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조광호 신부 & 세종대 정현기 교수

조광호 인천가톨릭대 조형예술대학장은 가톨릭 사제다. 사제이면서 시를 쓰고 그림도 그린다. 화업을 시작한 지 벌써 40년.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은 그의 회화, 판화, 이콘화, 스테인드글라스 등은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2년 전 둥지를 튼 인천 송도의 작업실에 15년 지기인 정현기 세종대 국문학과 교수가 어려운 발걸음을 했다.
조광호 신부(왼쪽)와 정현기 교수
조광호 신부(왼쪽)와 정현기 교수
1947년생인 조광호 신부의 고향은 강원도 삼척이다. 어릴 적부터 시 쓰고 그림 그리기를 즐겼던 그는 가톨릭대 신학과에 다니면서 시인과 화가를 꿈꿨다. 사제 서품을 받은 후에는 독일 뉘른베르크대와 대학원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
2010년 , Oil on canvas, 180×240cm
2010년 , Oil on canvas, 180×240cm
198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내외에서 20여 차례 개인전을 가졌고, 여러 단체전에 참가했다. 서울 남천성당 유리화와 서울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그의 작품이다.

그의 다채로운 이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신학생 시절 시에 빠졌던 것이 인연이 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출판국장을 지냈고, 문화영성 교양지 <들숨날숨>을 창간해 편집인을 맡기도 했다. 현재도 한국가톨릭문인회 지도신부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전방위 문화예술인 조광호 신부의 현재 자리는 인천가톨릭대 조형예술대학 학장이다. 2008년 조형예술대학이 송도로 이전하면서 그도 송도로 내려왔다. 송도유원지와 인접한 곳에 터를 잡은 그의 작업실은 상가에서 빗겨나 있어 한적한 느낌을 주었다.

친구의 부름에 4시간여를 달려 찾아온 송도

하늘을 나르는 천사, 2009년, graphite·on quartz·art paper
하늘을 나르는 천사, 2009년, graphite·on quartz·art paper
이곳에서 그는 학교 일도 보고, 강의도 한다. 물론 틈나는 대로 작업도 한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화가세요, 신부세요”라고. 그는 한결같이 “신부”라고 답한다.

다른 점이라면 다른 신부들이 미사를 통해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미술을 통해 복음을 전한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것은 아니다. 종교적이기보다 철학적이고, 신보다는 인간을 다룬다.

문화 전반에서 다양한 활동을 한 덕에 그의 주변에는 문화예술인이 많이 있다. 오랜만에 그의 작업실을 찾은 정현기 세종대 교수도 그중 한 사람이다.

오랫동안 연세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그는 정년퇴임 후 현재는 세종대에 출강하며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쓴다. 정 교수는 네 살 아래인 조 신부의 부름에 새벽이슬을 밟고 4시간여 달려 송도에 왔다며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2010년, oil on canvas, 130×162cm
2010년, oil on canvas, 130×162cm
정현기(이하 정): 오랜만에 전화를 해서는 대뜸 인천까지 오라는 거야. 그렇다고 새벽 6시에 일어나서 4시간 걸려 찾아온 나는 또 뭐야.(웃음) 내가 경기도 용인에 살거든요.

조광호(이하 조): 그래서 내가 이렇게 대접을 하잖아요(이렇게 말을 하며 조 신부는 막사발에 담은 에스프레소를 찻잔에 따랐다). 혼자 사니까 귀찮아서 커피도 막사발에 담아냅니다. 금방 내린 거라 향은 좋을 겁니다. 드세요.

정: 아니, 신부가 혼자 사는 건 당연한 거 아냐. 난 무신론자지만 신부님 존경해요. 특히 우리 조 신부님을요. 오늘 아침에 집 나서면서 마누라한테 그랬어요. 나 죽으면 지옥에서 구해줄 분이라 꼭 찾아가야 한다고 말이에요. 우리가 그 정도 사이는 되잖아요. 함께 지낸 세월이 얼만데.

조: 족히 15년은 됐죠. 그때가 아마 토지문학관 짓는다고 문화예술인들이 모였을 때였죠. 건축하는 분을 통해 처음 만났으니까요.
흔적, 2008년, 혼합 재료, 73×91cm
흔적, 2008년, 혼합 재료, 73×91cm
정: 아마 그럴 겁니다. 제가 연세대 교수로 있을 때니까요. 당시에 누가 박경리 선생의 토지문학관을 짓자며, 땅을 내놓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문화예술인들이 몇십 명 모여서, 유럽의 문학관도 견학하고 그랬죠. 그때 신부님이 축성도 해주고 그랬죠.

조: 그 뒤로 문화행사가 있을 때마다 만났죠. 돌이켜보면 그것도 인연이었던 듯합니다.

정: 어제도 신부님한테 말씀드렸지만 사실 제가 그림을 잘 몰라요. 문학을 전공했고 음악을 사랑하지만, 꼭 하나 그림은 몰라요. 그래도 같은 예술이니까 좋은 건 알아봐요.

조: 미술은 너무 많이 알면 보고 즐기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제가 미술 작업을 하지만 시도 오래 썼고, IMF 이후에는 <들숨날숨>이라는 문화영성 잡지도 냈습니다.

21세기 미술은 설명이 아닌 모두가 참여하는 것

정: 조 신부님이 굉장한 화가라는 사실은 알지만, 저는 그림보다는 이분의 글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신학생 시절, 우연히 연등제에서 만난 여자 분과의 인연을 소개한 글이 제 가슴을 쳤습니다.
[Friends] 문학과 미술, 신과 인간을 논하다
조: 참 오래된 얘긴데요. 제가 신학생 때 연등제에 갔는데, 어떤 부인이 등을 못 달아 쩔쩔매고 있었어요. 보시다시피 제가 키가 좀 크잖아요. 그래서 대신 달아드렸죠. 그러고 30여 년이 지나서 그분 따님이 전화를 했어요. 어머님이 보고 싶어 하신다면서요. 그래서 만났는데 그때 너무 고마워서 불당에 갈 때마다 ‘제가 좋은 사제가 되기를 비셨다’고 하더군요. 저로서는 참 가슴을 울렸던 경험이었습니다.

정: 또 하나 감명 깊었던 게 벌치는 수사님에 대한 글이었어요. 왜 낮에는 벌을 치고 저녁이면 사람들 불러놓고 톱으로 아베마리아를 켜주셨다는 수사님 있잖아요.

조: 해방 전에는 김구 선생 밑에 계셨던 분인데 예수와 같은 삶을 살려고 했던 분입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가 <들숨날숨> 같은 잡지를 낸 것도 그런 분처럼 가톨릭과 사회를 잇는 파이프라인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거든요. 그림을 그리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에 미술을 한 것은 아니거든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사제가 된 뒤에는 개인적인 취향에 종교적인 의미가 부가된 거죠.
[Friends] 문학과 미술, 신과 인간을 논하다
정: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미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한 건가요.

조: 돌아보면 그런 셈이죠. 그전까지는 동양화밖에 몰랐어요. 그런데 독일에서 만난 교수가 ‘다원주의 시대에 예술은 형식을 넘나들어야 한다’고 한 거죠. 그때가 1980년대 중반인데 그때 이미 통섭을 강조한 거죠. 그 뒤 추상화, 이콘화, 판화 등 7가지 작업을 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그중 가장 많이 했고요.

정: 저는 미술을 잘 모르지만 예술은 박물관에 들어가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미술도 그렇다고 봐요.
부산남천주교좌성당, 1995년, 안틱글라스에 유약, 5300×4200cm
부산남천주교좌성당, 1995년, 안틱글라스에 유약, 5300×4200cm
조: 맞습니다. 작가의 설명에 그치는 미술은 한계가 있습니다. 작가의 작품에 그림을 보는 사람의 참여가 필요한 거죠. 21세기 미술은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 확장돼야 합니다.

정: 어제도 말이죠, 놀러온 손녀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걸 보고 ‘이게 예술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어요. 손녀처럼 인간에게는 본연의 예술적 감성이 있는 겁니다. 그런 게 살아있는 예술 아니겠습니까.

조: 흡족하셨겠네요.(웃음) 그것처럼 21세기에는 작가는 문을 열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관람하는 각자가 자기 작품을 만들어가는 시대입니다. 얼마 전에 여기서 미대 석·박사들과 워크숍을 가졌어요. 제가 1차 판화작업을 하고 그 바탕 위에 그들이 다시 작업을 하고, 다시 제가 마무리를 했습니다. 저로선 참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렇게 미술도 참여하는 미술이 돼야 합니다.
[Friends] 문학과 미술, 신과 인간을 논하다
모든 위대한 종교에는 예술이 존재

정: 좀 다른 얘기지만 말이죠. 예술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찾는 데 있습니다. 내가 되는 과정이 예술인 거죠. 혼자 끙끙 앓는다고 그게 찾아지느냐. 그렇지는 않죠. 여러 사람들하고 관계를 맺고 사니까, 사람들과의 연계 속에서 자신을 찾아야 하는 거죠. 단, 그 관계에 어떤 억압이나 힘이 개입돼서는 안 되죠(말을 마친 정 교수가 술을 찾자 조 신부가 와인을 꺼내왔고,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정 교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요즘 세상은 돈 자체가 신적인 존재이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자꾸 이간질하는 것 같아요.
[Friends] 문학과 미술, 신과 인간을 논하다
조: 인간의 역사 자체가 착취의 역사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종교가 ‘인간을 구원의 대상’으로 보는 거죠. 아까 정 교수가 정체성 얘기를 하셨는데, 미술도 다른 작가와 차별성도 중요하지만 자기정체성을 잊어서는 안 되거든요.

정: 제가 학생들에게 정체성 얘기를 많이 합니다.

조: 정체성은 ‘내가 왜 사는지’, ‘내가 누군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21세기는 정보가 너무 많아요. 넘쳐나는 정보 사이에서 질문이 설 자리가 없는 거죠. ‘Korea Fantasy’라는 작업은 그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겁니다.

정: 조 신부님이 이런 분입니다. 여러 면에서 열린 분이죠. 누가 “전 무신론잡니다”라고 해도 그걸 웃으면서 받아주는 분이 조 신부님입니다.

조: 저는 미술을 위해서가 아니고 궁극적으로 인간을 위해 그림을 그립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와 예술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예술은 아름다움의 세계, 진리의 세계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는 설명할 수도 있지만, 예술을 통해 보여줄 수도 있거든요. 종교도 그래요. 인간의 몸이 몸과 마음의 유기체인 것처럼, 종교와 예술도 그렇게 유기적인 관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타락한 종교에는 예술이 없습니다. 달리 말해 모든 위대한 종교에는 예술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정: 우리 시대의 예술은 설명이 아니라 일종의 그리움 같은 겁니다. 보고 느끼는 거죠. 시에 설명이 필요 없듯이 미술에도 너무 많은 설명이 따라서는 안 되는 거죠. 예술은 기본적으로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거니까요.

조: 그런 면에서 예술 하는 사람들은 직업이나 나이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저도 종교화라기보다 보다 개방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에서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다. 신부가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고 인간 조광호가 작업을 하는 거니까요.

성과 속, 문학과 미술을 넘나드는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을 몰랐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자 못내 아쉬운 듯 조 신부가 정 교수를 가까운 식당으로 이끌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정 교수의 손에는 마시다 남은 와인 병이 들려있었다.

점심을 나누며 두 사람은 못다 한 대담을 이어갔는데, 술이 한 순배 돌자 대담은 정담으로 이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탓에 두 사람은 가족의 안부와 친구들의 근황을 묻기 바빴다. 술잔이 비고 이윽고 상을 물릴 때가 되자 정 교수가 은근히 귀가를 걱정했다. 그러자 조 신부는 흔쾌히 “형님은 제가 모셔야죠”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