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무 보고캐피탈어드바이저 공동대표

선택의 연속인 우리 삶에서 ‘남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 ‘선택’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박병무 보고캐피탈어드바이저 공동대표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의 삶에 걸친 네 번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죠. 나는 사람들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죠.’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대표작 ‘가지 않은 길’의 마지막 구절이다.

흔히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남들과 같은 선택’을 하기 위해 애쓴다. 소외되거나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프로스트의 시처럼 ‘남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중에는 큰 성공을 거두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하버드대를 중퇴하고 창업을 택한 빌 게이츠, 의사의 길을 접고 컴퓨터 바이러스 치료제를 개발한 안철수 등이 대표적이다.
[Success Story] “비즈니스맨의 최고 덕목은 Integrity(올곧음)”
그 리스트에 들어갈 만한 또 하나의 인물이 박병무 보고캐피탈어드바이저(이하 보고펀드) 공동대표다. 학창 시절 그는, 서울대 인문계 수석 합격, 서울법대 수석 졸업으로 연달아 뉴스를 탔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의 남은 인생 여정은 뻔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사법연수원을 마친 후부터 ‘남과는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수원 졸업생들의 제1지망은 판사나 검사직인데 그는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당시 그의 선택은 법조계에서 화제가 돼 신문에 실릴 정도로 파격이었다. 이후에도 그의 남다른 선택은 이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김앤장을 나와 엔터테인먼트 업체 대표로 옮기더니 미국계 사모펀드, 통신업체 등을 거치며 비즈니스맨으로 변신한 것. 최근 또다시 토종 사모펀드의 공동대표로 변신한 그를 만나 ‘남과는 다른 선택’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자주 쓰는 말 가운데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라는 것이 있어요. 내가 하는 일이 월스트리트 저널에 보도되더라도 당당히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일하라는 뜻이죠.”
[Success Story] “비즈니스맨의 최고 덕목은 Integrity(올곧음)”
보고펀드에서의 역할은 인수기업의 Operation

언론에서 박 대표를 설명할 때 흔히 사용하는 수식어는 ‘M&A의 달인’이다. 그는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재직한 12년간 제일은행, 한일은행, 쌍용증권 등 초대형 인수·합병(M&A)을 포함해 40건이 넘는 M&A 업무를 처리했다.

한화종금의 적대적 M&A ‘사건’ 때 방어수단으로 사모전환사채를 국내에 소개한 것도 박 대표였다. 이후 로커스홀딩스 대표이사 시절에는 시네마서비스 등 10여 개 엔터테인먼트 업체의 M&A를 주도했고 미국계 사모펀드 뉴브리지캐피탈 대표로 옮긴 후에는 하나로텔레콤 인수 작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M&A 스킬(skill)’만이 그의 역량의 전부는 아니다. 박 대표는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 대표 시절 주먹구구식이던 영화·음반 제작 시스템의 선진화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고 부실에 허덕이던 하나로텔레콤 대표를 맡아서는 국내 최초의 IP TV(인터넷을 통해 제공되는 TV 서비스)인 ‘하나TV’를 선보이며 경영정상화를 이뤄냈다. 이런 그에게 보고펀드가 기대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보고펀드에서 박 대표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사모펀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펀딩과 M&A, 그리고 인수기업의 경영, 세 가지 능력이 요구됩니다. 이 중 M&A나 펀딩(자금 모집) 업무에서는 다른 세 분의 대표(변양호·신재하·이재우)께서 저 이상으로 뛰어난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제가 세 분과 다른 점은 플래너스나 하나로텔레콤 같은 기업을 경영해 본 경험이 있다는 점이니 앞으로 인수기업의 경영 측면에서 기여할 바가 많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일을 해왔는데 노동의 강도나 심적 스트레스가 가장 힘들었던 시간은 언제였습니까.

“노동의 강도로 따지자면 김앤장에서의 막바지 시절이 가장 팍팍했어요. 당시 한화종금 건을 포함해 적대적 M&A를 방어하는 일들이 많았는데, 힘든 만큼 재미도 있었죠. 제일은행 건이 특히 힘들었는데, 낮에 협상한 결과를 가지고 밤에 미국에 있는 (뉴브리지캐피탈) 스태프들과 컨퍼런스 콜로 회의를 하다 보니 낮이고 밤이고 쉴 시간이 없었어요.

그렇게 밤에 미국 스태프와 회의한 결과를 가지고 그 다음날 낮에 예금보험공사 측과 일을 진행하는 식이었죠. 그 건을 무려 1년 반가량이나 했는데, 마지막 두 달은 하루에 두세 시간 밖에 못 잤어요. 어느 날 여의도에 운전을 하며 가다 졸려서 차를 박을 뻔했는데, 그때 ‘이러다 죽겠구나’ 싶더라고요.(웃음) 그 이후에 난생 처음으로 운전기사를 뒀죠.”

김앤장에서 나와 엔터테인먼트회사 CEO로 예상치 못한 변신을 하셨는데, 변호사 출신이 엔터테인먼트 ‘바닥’에 적응하기가 녹록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생면부지의 분야에,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처음엔 정말 힘들었죠. 그 계통에 계신 분들 중엔 낮과 밤을 거꾸로 사는 사람도 많고 술은 또 어찌나 많이들 마시는지요. 일단 엔터테인먼트 각 분야에서 ‘최고의 파워맨’이 누구인지부터 물어봤죠. 영화 쪽에서는 강우석 감독이 최고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쪽 ‘바닥’ 사람들이 모두 개성이 강해서 의기투합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때마침 2000년대 초반에 한류바람이 일기 시작할 때라 모두들 ‘독불장군’ 노릇 그만하고 힘을 합치자고 설득했죠. 방법이 없을 것 같아 무조건 쫓아다녔는데, 당시 시네마서비스 대표였던 강 감독을 무려 넉 달간 쫓아다녔습니다.

결국 경주까지 도망간 강 감독을 찾아가서 밤새 술 마시며 담판을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는 저도 폭탄주 15잔 정도는 거뜬했거든요.(웃음) 그때 강 감독을 비롯해 김상진 감독, 차승재 대표, 정훈탁 대표 등을 모두 ‘플래너스’로 모았죠.”

종합 엔터테인먼트회사·포털 TV 등 ‘초유’ 를 만든 ‘미다스’

변호사로서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변신’에는 그만큼의 고충이 따랐다. 당시 잘나가던 IT회사인 로커스와 코스닥 상장사였던 ‘코어텍’이란 회사의 M&A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동료 변호사의 일을 돕던 차에 “지주회사 만드는 작업을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됐다.

그런데 손을 보태다 보니 아예 ‘회사를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았고, 결국 변호사 일을 접었다. 하지만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서자마자 IT 붐이 꺼져가기 시작했고, 지주회사를 만들겠다던 생각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변호사 명함은 버렸던 터라 다른 옵션도 없었다. 강우석 감독의 ‘시네마서비스’를 비롯해 정훈탁 대표가 이끌던 연예기획사 ‘싸이더스’, 게임업체인 ‘넷마블’ 등 10여 개 회사와 의기투합해 종합 엔터테인먼트회사인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를 출발시켰다.

주먹구구식인 엔터테인먼트사가 난립했던 시절 ‘종합’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엔터테인먼트회사는 처음이었던 터라 수많은 ‘독불장군’들을 설득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엔터테인먼트의 최대 취약점이랄 수 있는 사전제작(pre-production)의 정착화, 제작비의 안정적 공급을 위한 펀딩 시스템 등 선진적 경영기법을 도입하며 연타석 ‘홈런’을 날리기에 이르렀다.

플래너스에서 2000년대 초반 흥행작들을 많이 내놓으셨죠.

“운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힘들기만 하더니 1년쯤 지나면서 한류바람 덕을 봤습니다. <쉬리>에 이어 이 연달아 흥행을 했고, 인기그룹 ‘HOT’가 본격적으로 한류바람을 타기 시작했거든요. 때마침 온라인게임 비즈니스도 붐을 일으켰죠. <가문의 영광>, <공공의 적>, <엽기적인 그녀>, <주유소 습격사건>, <클래식>, <선생 김봉두>, <취화선> 등 제작한 영화들도 다행히 모두 흥행을 했어요.”

엔터테인먼트회사들이 주먹구구식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였던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제가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제작비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통해 펀드를 장기적으로 가져가면서 사전제작 시스템 정착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사전제작이 가능하려면 일단 시나리오가 완벽해야 합니다. 시나리오가 완벽하면 그만큼 촬영 시간도 줄일 수 있고, 결국 제작비 절감효과를 거둘 수 있거든요. 할리우드 대작들이 한두 달 사이에 촬영을 마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죠.

플래너스에서는 일단 감독과 제작 스태프의 마인드를 바꾸는 일부터 했는데, 제가 스트레스를 많이 준 셈이죠.(웃음) 하지만 제작비 공급이 안정적으로 되니까 선순환이 이뤄졌어요. 싸이더스에 소속된 좋은 배우들을 우선적으로 캐스팅할 수도 있었죠.

그룹 HOT의 일부 멤버로 구성했던 ‘JTL’도 괜찮았고, GOD 음반사업도 좋았습니다. 당시 지방에는 없던 ‘프리머스’라는 멀티플렉스도 론칭하고 ‘할리스커피’를 론칭하기도 했습니다. 요즘 커피숍을 운영하는 엔터테인먼트사들이 있는데, 플래너스가 선도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변호사 시절과 비교해 수입은 만족스러우셨나요.

“변호사 시절에 비해 수입은 4분의 1 정도로 떨어졌죠, 아마. 초기엔 매출이 없으니 직원들 월급도 줘야 하고 일부 주식에 투자도 하느라고 빚을 졌습니다. 스트레스로 담배를 엄청나게 피던 시기였죠.

6개월쯤 됐을 때 너무 힘들어서 법조계에 있는 고교 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변호사에서 엔터테인먼트로 옮겨갈 때는 너 혼자 간 것이 아니다. 법조인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네가 보란 듯이 잘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가자 싶어서 1년 지나고부터는 마냥 밀어붙였는데, 나중에 운이 따라 잘 됐던 거죠.”

플래너스가 성장가도를 달렸는데, 3년 만에 왜 뉴브리지캐피탈로 자리를 옮기셨나요.

“최대주주였던 로커스의 사정이 안 좋아 매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겁니다. 애초에 10~20년을 내다보며 의기투합했던 건데 좀 당황스러웠죠. 회사 내부에서도 모두 기막혀했습니다.

막상 매각하려고 했더니 CJ, KT, SK 등 대기업들이 엄청난 관심을 보이더군요. 2003년도에 SK가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던 시점에 ‘SK 글로벌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로커스는 블록세일로 매각하고 사람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됐죠. 그 작업까지만 하고 저는 플래너스를 나왔어요.”

다음 행보가 뉴브리지캐피탈이셨죠.

“지금은 사명이 TPG 아시아펀드로 바뀌었는데, 프라이빗 에퀴티 펀드로는 대단한 회사라 인프라가 워낙 좋았어요. 사실 플래너스에 있으면서도 뉴브리지캐피탈 측에서 한 2년간 지속적으로 자문을 부탁했었고요.

유태인들이 가진 철저한 프로페셔널 정신 등 개인적으론 많이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죠.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라 의미도 있었고요. 물론 욕을 많이 먹고 있던 회사이긴 했지만 ‘딜’은 딜 자체로 논의돼야 한다고 봤어요. 뉴브리지캐피탈로 가자마자 바로 하나로통신 건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하나로통신이 투자를 끌어들일 때였는데, 1대 주주인 LG그룹이 투자받는 것을 반대해서 위임장 쟁탈전까지 갔다가 결국 이겼죠.”

그런데 대표님의 다음 행선지가 공교롭게도 하나로텔레콤이 됐습니다.

“(웃음) 그때도 주변 사람들이 ‘네가 간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며 심하게 반대했었죠. 당시 통신회사 간 경쟁이 격화됐었고, 하나로텔레콤의 주가도 많이 하락했던 시점이니까요. 그런데 IP TV인 ‘하나TV’가 생각보다 잘 됐어요.

하나TV 준비에서 론칭까지의 시간은 고생도 많았지만 재미도 있었어요. 하나TV 아이디어는 한 지방대 출신 직원이 냈는데, 당시만 해도 통신회사에서 지방대 출신들은 별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그때 그 친구를 중심으로 열댓 명 정도의 ‘외인구단’을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공포의 외인구단’ 같았다고 할까요.

다른 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야전침대까지 갖다 놓고 6개월간 먹고 자고 하면서 일들을 했어요. 처음 열댓 명으로 시작했던 외인구단도 나중엔 200~300명으로 늘어났죠. 자신감도 점점 붙어갔고요.”


[Success Story] “비즈니스맨의 최고 덕목은 Integrity(올곧음)”
박병무 대표는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 대표 시절 주먹구구식이던 영화·음반 제작 시스템의 선진화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고 부실에 허덕이던 하나로텔레콤 대표를 맡아서는 국내 최초의 IP TV ‘하나TV’를 선보이며 경영정상화를 이뤄냈다.

하나TV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때 엔터테인먼트회사에 있었던 이력이 도움이 많이 됐어요. 아무도 하나TV가 할리우드 메이저 배급사들로부터 프로그램을 공급받을 것이란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공중파 방송사인 KBS, MBC, SBS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도 엔터테인먼트 쪽에 있어본 터라 어떤 루트를 통하고 누구한테 손을 뻗으면 가능한지 가늠할 수 있었어요. 소니, 디즈니, 워너브라더스 등 굴지의 배급사와 공중파 방송에서 프로그램을 공급받으면서 사람들이 깜짝 놀랐죠.”

프로페셔널의 기본이자 최상의 모토는 ‘진실성’

박 대표는 M&A 분야의 최고 ‘달인’, 손대는 기업마다 대박을 터뜨리는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며 화려한 ‘전적’을 세웠다.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학창 시절에 입증해 보인 ‘수재적 DNA’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있을 법 했다. 만약 탁월한 DNA만으로 승승장구했다면, 그가 ‘운이 따랐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하진 않았을 것 같다.

성공적 M&A를 이끄는 협상의 노하우가 궁금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인테그리티(integrity·올곧음)입니다. 자주 쓰는 말 가운데 ‘월스트리트 저널 테스트’라는 것이 있어요. 내가 하는 일이 월스트리트 저널에 보도되더라도 당당히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일하라는 뜻이죠. 특히 금융회사에서는 직업적인 진실성이 매우 중요합니다. 뉴브리지캐피탈에서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얘기가 직업적인 윤리와 진실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박 대표의 학창시절은 어땠나요.

“초·중등생 때는 공부보다는 이것저것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술도가를 하셨는데 그래선지 어른들께서 술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하셨어요. 중학교 소풍 갈 때 선생님 드리라고 양주를 싸주시곤 하셨는데, 두 병 주시면 선생님께는 한 병만 갖다 드리고 한 병은 슬쩍 하기도 했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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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신문 배달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을 것 같진 않은데요.

“초등학교 때 의협심 강한 친구가 한 명 있었어요.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함께 하면서 그 친구의 제의로 길거리에서 수재의연금도 모으고 그랬죠. 신문 배달도 그 친구랑 함께 했는데 월급 타서 좋은 데 쓰자는 생각이었어요.

새벽 3시에 일어나 8시까지 배달을 했는데 당시 신문보급소들의 운영 시스템상 초보 배달원들은 수입이 거의 없었어요. 다행히 보급소장께서 저를 예쁘게 봤는지 규정 외의 수당을 주셔서 감사하게 받았죠.”

서울대 법대 수석 합격에, 대학 3학년 때 사법고시 합격 등으로 기대를 많이 모으셨을 것 같은데 판검사 대신에 변호사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버님 형제가 네 분인데 옛 어른들이 대부분 그러셨듯이 할아버지께서 아들들의 진로를 결정해 주셨죠. 큰아버님이 법대를 졸업하시긴 했는데 정계로 진출하는 바람에 할아버지의 뜻을 이루진 못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아버지께서 제가 법대 가기를 바라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법고시 패스 후에 교수님의 소개로 김앤장 법률사무소를 알게 됐고 단번에 진로를 결정했죠. 처음에는 집안 어른들께서 ‘연수원에서 얼마나 놀았으면 변호사 사무실로 가냐’면서 한심해하시기도 했어요. 당시만 해도 ‘김앤장’이 알려지지 않아 ‘김현장’이라는 변호사 이름으로 착각하는 분들도 있을 때였으니까요.(웃음)”

2011년에 지천명의 나이가 되는데, 인생의 하프 마라톤을 끝내신 것 같습니다. 어떤 각오로 풀코스를 향해 달려가실지 궁금합니다.

“아내가 앞으로는 좋은 일을 할 방법을 생각해보라고 많이 종용합니다. 우리나라는 양극화 현상이 더 심해질 것 같단 생각이 들어 그런 분야에서 기여할 수 있는 좋은 일을 고민하는 중입니다.”

한순간도 편하게 일한 적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 관리법을 알고 싶습니다.

“너무 힘들 땐 가끔 쉬어 버리는데, 이번 결정을 앞두곤 백운대를 다녀왔어요. 워낙에 등산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혼자서 자연 속에 들어가 쉬다 보면 우리 사는 모습이 참 덧없어 보이면서 ‘물 흐르는 대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물이 흘러가는 곳, 순리(順理)라고 할까요. 자연스럽게 순리가 보이더라고요.”


박병무

현 (주)보고캐피탈어드바이저 공동대표
1961년 생
서울대 법과대학 학·석사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플래너스엔터테인먼트 대표
뉴브리지캐피탈(현 TPG 아시아펀드) 대표
하나로텔레콤 대표


글 장헌주·사진 이승재 기자 c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