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불화가 이길우

이길우는 향불로 화선지에 구멍을 내고, 그 위에 작업을 하는 개성 있는 작가다. 그가 지난 10월 열린 제14회 방글라데시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 대상 수상 소식에도 우직하게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를 찾았다.
[Artist] 동서양의 인물과 문화를 변주하다
이길우 작가의 작업실은 수원 영통 부근에 있었다. 새로 들어선 아파트 숲 사이, 그의 작업실은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일행을 맞은 그는 직접 차를 내며 자리를 권했다.
[Artist] 동서양의 인물과 문화를 변주하다
방문객을 맞기 직전까지 작업을 했는지 미완의 작품이 여러 점 눈에 띄었다. 그는 “내년 2월에 있을 뉴욕 전시를 준비 중”이라며 “이미 11점은 뉴욕 맨해튼의 갤러리에 보냈다”고 했다.

방글라데시 비엔날레 대상 수상을 축하하자 그는 “작업만 하다 보니까 그전에는 그런 비엔날레가 있는지 잘 몰랐어요”라며 천진하게 웃었다. 10월 초 비엔날레 커미셔너가 연락을 해 두 점을 보냈는데, 운 좋게도 대상을 받았다고 했다.

대상을 받은 작품은 <무희자연>. <무희자연>은 무아지경에 빠진 무희의 춤사위를 조형화하고, 이를 메릴린 먼로 얼굴 전면에 디졸브(Dissolve·전환기법)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를 통해 그는 동서양의 복합적인 문화를 한 데 담고자 했다. 그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인간 행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작가 김동유와 닮은 점, 다른 점

<무희자연>이 보여주듯 그의 작업은 다문화적 코드를 융합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는 향불 작업을 한다. 향불 작업은 인두로 종이를 태워 그리는 낙화기법과 유사하다.

그는 인두 대신 향을 쓴다. 이길우의 손끝에는 언제나 향이 들려 있다. 그는 향불로 조심스럽게 화선지에 구멍을 낸다. 향을 너무 오래 대고 있어도 안 되고 빨리 떼도 안 된다. 그렇게 만든 화선지를 밑그림 위에 덧붙인다.
[Artist] 동서양의 인물과 문화를 변주하다
이렇게 하면 향불이 만든 구멍과 그을린 색깔을 통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의 그림은 픽셀 모자이크 회화를 하는 김동유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김동유 씨와 비슷한 감이 있긴 하죠. 작업을 한 시기도 비슷하고요. 많은 분들이 찾는다는 점도 비슷하네요. 대신 작품 값은 좀 다르죠.(웃음) 작품 가격은 별개의 문제죠. 저는 트렌드를 타고 가격이 오르는 건 옳지 않다고 봐요. 그러면 생명력이 짧아질 수 있거든요. 작품 가격은 오르는 계기가 따로 있다고 봅니다.”
[Artist] 동서양의 인물과 문화를 변주하다
그는 김동유와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끄는 이유를 기법의 참신성과 동서양의 어울림이라는 테마에서 찾는다.

두 사람 모두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만들어 냈고, 주제 또한 현대문화의 다양한 단면을 한 화면에 구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저나 김동유 씨가 인기가 좀 있으니까, 이걸 따라하려는 후배들이 생기더군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죠. 요즘 컬렉터들의 수준이 작가 못지않습니다.

독창성이 부족한 작가는 작품 활동을 계속하기가 쉽지 않아요. 작가라면 여러 시도를 해보고, 자신만의 기법을 찾아야죠.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향불 작업의 시작과 진화

지금의 향불 작업을 하기까지 그도 여느 가난한 예술가처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중앙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는 대학 졸업 후 작업만 했다. 필요에 따라 가끔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변변한 직장에 다닌 적은 없다.
[Artist] 동서양의 인물과 문화를 변주하다
희망과 좌절이 교차하던 2003년, 향불 작업의 시작은 그즈음이었다. 신갈에 있는 화실 앞을 지나다 우연히 가을 햇살 아래 까맣게 반짝이는 은행잎을 보게 됐다. 때는 늦은 가을이라 은행잎은 말라 있었는데, 그 느낌이 마치 은행잎을 태운 듯했다.

그걸 보고 그는 한국화의 낙화기법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향불이 아닌 인두로 화선지를 지졌다. 그런데 구멍이 너무 컸을 뿐 아니라 균일한 구멍이 나오질 않았다. 여러 방법을 고민하다 생각이 향에까지 미쳤다. 불교에서 향불은 정화, 윤회 등의 의미까지 있어 금상첨화였다.

“벌초를 갔다 와서 남은 향으로 화선지를 지져봤는데, 그게 참 재밌더라고요. 태우고 다시 태워봤죠. 영화의 오버랩 기법처럼 이중적인 화면이 만들어지더군요. 이중적인 화면구도가 동서양, 신구세대가 혼재된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이걸 통해 다양한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공생, 공존하는 세상을 표현해보자 마음먹었죠.”

그렇게 작업한 작품으로 2004년 전시회를 가졌다. 이후 그는 향불 작업을 계속했다. 지금은 조금 진화해 세밀하게 만들어진 가는 인두를 쓴다. 그는 지금도 도를 닦듯 화선지 위에 구멍을 낸다.

<로널드씨 유랑기>와 <동문서답>과 <무희자연>

그 사이 테마는 자주 바뀌었다. 2007년에는 <로널드씨 유랑기>를 선보였다. 해외에서도 호평을 받은 <로널드씨 유랑기>의 원래 제목은 ‘로널드씨 점령기’였다. <로널드씨 유랑기>의 태동은 인사동이었다.
“독창성이 부족한 작가는 생명력이 길지 않습니다. 작가라면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있어야죠.”
“독창성이 부족한 작가는 생명력이 길지 않습니다. 작가라면 자신만의 아이덴티티가 있어야죠.”
“인사동 맥도날드에 삐에로가 있는데, 딸아이가 그 옆에 앉는 걸 무척 좋아합니다. 생각해보면 맥도날드는 다양한 문화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상징이거든요. 베이징이고 어디고 맥도날드가 안 들어간 곳이 없잖아요.

몇천 원짜리 햄버거가 총칼보다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기서 착안해 우리나라 풍속도에 로널드를 그렸죠. 원래 제목은 ‘로널드씨 점령기’였는데, 화랑에서 <로널드씨 유랑기>로 바꾼 겁니다.”

2008년에는 ‘동문서답’이 테마였다. 동문서답은 물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대답을 말한다. 그는 원뜻에서 ‘엉뚱함’과 ‘동과 서’를 빌려왔다. 그렇게 탄생한 ‘동문서답’ 테마는 ‘엉뚱함’과 동시에 ‘동서양 문화의 충돌’을 담았다.

지금의 <무희자연>은 김연아와 마이클 잭슨이 모티브를 제공했다. 지난 2009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김연아의 공연을 보며, 그는 인간의 행위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경험했다. 그즈음 유명을 달리한 마이클 잭슨의 춤사위가 떠올랐다. <무희자연>은 그렇게 탄생했다.

“앞으로도 테마뿐 아니라 다양한 기법을 시도해 볼 겁니다. 요즘은 판화기법에 관심이 많이 가요. 내년 뉴욕 전시를 계기로 설치 작업도 응용해볼 생각이고요.”

여자의 변신이 무죄이듯, 작가의 시도도 죄가 될 수 없다. 캔버스 위에서 그의 변주는 계속될 것이다. 그의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다.

글 신규섭·사진 서범세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