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stantin Brancusi

예술가의 작업실은 보물창고다. 유화물감이 수북하고 하얀 캔버스가 덩그러니 이젤에 놓여 있다. 팔레트에는 방금 그리다가만 물감이 살아 움직이고, 붓과 나이프는 작업대 위에 흩어져 있다.

독특한 물감 냄새와 화집, 그리고 가을풀이 꽂혀 있는 화병, 스케치북, 연필과 자, 벽에 걸리고 기대어 있는 작품들, 천장에 매달린 모빌, 망치, 철사, 각종 공구들. 노란색 오줌싸개도 있고 파란색 슈퍼맨도 있다.
파리 엥파스 롱상에 있는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작업실. <끝없는 기둥>이 작업실을 압도한다. 1925년 브랑쿠시가 직접 찍었다.
파리 엥파스 롱상에 있는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작업실. <끝없는 기둥>이 작업실을 압도한다. 1925년 브랑쿠시가 직접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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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톰부터 캠벨스프 깡통까지 그야말로 잡동사니 만물상이다. 작업실이라기보다 아이디어 창고다. 발걸음 디딜 틈조차 없는 좁은 공간에 용케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작가는 안다. 작업실은 작품이 태어나는 창작의 산실이다.
브랑쿠시, 성직자처럼 언제나 흰 작업복을 입고 작업했던 그는 깊은 내면의 울림이 있다.
브랑쿠시, 성직자처럼 언제나 흰 작업복을 입고 작업했던 그는 깊은 내면의 울림이 있다.
루마니아 태생의 프랑스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1876~1957)의 파리 작업실은 작품창고 같다. 어지러운 연장과 돌 부스러기, 석고조각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바닥에 완성품의 자태가 북쪽 유리창 지붕과 열려진 벽면 채광창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햇빛에 빛나고 있다.

<끝없는 기둥>, <공간 속의 새>, <물고기>, <입맞춤> 등 브랑쿠시의 주옥같은 보물들이 가득하다. 1925년 자신이 찍은 흑백사진은 브랑쿠시의 수도사적 성격을 무심히 보여준다.

브랑쿠시는 성직자 같다. 플라톤, 11세기의 티베트 성자 밀라레파(Milarepa), 노자에 심취했던 그의 덥수룩한 수염과 깊은 성찰의 눈동자, 적당히 마른 수도자적 체형은 성직자의 내면을 보는 듯하다.

조각 표현의 절제와 생략이 빚은 그의 작품들은 미니멀 아트의 원형이다. 브랑쿠시는 고대 로마로부터 미켈란젤로(Michelangelo)를 경유해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으로 이어지는 구상조각의 전통과 결별하고 새로운 조각 개념을 제시한 혁명적인 조각가였다.
포가니 양 Ⅲ, 1933년, 브론즈, 45.3×16.8×23.5cm, 파리 퐁피두센터
포가니 양 Ⅲ, 1933년, 브론즈, 45.3×16.8×23.5cm, 파리 퐁피두센터
그는 모든 형태 너머의 원형, 현상 너머의 본질을 움켜쥐기를 꿈꾸었고, 그 꿈에 값하는 작품들을 빚어 낼 수 있는 열정과 재능이 있었다. 동시대 프랑스 전위예술가 앙리 루소(Henri Rousseau)는 “그는 고대를 현대로 바꾸어 놓았다”라고 평했고,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는 “그는 내가 보기에 성자였다”라고 말했다. 그의 미감은 고뇌하는 예술가의 내적성찰과 오랜 세월 고단한 삶을 견뎌 피워낸 한 송이 꽃이었다.

파리의 꿈

브랑쿠시는 1876년 2월 19일, 카르파티아 산맥과 다뉴브 강에 둘러싸인 루마니아의 시골에서 니콜라에 브랑쿠시의 6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이복형들의 학대, 카르파티아 산맥 기슭에서의 목동 생활, 대책 없는 무단결석 등으로 얼룩졌다.

7세 때 더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 때문에 가출했다가 모친한테 붙잡혀 집으로 끌려오기도 했던 그는, 1889년 13세 되던 해 다시 집을 나선다. 그것은 유럽 변방의 한 조그만 마을의 농부로 예정된 삶을 뿌리치고, 그가 자신의 운명에 내민 첫 번째 도전장이었다.

슬라티나를 거쳐 크라이오바로 간 그는 이후 수년 동안 술집 종업원, 식료품점 점원 등으로 일하며 독립적이긴 하지만 궁핍하고 위태로운 삶을 영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심심풀이로 나무상자를 뜯어 만든 바이올린이 식료품점 주인의 눈에 띄었다.
잠자는 여신, 1910년, 브론즈, 16×27.3×18.5cm, 파리 퐁피두센터
잠자는 여신, 1910년, 브론즈, 16×27.3×18.5cm, 파리 퐁피두센터
그리고 손재주가 예사롭지 않음을 간파한 주인의 도움으로 크라이오바공예학교에 입학한다. 그 후 부쿠레슈티 예술학교에 입학해 4년간 수학하고, 1902년 기술병으로 징집돼 2년 동안 인근의 마을에서 목수로 일하기도 했다.

1904년 이제 스물여덟의 나이가 된 그는 루마니아 밖의 세계가 궁금했다. 좁게만 느껴지는 부쿠레슈티를 떠나 새로운 문화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파리로 가는 것이 그에게는 꿈이었다. 마치 1970년대의 아메리칸 드림처럼.
(좌) 공간 속의 새, 1923년, 브론즈, 185.5×45.7cm, 개인 소장, (우)<마이아스트라>, 1912년, 브론즈 및 석회암 62.3cm, 55.5×59.7cm 런던 더 테이트 갤러리
(좌) 공간 속의 새, 1923년, 브론즈, 185.5×45.7cm, 개인 소장, (우)<마이아스트라>, 1912년, 브론즈 및 석회암 62.3cm, 55.5×59.7cm 런던 더 테이트 갤러리
, 1912년, 브론즈 및 석회암 62.3cm, 55.5×59.7cm 런던 더 테이트 갤러리">그것은 유럽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부다페스트, 비엔나, 잘츠부르크를 거쳐 뮌헨에 도착하자 여비가 떨어졌고 그는 파리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 도보여행은 랑그르에서 중단되고, 완전히 탈진한 그는 파리에 사는 루마니아 친구의 도움으로 마침내 그 해 7월 14일 자신의 생애 전부를 예술로 바칠 파리에 도착한다.

1905년 그는 루마니아 교육성의 장학금 지원을 받아 프랑스 국립예술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브랑쿠시는 도핀느 광장 16번지의 6층 건물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다락방 벽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붙여 놓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네가 예술가임을 잊지 말라. 용기를 잃지 말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넌 성공할 것이다.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노예처럼’ 작업하는 브랑쿠시의 모습에서 몸이 수고로운 예술가의 아름다운 노동을 본다.

새로운 형태

1907년, 브랑쿠시는 당시 구상조각의 대가인 로댕의 작업실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의 재주와 사람됨을 눈여겨본 로댕은 브랑쿠시에게 자신의 조수로 들어와 작업할 것을 제의한다.

하지만 브랑쿠시는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는 말을 새기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지금 생각해봐도 당대의 대가였던 로댕이 무명의 루마니아 시골 청년에게 제안한 행운 같은 기회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X공주, 1915~16년, 브론즈 및석회암과 석고 92.5cm, 61.7×40.5×22.2cm, 파리 퐁피두센터
X공주, 1915~16년, 브론즈 및석회암과 석고 92.5cm, 61.7×40.5×22.2cm, 파리 퐁피두센터
하지만 “사실에 접근할수록 죽은 형체를 만들 뿐”이라는 브랑쿠시의 말처럼, 로댕의 조각은 재현의 재현에 불과한 무의미한 작업이라고 생각한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재현에 머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재현된 사실 그 너머에 있는 대상의 본질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 해에 루마니아의 유력 인사 미망인에게서 남편의 묘지에 세울 기념 상 제작을 의뢰받아 브랑쿠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어린 소녀 상인 <기도>를 제작했다.

이후, 불행한 정사 후에 자살한 한 러시아 여인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입맞춤>은 로댕이 구현하고 있는 사실주의 조각의 전통을 버리고 브랑쿠시가 독자적인 걸음을 내디딘 출발점이자 불후의 명작이 됐다.

청춘 남녀가 눈을 맞대고 팔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입술을 나누는 단순함에는 로댕의 <키스>와는 사뭇 다른 인간적인 따듯함이 물씬 배어난다.

1910년, 그의 조각은 더욱 단순해졌다. <잠자는 여신>은 달걀형의 두상을 옆으로 누이고, 코와 입 그리고 눈을 부드럽지만 인상적으로 만들었다. <잠자는 여신>은 그저 달걀처럼 생긴 둥근 타원 형체일 뿐이다.

만년의 그의 조각적 침묵 속에는 형태의 끝에서 맛보는 어떤 희열이 있다. 모든 형태는 기화돼 버리고 자신만 남아 더 이상 구현해 낼 형태도, 느낌도, 이미지도 없는 적막의 공간 속에 들어갔다. ‘여신의 잠은 이러하다’라고 천명하듯, 브랑쿠시는 부드럽고 편한 잠의 경지를 마치 잠에 취해 죽은 여인처럼 표현했다.

이런 형태감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의 달걀형 인물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브랑쿠시는 달걀 형태로 조각된 자신의 조각을 “눈 먼 사람을 위한 조각”이라고 불렀다. 피터 몬드리안(Pieter Mondrian)처럼 그는 모든 생명은 그 본질로 축소될 수 있고, 우리는 그것으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젊은 남자의 토르소 Ⅱ, 1923년, 월넛 및 석회암 13cm, 42.7×28.4×14.6cm, 파리 퐁피두센터
젊은 남자의 토르소 Ⅱ, 1923년, 월넛 및 석회암 13cm, 42.7×28.4×14.6cm, 파리 퐁피두센터
이 같은 생각은 심지어 초상화의 전통적인 개별성까지 부인하게 했다. 1933년, 머리와 눈을 표현하는 데 달걀형을 사용하면서 무용가 포가니(Pogany) 양(樣)의 머리를 여러 형태로 변형시켜 표현한 <포가니 양>은 그의 또 다른 명작이다. 브랑쿠시를 현대 조각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구체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추상의 세계를 열었기 때문이다.

루마니아의 전설로 전해오는 신비의 새, 마이아스트라(Maiastra)를 형상화한 <새> 연작의 첫 번째 작품 <마이아스트라>는 인간 초월성의 선언이자 지고한 정신의 표현으로, 그 파격적인 형태의 단순함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새는 마음대로 모습을 바꾸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사람의 말도 할 줄 아는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동화 속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와 같이 마이아스트라의 신비한 힘으로 곤경과 억압으로부터 해방돼 꿈의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은 새다.

브랑쿠시는 마치 파리에서의 자신의 가난과 어려움을 조국 루마니아의 전설로 극복, 승화시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얼핏 보면 새라기보다는 농민의 노동으로 단련된 근육을 한껏 부풀리고 세상에 대해 온몸으로 날카롭게 울부짖고 있다. 새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하지만 새로 보면 새 같은 브랑쿠시만의 새로운 조형을 완성했다.

브랑쿠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공간 속의 새>는 새의 비상을 극명하게 추상화한 명품으로 1926년 미국 전시를 위해 화물로 부쳤다가 뉴욕세관에 의해 기계부품으로 오인 받아 관세를 부과하자 소송으로 이어졌다. 프로펠러처럼 보이는 반짝이는 조형물이 기계부품과 구별이 안 됐을 법도 하다. 결국 재판에 이겨 작품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시대를 앞서간 지고지순한 정신성

입맞춤, 1916년, 석회암, 58.4×35×25.9cm, 필라델피아미술관
입맞춤, 1916년, 석회암, 58.4×35×25.9cm, 필라델피아미술관
인간 초월성의 선언이자 지고지순(至高至順)한 정신성의 표현인 브랑쿠시의 작품은 파격적인 형태의 단순함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추상조각에 익숙해 있는 지금의 눈으로 보자면 파격성이 대수롭지 않게 보일지 모르나 당시로서는 그것은 반란이었다.

모든 새로운 것이 그러하듯 그의 작품은 우선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젊은 남자의 토르소 Ⅱ>는 언뜻 보면 제목 그대로 남자의 몸통을 단순화시킨 토르소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먼저 연상되는 남자의 성기처럼 보이는 뉘앙스는, 1920년 앙데팡당전에 가 전시됐을 때 그것이 남성의 음경을 연상시킨다 해 전시 주최 측에서 철거를 요구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던 것과 맥이 통한다.

그보다 먼저, 1913년 뉴욕에서 열린 아모리 쇼에 출품된 브랑쿠시의 작품들이 미국 순회전시에 나섰을 때, 시카고 미술대학의 학생들이 그의 초상에 불을 지른 사건은 그의 작품을 보는 세상의 눈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대를 앞서 간다는 것이 예술이든 음악이든, 인생이든 외롭고 힘든 일이다.

1916년 파리 엥파스 롱상 거리로 작업실을 옮긴 브랑쿠시는 손수 만든 가구들과 작업대가 놓인 천장이 높고 채광이 잘 되는 밝고 환한 방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얗게 차려 입고 어떤 절대적인 평정과 조화 속에 잠긴 채 수도자적인 엄격함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조각가로서 그의 일생은‘정신의 섬광’을 포착하려는 지난한 도전과 실험의 역사였다. 그는 그것을 위해 끝없이 형태를 단순화시켰고, 마침내 형태를 지워 버렸다. 절제와 생략이 만든 미니멀아트의 원형이었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전시돼 있는 브랑쿠시 작품들. 1924년 제작된 <수탉>도 눈에 띈다. 최선호2010ⓒ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전시돼 있는 브랑쿠시 작품들. 1924년 제작된 <수탉>도 눈에 띈다. 최선호2010ⓒ
도 눈에 띈다. 최선호2010ⓒ">
검소하고 근면한, 턱수염을 길게 기른 이 성직자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고, 조국 루마니아와 루마니아 민속음악을 사랑하며,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사진가 만 레이에게 사사해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운영하는 뉴욕의 사진 분리파 갤러리에서 사진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1916년 루마니아 민병대와 독일군이 맞서 싸운 지우 강 전투를 기념해 루마니아 정부의 의뢰로 1938년 완성한 <끝없는 기둥>은 20세기 조각의 정점이자, 루마니아 국민 가슴속에 ‘콘스탄틴 브랑쿠시’라는 이름을 깊게 각인시킨 불후의 명작이다.

1952년, 브랑쿠시는 프랑스로 귀화하면서 80여 점이 넘는 조각품과 자신의 작업실을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에 기증했다. 1957년 3월 16일 “나의 인생은 기적의 연속이었다”라고 술회한 브랑쿠시에게 더 이상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파리 몽파르나스 그의 묘지에 서 있는 <입맞춤>은 오늘도 영원히 사람들과 입맞춤하고 있다.
[최선호의 아트 오딧세이] 절제와 생략이 빚은 미니멀 아트의 원형
최선호 111w111@hanmail.net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동 대학원, 뉴욕대 대학원 졸업.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시카고 스마트뮤지움, 버밍햄 뮤지움 등 작품소장. 현재 전업화가. 저서 <한국의 미 산책>(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