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류동 수라·원 마일 워킹

[Gourmet Report] 임금님 수라상에 ‘웃고’ 아찔하게 매운 국수에 ‘울고’
나라의 최고 ‘어른’을 모시는 상에 소홀할 수 없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하는 불문율이다. 전 청와대 대통령 주방장 출신이자 우리나라 7대 조리명장(條理明匠) 가운데 한 명인 문문술 명장과 요리 경력 40여 년을 자랑하는 수석 주방장들이 임금님 밥상 재현을 위해 ‘청류동 수라’에서 뭉쳤다.

자연 그대로, 재료 그대로, 손맛 그대로를 고집하는 청류동 수라의 밥상은 건강식 그대로다. 출출할 때 머리 위 유리천장으로 물길이 지나는 테라스에서 후루룩 국수 한 그릇 더한다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트렌드세터들의 아레나(arena)랄 수 있는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 먹을거리(食)에서 입을 거리(依)까지 수입산 명품들에 정복당한 ‘특별구역’에 지난 7월, 다소 ‘튀는’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다.

압구정 일대에 즐비한 국적 있는, 혹은 국적 없는 외래 음식에 우리 전통 한식으로 출사표를 던진 ‘청류동 수라’가 바로 그곳. ‘한정식=부담’이라는 공식을 깨고, 트렌드에 맞는 현대적 코스요리를 제안하며 폭넓은 연령대의 고객을 흡수하고 있다.

조리명장이 제안하는 한결 ‘가벼워진’ 임금님 밥상, 대통령 밥상을 경험하는 장소 역시 묵직한 한옥 대문이 없어 부담 없다. 발레파킹까지 할 수 있으니 가히 현대적이다.

도심 속에서 받는 ‘대통령 밥상’, 청류동 수라

청류동 수라는 올 초 전 청와대 수석 주방장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식사와 국빈 만찬을 진두지휘한 문문술 조리명장이 합류하면서 화제가 됐다. 압구정점은 청류동 수라가 세 번째 선보이는 야심작.

한식조리 40여 년의 커리어를 자랑하는 한식의 달인 김남철·김우영 주방장이 근대적인 조리법과 프레젠테이션을 개발, 보다 넓고 빠른 보폭으로 압구정 사람들에게 한식을 즐기는 새로운 ‘코드’를 제시하고 있다.

맛집 얘기에 긴 설명이 필요하랴. 메뉴판을 펼쳐 들고 요리를 부탁했다. 아래층 국수카페 주방까지 합치면 조리사만 20명이란 얘기에 입이 쩍 벌어지는 사이 부탁한 음식들이 순서대로 등장했다.

젓가락이 먼저 향한 곳은 ‘명장 한정식’. “한국인을 위한 코스요리는 총량 550g 정도가 적당하다”는 김우영 주방장의 설명을 들었던 터라 시작부터 허기를 달래려 서두르진 않았다.

코스는 서양처럼 죽으로 출발한다. 흑임자죽, 전복죽, 잣죽, 호박죽, 표고버섯죽 등 계절별로 그때그때 바꾸어 서브되는데, 생선의 물이 좋을 때는 어죽도 맛볼 수 있다. 죽으로 공복이던 위를 살짝 ‘위로(慰勞)’하고 나니 샐러드가 이어진다.

일반 샐러드에 비해 과일 함량이 많은 드레싱은 청류동 수라가 고집하는 ‘자연 그대로의 맛’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 새콤달콤 오롯이 신선한 자연에 ‘의존’하며 혀가 한창 즐거운 시간이 지나면 차돌박이 영양부추가 애피타이저로 나온다.
[Gourmet Report] 임금님 수라상에 ‘웃고’ 아찔하게 매운 국수에 ‘울고’
육류와 채소의 궁합이 이보다 더 환상적일 수 있을까. 낙지초회와 갈비찜이 이어지고 나면 청류동 수라의 자랑거리인 국수가 등장하는데, 한 가지만 먹으라면 섭섭할까 봐 온면과 냉면이 사이좋게 하나씩 들어온다.

하지만 국수로 배를 그득히 채우면 곤란하다. 네 가지 찬과 함께 밥, 전골이 이어지기 때문. 그런데 곰탕육수에 여러 가지 전을 넣어 구수한 냄새가 일품인 전유어 전골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포만감을 저만치 밀어냈다. 진하디진하게 ‘삭은’ 국물 맛은 미각을 ‘완전히’ 충족시켰다.

귀한 손님을 모시는 날이 아니라면 다소 가벼운 ‘산더덕구이 밥상’이나 ‘간장게장 반상’도 좋겠다. 점심특선을 제외한 정식 모두 제공되는 청류동 수라만의 가마솥 밥만으로도 밥상이 달라진다. 수백 번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성공했다는 가마솥밥은 한 알 한 알이 말 그대로 ‘살아있다’. 전기밥솥에 밥 짓기를 양보해버린 시대, ‘밥’ 먹는 즐거움을 재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국수와 맥주의 ‘묘한’ 조화, 원 마일 워킹

청류동 수라의 층계를 따라 내려오면 소담한 분위기의 국수 카페 ‘원 마일 워킹(One Mile Walking)’을 만난다. ‘햇살 아래 산책 같은 국수 카페’라는 슬로건이 말해주듯 동네 산책길에 우연히 마주치는 편한 디저트 카페다. 청류동 수라의 ‘국숫집’이라면 이해가 될 듯.

단, 일반 디저트 카페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 끼 요기로 충분한 국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라도의 ‘쑥된장국수’, ‘시골김치국수’를 비롯해 충청도의 ‘호박국수’ 등 전국 팔도의 내로라하는 대표 국수들을 전통 그대로 맛볼 수 있다.
[Gourmet Report] 임금님 수라상에 ‘웃고’ 아찔하게 매운 국수에 ‘울고’
또 하나의 차이점을 들자면 일반 국수 면이 아닌 호박 면을 사용한다는 점. 애호박에서 단호박까지 갖은 호박을 넣은 노르스름한 호박 면은 호박 함량이 40%에 달한다고 한다.

국수 카페 메뉴를 들어든 순간도 머릿속에 이는 갈등을 달래기가 어려웠다. 결국 ‘제발 나를 골라주십사’하며 유혹(?)하는 이름들 앞에 무릎을 꿇고, ‘4종 세트’를 선택했다. 소담한 그릇에 담긴 네 개의 개성 있는 국수가 같은 쟁반에 놓여 등장한다.

젓가락의 갈등은 다시 시작됐고, 고민 끝에 가장 순한 맛부터 시도해 보기로 한다. 대표 메뉴랄 수 있는 호박국수는 생각보다 쫄깃쫄깃한 식감이 무엇보다 반갑다. 면은 씹을수록 고소한데, ‘삭은’ 육수 맛이 더해져 일품이다.

배가 불러오기 전에 젓가락을 얼른 콩국수로 옮겼다. 비릿한 맛도, 냄새도 없이 깔끔한 콩국수는 유통기간 1일이라는 철칙을 고수한 덕분인지 신선한 느낌마저 들었다. 다음은 원 마일 워킹의 베스트셀러인 ‘연천비빔국수’. 양념의 50%가 배와 사과라는데, 백김치 국물까지 더해져 국물 맛이 시원하기 그지없다.

시원, 달콤한 맛에 매콤하기까지 하니 입맛을 돋우기에는 최고겠다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옆 테이블의 손님들이 국수에 ‘호가든’ 맥주를 시킨다. 혀를 말아 호호 불면서도 자꾸만 손이 가니 그야말로 ‘맥주를 부르는 국수’ 아닌가.

매운맛에 흥분된 혀는 마지막 선택을 기다린 ‘시골김치국수’가 달래준다. 푹 삭은 묵은지를 넣어 구수하고 깊은 맛이 갑작스럽게 찾아간 친구집서 어머니께서 찬이 별달리 없다며 있는 김치로 뚝딱 끓여내 주는 야참 국수처럼 정겹다.

잘 익은 김치에 생수를 넣고 1시간 이상 볶아낸 김치육수가 깊은 맛의 비밀. 고기가 빠져 허전한 남성들에겐 매콤, 달콤, 새콤한 비빔국수에 잘 구운 돼지갈비를 얹은 ‘갈비비빔국수’가 ‘딱’이다. 든든한 한 끼로 손색이 없다.

원 마일 워킹은 아무래도 공복 시에 찾는 것이 낫겠다. 맛 좋기로 소문난 커피를 마시러 갔다가 옆 테이블에서 넘어오는 매콤한 국수 냄새에 ‘여기요!’를 외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 정신 번쩍 차리고 싶은 사람에겐 매운 떡볶이도 강추다. ‘먹고’ 산다는 것, 참 지긋지긋하면서도 순간순간 짜릿한, 묘한 맛이다.

글 장헌주·사진 서범세 기자 c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