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ic History of Gold_금의 경제사

글로벌 경제위기, 유럽 재정위기, 제3차 환율대전을 거치면서 금의 가치가 치솟고 있다. 최근 몇 달간 연일 금값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는 ‘골드 랠리’가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다.

금값은 내년 6월이면 온스당 1450∼1600달러까지 치솟을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는 가운데 짐 로저스처럼 온스당 2000달러를 내다보는 시각도 있다.

지난해 이맘때 온스당 1062달러를 기록하면서 ‘금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외신들이 부산을 떤 것은 이제 ‘호들갑’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금값이 끝을 모르고 치솟는 이유로는 우선 미국과 일본이 앞 다퉈 공급하는 풍부한 유동자금이 실물자산 투자에 쏠리고 있는 점이 꼽힌다.

통화가치 하락과 인플레이션을 우려한 투자자들이 ‘절대통화’로 여겨지는 금으로 쏠리면서 사재기가 가열되는 양상이다. 언제나 변함없이 반짝이지만, 위기 시에 더욱 사람들 눈에 띄는 금의 속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셈이다.
[Golden Era of Gold] 황금, 영원히 빛나는 ‘절대가치’의 역사
인류사를 관통한 ‘절대가치’ 황금

영원불멸하고 안정적이며 희소성 있는 금은 30여 년간 세계 기축통화로 위세를 떨쳤던 달러를 제치고 이제 권좌에 완전히 복귀한 듯한 인상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인류 역사의 핵심엔 항상 금이 있었다.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고상한 명분과 목적 이면에는 금에 대한 탐욕이 자리했다.
[Golden Era of Gold] 황금, 영원히 빛나는 ‘절대가치’의 역사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을 시행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페르세폴리스에 산처럼 쌓여 있다는 막대한 금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기독교 국교화를 선언한 ‘밀라노 칙령’의 이면에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금에 대한 갈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많은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속국이 조공으로 바치는 금이나, 로마제국 내 광산에서 캐낸 금으로 재정을 감당할 수 없자 제우스 등 로마의 신들을 모신 신전의 금을 활용하기 위해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는 설명이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제국 각지에 산재해 있던 신전의 금을 징발해 재정을 충당했고 당시 등장한 솔리두스 금화는 700여 년간 지중해 지역의 기축통화가 됐다. 중세 유럽의 십자군 원정도 ‘금에 대한 탐욕’에서 시작됐다는 시각도 있다.

처음엔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로부터 탈환하겠다는 순수한 종교적 열정에서 시작됐지만 11세기부터 3세기 동안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랍의 풍부한 금을 손에 넣기 위한 봉건 영주들의 탐욕이었다.

실제 제4차 십자군은 아랍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의 핵심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막대한 금과 각종 부를 약탈하기도 했다. 중세 유럽에서도 사람들은 금을 만들기 위해 연금술에 목숨을 걸기까지 했으며 금이 넘치는 세상을 꿈꿨다. 토머스 무어의 <유토피아>에 나오는 이상향에는 금이 넘쳐나는 것으로 묘사됐다.
[Golden Era of Gold] 황금, 영원히 빛나는 ‘절대가치’의 역사
잘 알려져 있다시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된 계기도 금 때문이었다. 지독한 ‘황금광(狂)’이었던 그는 탐험가 마르코 폴로가 전설의 황금섬으로 소개한 지팡구(일본)를 찾아 여러 섬을 전전했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뒤 그는 “신대륙에서 발견한 금의 10%를 갖겠다”는 자신의 뜻을 스페인 황제가 꺾어버리자 불같이 화를 낼 정도로 황금에 집착했다.

영국의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과 대립해 1534년 국교를 성공회로 바꾼 배경에도 어김없이 금이 있었다. 헨리 8세는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을 대거 폐쇄하고 재산을 압류하면서 성당 소유의 금을 대거 뺏은 뒤 해군 건설에 투입했다. 근대에 들어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가 도시로 모습을 갖추게 된 배경도 모두 금을 찾는 인간의 갈망 때문이었다.

금력은 국력?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인간은 금을 추구해왔고, 금을 많이 보유한 금력(金力)은 곧 국력이 돼왔다. 고대 이집트, 히타이트, 스키타이에서부터 아테네, 로마제국, 사산조 페르시아, 무굴제국, 잉카제국, 합스부르크제국, 스페인, 대영제국, 제정 러시아, 나치 독일 모두 금과 은에 대한 탐욕에선 둘째라면 서운해 할 국가 및 민족들이다. 인류가 이처럼 금에 집착한 이유는 바로 금이 매우 희귀한 금속이기 때문. 금은 바위 250톤을 파헤쳐야 1온스가 나올 정도로 희소하다.

이에 따라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 세계적으로 생산된 금은 15만8000톤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생산될 수 있는 금의 추정량은 6만∼7만 톤으로 생산량은 점차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대략 기원전 1500년경부터 인간이 본격적으로 금을 갈망해온 것으로 분석한다.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전까지 금은 여러 장신구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이다. 금에 남다른 가치를 부여한 첫 민족은 고대 이집트인들로 알려져 있다.

투탕카멘의 황금유물 등에서 이집트인들의 금에 대한 열망과 금을 다루는 정교한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해외 무역에서도 금을 교환 매개로 사용했다. 영국 금융학자 글린 데이비스는 “이집트인들이 언어와 문화, 인종이 다른 사람들도 금을 알아보고 기꺼이 물건 값으로 받아들이는 점을 보면서 ‘금=부(富)’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금을 주고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간에게 금에 대한 욕망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후 이집트와 대립했던 히타이트, 고대 중앙아시아의 지배자 스키타이, 지중해 상권의 지배자 페니키아 등이 모두 금의 소유를 놓고 경쟁을 벌였고, 이에 따라 금의 지위는 계속 상승했다.
[Golden Era of Gold] 황금, 영원히 빛나는 ‘절대가치’의 역사
동양에선 기원전 1091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금이 법정 화폐로 인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꾸준히 귀금속의 대명사로 대접받던 금은 16세기에 들어선 인구나 군대, 농업 생산력보다 더 중요한 국력의 원천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즉 중금주의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당시 페르난도 스페인 왕을 비롯한 서유럽 군주들은 금을 한 조각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대서양 너머에 군대를 파견했다.

산업혁명 이후 금이 국부의 원천이라기보다는 통화가치의 안전판으로 위상이 바뀐 이후에도 주요 강대국들은 금 보유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 세계 10대 금 보유국을 살펴보면 여전히 ‘금력=국력’이란 공식이 성립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올 6월 말 현재 8133.5톤의 금을 보유하고 있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도 금 보유 최상위권 국가로 금력 키우기에 한창이다. 지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금 생산국으로 떠오른 중국은 자국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금을 공격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중국의 금 보유량은 1054.1톤으로 세계 6위에 해당한다. <화폐전쟁>의 저자인 중국의 쑹훙빙(宋鴻兵)은 “금에 기초하지 않은 화폐는 쇠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말할 정도로 금은 현대사회에서도 권력의 원천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금에 대한 집착을 비판했다. “한 나라의 부유함은 귀금속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국민이 소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게 그의 일갈이었다.

하지만 스미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인류는 금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며 역사를 써왔다. 문제는 현재 채굴이 쉬운 곳에 매장된 금은 대부분 캐낸 상태라는 점이다. 황금을 향한 인류의 욕망과 경쟁이 더욱 거세지고, 금은 점점 부족해지고 있는 21세기에는 과연 어떤 역사가 펼쳐질지 주목된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