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of Gold Standard_금본위제의 역사

유럽의 화폐 단위는 대부분 금이나 은 등 귀금속 광물의 무게를 재던 척도에서 유래했다. 영국의 파운드화와 발음과 철자가 똑같은 무게 단위 ‘파운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데서도 이 같은 점을 손쉽게 살펴볼 수 있다.

유로화 도입 이전 독일의 옛 화폐 단위인 ‘마르크’도 금과 은의 무게를 잴 때 사용되던 2분의 1파운드라는 의미의 무게 단위인 ‘마르크’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의 옛 화폐 단위 ‘리브르’와 이탈리아의 ‘리라’ 역시 1파운드의 무게를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Golden Era of Gold] 가치의 척도, 금본위제의 기원과 소멸
여기에 헝가리의 은광산 명칭과 연관이 깊은 ‘요하힘스탈러’의 줄임말 ‘탈러’에서 유래한 미국 ‘달러’까지 고려하면 주요 화폐 단위가 모두 금속과 이런저런 관련이 있다.

이들 화폐들에 앞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화폐인 그리스의 옛 드라크마화도 금속의 무게를 재는 데서 나왔다. 유로화 등장으로 사라질 때까지 수천 년간 그리스에서 통용됐던 ‘드라크마’는 원래 ‘한 손 가득히’란 뜻으로 쇠꼬챙이 여섯 가닥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앤서니 앤드루스 옥스퍼드대 교수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7세기경 표준화된 철물(鐵物)을 교환 목적에 사용했고, 철물의 대표주자는 바로 쇠꼬챙이였다. 이 같은 철물을 사용한 명칭은 화폐 명칭으로 이어져 ‘오볼로스’라는 작은 은화를 가리키는 단위는 한 가닥의 쇠꼬챙이에서 유래했고, ‘드라크마’는 여섯 가닥의 쇠꼬챙이에서 나왔다고 한다.

드라크마는 철의 무게를 측량하는 단위에서 출발했지만 다른 지역에서 화폐로 사용된 금속 중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은이었다.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선 오랫동안 은이 주요 가치 척도 및 교환 수단의 기능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 지방 주요 광산에서 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의 은이 산출됐고, 국제 교역에서도 활발하게 사용된 덕이 컸다. 하지만 은은 주조된 단위에 따라 계산된 게 아니라 그때그때 중량을 달아 계산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등에선 주화가 아닌 은괴의 무게를 달아 사용했고 각 상황마다 금속의 가치는 천칭에 달아 계산했다.

이에 따라 고대 제국의 각종 법규에도 은의 무게를 통한 지불 방식이 명문화됐다. 기원전 2세기 메소포타미아 에슈눈나(Eshnunna) 법전에 “다른 사람의 코를 물었을 때 은 1미나(고대 그리스 무게 단위로 약 500g)의 벌금이 부과되고, 뺨을 때렸을 때는 10세켈(유대 무게 단위로 약 5온스)의 벌금을 내야 한다”는 식으로 기록됐다.

이처럼 일정량의 은 무게에 따라 주조된 금속화폐는 모든 사람들에게 지불 수단으로서의 믿음과 소유에 대한 가치를 인식시켜 줬다고 할 수 있다. 전근대사회에선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은을 통화의 기반으로 삼았고, 19세기까지 동양과 서아시아, 남아메리카, 독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은본위제를 시행하며 은의 가치를 공고히 했다.

하지만 곧이어 금이라는 막강한 경쟁자가 등장했다. 오랫동안 화폐의 기준이 되는 ‘무게’ 역할을 하던 금속으로 금과 은이 치열하게 다투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금과 은의 경쟁에서 금이 최종 승자가 된 때는 19세기라고 할 수 있다. 구리는 19세기가 되면 금, 은과의 경쟁에서 한참 뒤졌고 은 역시 19세기 중반부터 레이스에서 뒤처졌다.

역사학자들은 금이 은을 제치고 지존의 자리에 오른 결정적 계기로 1859년 미국 네바다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면서 은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진 것을 꼽는다. 비슷한 시기인 1871년 은본위제를 고수하던 독일이 금본위제로 이행하면서 금대세론은 굳어지게 됐다.

독일이 금본위제를 실시하면서 독일이 보유하던 다량의 은이 국제 시장에 나와 금 가격이 상승하고 은 가격의 하락을 초래한 것이다.

이보다 약간 앞서 대규모 금광도 발견됐지만 금은 은과는 전혀 다른 효과를 내게 된다. 1850년을 전후해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금광이 발견돼 금 가격이 하락했지만 대규모 은의 발견이 은본위제 퇴출을 가져온 것과 달리 금광 발견으로 금본위제가 위축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미국과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 통용되던 금은양본위제의 막을 내리게 했다.
[Golden Era of Gold] 가치의 척도, 금본위제의 기원과 소멸
금은양본위제는 금과 은의 가격비를 고정적으로 정해놓은 뒤 그에 연결해 화폐를 발행하는 것으로 국제 금은 시세가 자국에서의 가격비와 같거나 비슷해야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금광 발견으로 국제 시장에서 은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되면서 은은 해외로 유출되고 국내엔 금만 유통돼 사실상 자연스레 금본위제로 전환된 것이다.

결국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등 소위 프랑권 국가들이 1870년대 금본위제로 이행하게 되고 미국도 1900년에 금본위제를 채택하게 된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모두 급격히 생산이 늘었지만 은은 힘을 잃고, 금은 세력을 키운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19세기 후반 세계 제국을 구축하고 있던 영국의 힘이 있었다.

원래 중세부터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 영국은 은본위제 국가였다. 영국의 화폐 단위인 ‘파운드 스털링’은 스털링은의 무게를 재는 단위에서 기원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잉글랜드 중앙은행이 전비 조달에 전력하게 됐고 우여곡절 끝에 은본위제가 폐지되고 금본위제가 선택됐다.

이처럼 영국이 금본위제를 실시하게 된 뒤 1870년대 영국의 재정 지원을 받고자 하는 많은 나라들은 금본위제로의 이행을 서둘렀다. 또 이들과 교역을 하던 많은 나라들도 불이익을 줄이려고 금본위제를 택하게 됐다. 한마디로 금본위제가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데는 세계 경제를 선도하던 파운드 스털링의 공신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금본위제의 안정성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흔들리게 된다. 파운드에 기반한 안정은 무너지고 각국 시민들은 전시에도 화폐로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금을 확보하려고 서둘러 돈을 금으로 바꿨다.

이에 각국 정부는 서둘러 금태환을 중지하면서 자연스레 국제통화제도가 마비됐다. 각국 통화들이 금을 대리할 자격을 상실해간 것이다. 이와 함께 ‘금본위’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각국 정부는 금본위제를 지키려고 노력하는데, 영국과 러시아는 금의 생산을 높여 금 보유고를 높이는 정책을 펴게 된다. 당시 영국은 식민지인 남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금광을 최대한 이용하게 된다.

반면 대규모로 금이 산출되는 해외 식민지가 없는 프랑스와 독일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금을 애국적 호소와 함께 모아들여 부족분을 충당했다. 이렇게 모은 금이 웬만한 금광과 견줄 만했다고 전해진다.

독일은 또 벨기에와 루마니아 등 점령 지역에서 금을 몰수해 자국의 금본위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결국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와중인 1914년에 금본위제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고, 1931년에는 “더 이상 파운드화를 가져와도 바꿔줄 금이 없다”며 실제로 금을 지급하지 않기 시작했다. 영국의 뒤를 이어 1933년 미국도 금본위제를 폐지했다.

세계는 새로운 국제통화제도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서 44개국이 모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세계 경제 질서를 결정한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국제통화기금(IMF)을 중심으로 한 브레턴우즈 체제로 금 1온스가 35달러로 고정됐다.

달러 외에 다른 나라 통화는 달러에 고정됐다. 수천 년을 이어온 금속 중심의 통화 시스템에서 달러라는 특정 국가 화폐 중심의 통화 시스템이 확고히 뿌리 내리는 대변화의 순간이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