와인 특유의 농축미를 자랑하는 품종 말베크

멘도사가 아무리 사막에 세워진 도시라고 책에서 떠들어대도, 여행객들의 눈에 멘도사는 수풀이 울창한, 푸른 도시로만 보인다. 겨울 여행객이 아니라면 멘도사를 더 푸르게 느낄 것이다. 도시 외곽에 포진한 포도밭도 멘도사를 푸르고 활기차게 하는 데 한 몫을 톡톡히 한다.

하지만 이런 푸른 생명이 깃든 농장도 여섯 달만 물을 대지 않으면 나무들이 모두 말라 죽는다. 멘도사에서 나흘간 머물렀던 호텔 비야지오(www.hotelvillaggio.travel)의 욕조에는 마개가 없었다.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목욕보다는 그냥 샤워만 하라는 당부인 것이다.

포도밭마다 검은색 수관을 지면에 설치해 매일 정해진 시각에 관개를 하지 않으면 포도가 익지 않는다. 멘도사의 강수량은 겨울눈을 제외하면 거의 제로다. 연평균 약 200mm의 강수량은 대부분이 안데스의 혹독한 겨울에 내리는 눈 덕분이다. 그러니 포도밭에는 저장된 눈 녹은 물이 조금씩 뿌려진다. 아마도 멘도사는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와인 산지일 것이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와인 생산국이자 세계 6위 와인 소비국인 아르헨티나는 정작 와인 수출에서는 등수가 처진다. 워낙 아르헨티나 국민이 와인을 많이 마시기 때문이다. 와인을 만들어 수출하기에 바쁜 칠레와는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와인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르헨티나가 과연 세계 시장에서 탱고를 출 수 있을까. 어떤 품종에 아르헨티나의 혼이 담겨 있을까. 답은 말베크다. 보르도 출신 레드 품종 말베크는 아르헨티나에서 활짝 핀다. 고원의 멘도사에서 말베크의 세련미를 갈고 닦는 농부들의 노력으로 점차 아르헨티나 와인의 수준이 향상되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지방 이름과 주도의 이름이 같다. 멘도사 지방의 주도는 멘도사다. 멘도사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택시로 15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렌터카도 상관없다. 겨울에 멘도사를 찾는다면 황량한 흙을 깔고 매서운 한기가 부는 갈색 도시를 체험할 것이다.

안데스 산맥이 주는 한랭함으로 인해 이른 아침부터 가방을 챙기고 행선지로 나서는 와인여행자의 입가는 얼얼해진다. 도시가 해발 1000m 상공에 조성된 까닭에 강한 햇빛이 그런 대로 위안을 준다. 저습한 공기가 척박한 땅에 부딪혀 몸은 얼음 쪼개지듯 추위로 갈라지는 기분이 든다. 이럴 때 와인 시음 시간은 원기 회복의 시간이다.

거칠고 황량한 벌판, 그리고 물 부족으로 자연스럽게 저수확 되는 멘도사의 벌판에서 아르헨티나 와인의 70%가 생산된다. 한국 축구가 페루나 볼리비아에서 원정 경기를 하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경기장이 고원에 있어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햇빛은 또 얼마나 따갑던지. 고원에서 만드는 아르헨티나 와인은 특유의 농축미를 자랑한다. 특히 말베크에 이런 농축미가 강하다.

찬바람과 뜨거운 햇빛이라는 천혜의 환경에 해외 자본이 유입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와인 산지로서 아르헨티나의 매력은 아르헨티나인들보다 외국인들이 더 빨리 알아챘다. 아르헨티나에 진출한 외국 자본은 버는 대로 먹고 마시는 아르헨티나 국민을 보며 군침을 삼켰을지도 모른다.

로버트 몬다비의 아버지가 꿈을 따라 캘리포니아로 갔듯이, 카테나와 루티니는 멘도사로 왔다. 이 두 사람의 성공을 멘도사 양조업계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양조장 카테나 사파타는 현재 라우라 카테나가 대표를 맡고 있다. 그는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출신의 내과 의사로 가업을 이어받았다. 정기적으로 멘도사와 캘리포니아를 오가며 치료와 양조를 책임진다.

멘도사 와인 산업의 발전은 철도 덕을 많이 봤다. 1860년 기차역이 생겨 생테밀리옹과 포므롤에 와인 수출의 길이 열린 것처럼, 1882년 멘도사에도 철길이 뚫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르는 와인 수출로는 그때 마련됐다. 그 전에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칠레 산티아고로 수출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철도 덕분에 아르헨티나 전역으로, 그리고 전 세계로 팔려나가게 됐다.

아르헨티나 서단에 자리 잡은 멘도사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타국보다 먼 내국이다. 차를 운전하면 최소한 9시간은 ‘꼼짝 마라’다. 이런 불편한 세상에 철도는 멘도사에 혁명적인 변화였고, 이민자들은 철도 건설 이후의 밝은 미래를 믿고 멘도사로 이주한 것이다. 인구의 반이 사는 수도로의 철길은 멘도사인들에게 성공의 발판이 된 셈이다.
[와인투어] 와인의 전통이 살아 있는 아르헨티나 Mendoza로의 초대
바비큐와 스테이크의 나라

아르헨티나는 바비큐와 스테이크의 나라이기도 하다. 모든 가정에 철제 바비큐용 틀이 구비돼 있고, 식탁 위에서 구울 수 있는 바비큐 그릴도 있다. 주말에는 장작을 지펴 특별한 바비큐를 해 먹는다. 고기는 단연 소고기지만, 돼지고기, 염소고기도 즐기며, 내장이나 소시지도 절대 거르는 법이 없다.

아르헨티나 소고기의 참맛은 방목에서 비롯된다. 언덕의 긴 풀을 뜯어 먹는 소에게서는 고소한 땅의 맛이 난다고 하며 그런 맛을 최고로 친다. 고기를 씹어도 기름이 끼지 않는 담백한 맛이라야 제 맛이란다.

한 소고기 전문가는 사육되는 소고기는 못 쓴다고 했다. 금요일 퇴근 후부터 월요일 출근 전까지 들판이나 마당에서 굽고 마시고, 굽고 마시고 한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칠레에서 맛본 고기 요리는 거의 아르헨티나 바비큐 문화의 영향인 듯하다.

비야지오 호텔은 1분 거리에 파크 하얏트 호텔이 있어 교통도 좋은 편이다. 걸어서 독립기념 공원이나 산마르틴 공원에도 갈 수 있으며 수월하게 시내로 걸을 수 있어 좋다. 공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마침 8월 둘째 일요일이었는데, 그날이 어린이날이란다. 부모의 손을 잡고 공원 나들이를 하는 어린이들 손에는 우리 아이들처럼 선물이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멘도사에서 맛있는 식사를 원한다면 예약은 필수다. 솜씨 좋은 식당은 규모가 커서 여유가 있지만 그렇다고 예약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테이블에서나 바비큐 그릴에서 익는 소시지나 고기 냄새의 진동은 한결같다.

흥건한 스테이크 육즙을 말끔히 걷어내는 레드 와인 말베크도 식탁의 단골이다. 쇼핑으로는 소가죽제품을 추천한다. 품질이 좋고 값이 저렴하다. 카우보이 모자나 가방 혹은 스테이크용 칼 등도 인기가 많다.


[ 와이너리 탐방 ]

카테나 사파타의 와인들
카테나 사파타의 와인들
1. 카테나 사파타 www.catenawines.com

멘도사 아니 아르헨티나에서 최고 양조장으로 손꼽히는 카테나 사파타를 통해 우리는 오늘날 말베크 품종이 아주 향기로우며, 우아하고 유연한 질감이 있음을 알게 됐다.

라우라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경제학자였던 인생의 진로를 바꿔 탁월한 양조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와인을 세계 와인 지도에 올린 인물로 간주되며, 그의 가문을 통해 아르헨티나에도 와인의 왕조가 있음이 와인 세계에서 인정됐다.

2. 와인박물관 및 양조장 www.rutiniwines.com

시내에서 10분 운전하면 되므로 택시를 타도 별문제가 없다. 카테나 사파타처럼 내수용과 수출용 와인을 다 취급하는 대형 규모의 양조장이지만, 품질의 향상은 포도밭에서 온다는 사실을 직시해 경작에 열중한다.


Tip
레스토랑 추천

1.‘돈 마리오’ www.donmario.com.ar

멘도사 외곽에 들어선 미국식 쇼핑몰 팔마레스는 시내에서 택시를 타면 15분 정도 걸리며 택시비는 우리보다 훨씬 싸다. 시내에도 있는 돈 마리오 레스토랑의 팔마레스점에서 점심을 했다. 레스토랑에 들어선 시각은 오후 1시를 넘어섰다.

물론 더 일찍 찾았으나 손님들이 많아 이름을 적어놓고 한 30분 있다가 다시 왔다. 식당은 이미 만석이다. 줄잡아 300명은 될 듯. 멘도사에서도 통하는 이 속담, ‘금강산도 식후경’.

나는 닭고기를 추천받았다. 나무 장작으로 바비큐(Parrilla a la lena)된 닭이 특유의 고소한 맛을 내서 그만이라고 웨이터 아저씨가 대답했다. 나는 그저 그 크기만 정하면 된다. 한 마리로 할 거냐 아니면 반 마리, 그도 아니면 반의 반 마리.

이미 채소샐러드 접시 크기에 압도당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손가락은 반의 반을 가리켰다. 값은 대략 1만 원 정도. 숯불에서 구운 닭고기의 맛은 담백하면서도 고소했다. 특히 아르헨티나에 오면 옥수수를 맛봐야 한다. 입에서 스르르 녹는다.

음식의 수준은 칠레보다 낫다. 채소의 질도 높다. 싱싱하고 푸짐하다. 스테이크에서 나오는 고기의 육즙은 흥건하고 먹음직스럽다. 식당에 오면 깨닫는다. 아, 아르헨티나는 먹고 마시는 나라, 자원이 정말 풍부한 나라란 사실을. 그들의 금, 토, 일은 바베뉴와 말베크로 시작해서 말베크와 바비큐로 끝이 난다.
1 루티니 양조장 점심에 차려진 샐러드 접시들은 모두 싱싱한 채소들로 채워진다.2 돈 마리오 레스토랑의 채소샐러드는 세 명이 나눠도 될 정도로 푸짐하다.
1 루티니 양조장 점심에 차려진 샐러드 접시들은 모두 싱싱한 채소들로 채워진다.2 돈 마리오 레스토랑의 채소샐러드는 세 명이 나눠도 될 정도로 푸짐하다.
2. ‘라 마르치자나’ www.marchigiana.com.ar

레스토랑 돈 마리오의 경우처럼 멘도사 시내점과 팔마레스점을 운영한다. 멘도사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대개 첫손가락에 꼽히는 소문난 곳이다. 저녁은 8시부터지만 어떻게 그때까지 기다리겠는가. 7시가 되기도 전에 식당에 들어섰다.

당연히 비었으리라 짐작했지만 정작 놀란 것은 식당의 테이블 수. 어마어마한 규모다. 무슨 극장식 식당 같은 면적이다. 돼지 족발찜 비슷한 것에다 샤르도네와 말베크를 번갈아 맛보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그 넓은 식탁이 모두 사람으로 차 있었다는 사실에.

계산을 마치고 문 밖에 나서니 대기자들 수십 명이 곧 맛보게 될 맛을 기대하는 것처럼 모두 들떠 보였다. 내가 식사했던 곳은 시내점으로 지하 와인셀러에서는 시음도 가능하다. 수제 파스타의 쫄깃한 감촉이 좋았고, 음식 모두 맛깔스러웠으며 더부룩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에 이르는 길

칠레를 가봤다면 아르헨티나에 가는 건 오히려 쉽다. 특히 와인 산지 멘도사는 칠레 수도 산티아고에서 국내선과 다름없다. 서울~부산 정도랄까. 그러니 칠레 여행길에 멘도사를 둘러보는 게 가장 현명하고 저렴한 아르헨티나 와인 여행이다.

하지만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간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어차피 우리나라에서 남미까지 논스톱은 없으며, 어딘가를 거쳐 가야 한다. 보통은 북미를 거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들어가며, 대한항공을 타면 거기에다 상파울로에서 내려 다시 갈아타야 하니 국적기는 아예 잊어버리자.

글·사진 조정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