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연습은 배부른 ‘유희(遊戱)’를 선사한다
깔끔한 화이트셔츠, 투 톤 컬러 매치가 돋보이는 카디건, 브라운 팬츠, 도트 프린트 타이, 카키 컬러의 트렌치 코트 모두 Daks , 레오파드 프레임이 돋보이는 안경, Dolce&Gabbana
깔끔한 화이트셔츠, 투 톤 컬러 매치가 돋보이는 카디건, 브라운 팬츠, 도트 프린트 타이, 카키 컬러의 트렌치 코트 모두 Daks , 레오파드 프레임이 돋보이는 안경, Dolce&Gabbana
한국과 중국을 징검다리 건너듯 오가는 그의 발목을 잡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군 제대 후 네 번째로 만난 작품 <추노>는 시청률 대박을 이루며 장혁이라는 배우의‘재기’에 마침표를 찍은, 인생의‘기적’처럼 고마운 작품이다.

지금 그는, 대한민국 톱스타 가운데 한 명이자 중국과 일본 여성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한류스타다. 군 입대 문제에 유난히 예민한 대한민국 시청자들로부터 아킬레스건에 치명적 공격을 받았던 그를 우리가 용서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이거 아니면 죽는다’고 사정없이 달려드는, 서슬 퍼런 연기자로서의 치열함 때문이다. 지난 9월 중국 절강TV에서 방영하자마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드라마 <애상여주파>(愛上女主播)의 촬영장에서도 그는 소름 돋는 집념을 보였다. 자신의 한국어 대사는 기본이고 상대역의 중국어 대사까지, 대본을 아예 통째로 외워버린 그에게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저는 한국말로 하지만 상대 배우는 중국말로 대사를 하는데 중국어를 모르니까 외우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라도 해야 감정선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어떤 작품이건 캐스팅이 결정되면 크랭크인 되기 전에 100번, 촬영 때마다 대본을 또다시 100번은 연습해야 직성이 풀린다. 같은 대사를 100여 차례나 내뱉어도, 뱉을 때마다 변모하는 에너지를 느끼는 짜릿한 감정은 ‘유희’에 가깝다. 자신에게 ‘까칠할수록’ 배우 장혁은 배가 부르다.

삶의 긍정(肯定)과 부정(否定), 그 접선에서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블랙 슈트와, 그레이 셔츠, 프린트가 인상적인 타이 모두 Giorgio Armani, 블랙 레더 스트랩의 세련된 워치는 Piaget Emperador Cousin Large Moon
깔끔하면서도 세련된 블랙 슈트와, 그레이 셔츠, 프린트가 인상적인 타이 모두 Giorgio Armani, 블랙 레더 스트랩의 세련된 워치는 Piaget Emperador Cousin Large Moon
‘120번의 오디션.’

질문의 키워드를 받자마자 그는 양해를 구하고 담배부터 물었다. 1996년 데뷔작이던 <모델> 이후 시쳇말로 ‘빛을 못 봤던’ 시절이 오버랩 돼서일까.

“연기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했었죠. 1997년, 외환위기 때였어요. 대학 재학 중이었는데, 대기업에 다니던 아버지께서 쓰러지시면서 졸지에 가장 역할까지 떠맡았죠. 스물두세 살 때였는데, 서른다섯인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너무 늦은 나이에 연기를 시작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고요.

1년 가까이 100번 넘게 떨어졌으니까 오디션이란 오디션엔 다 갔다고 하면 맞을 거예요. 워낙 일이 안 풀리니 부정만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부정의 끝에서 긍정으로 돌아서게 됐어요.

어차피 떨어질 거 객기나 부려보고 떨어져야겠다 싶어 오디션에서 있는 거 없는 거 다 보여줬었죠.(웃음) 정말 사면초가였거든요. 장남으로서 동생 공부도 시켜야 했던 터라 돈이 절실했어요.”
화이트 셔츠, 세련된 패턴의 니트 카디건, 브라운 재킷 모두 Daks
화이트 셔츠, 세련된 패턴의 니트 카디건, 브라운 재킷 모두 Daks
그러던 차에 그룹 ‘지오디(GOD)’의 뮤직비디오 촬영 의뢰가 들어왔다. 그것을 계기로 <학교>라는 TV 드라마를 하게 됐고, <사랑해 사랑해>, <불한당> 등의 드라마와 <화산고>,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 등의 영화에 연이어 캐스팅되면서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연기자가 그렇듯, 그의 데뷔 연도는 1996년, ‘각광 연도’는 3년 후인 1999년이다.

켜켜이 쌓이는 경험에 감사하며
네이비 베스트, 팬츠, 코트 모두 Brioni, 화이트 스트라이프 셔츠 Alfred Dunhill, 블랙 벨벳 머플러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네이비 베스트, 팬츠, 코트 모두 Brioni, 화이트 스트라이프 셔츠 Alfred Dunhill, 블랙 벨벳 머플러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망각이 완료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도 거역할 수 없는 세상 이치다.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추노>는 지난 3월에 막을 내렸지만, 아직도 ‘장혁’하면 <추노>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한동안은 액션물로 다시 가고 싶진 않아요. 추우면 집으로 들어가고, 집이 더우면 밖으로 나와야 하듯 <추노>의‘이대길’이 캐릭터가 강했던 만큼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도 제가 해야 할 몫이죠.”

작품마다 새로 대면해야 하는 페르소나는 연기자에게는 넘어야 할 산이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인간은 시간이 진행하는 방향을 따라 나이도 들고 경험치도 쌓인다는 사실이다. 배우인 그도 보통사람들이 밟는 궤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어린 나이에 가장이라는 ‘멍에’도 짊어져 봤고, 결혼을 했으며,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됐다.

연기자로서 시청률 최고의 드라마와 최저의 드라마도 경험했다. 물리적인 숫자로 채워지지 않아 비어있던 연기의 공간도 점차 밀도가 높아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겠다.

“동양인 연기자들이 약한 것이 퍼포먼스랄 수 있어요. 김수로 형이 권해서 10년 전부터 브루스 리가 창안한 절권도를 하고 있어요. 절권도는 액션과 리액션의 리듬감을 익히는 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승마도 했었고 복싱은 얼마 전에 다시 시작했어요.”
중후한 멋이 느껴지는 재킷, 니트, 팬츠 모두 Boss, 겉에 살짝 걸친 케이프 John Galliano
중후한 멋이 느껴지는 재킷, 니트, 팬츠 모두 Boss, 겉에 살짝 걸친 케이프 John Galliano
강한 카리스마 이면에 감춰진 부드럽고 유머러스한 면을 발견했을 즈음 그는 <무릎팍 도사>에 꼭 한 번 나가야 한다며 껄껄 웃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힘들 때, 의지할 곳이 간절할 때도 있으리라.

“힘들 땐 영화 <록키> 1편을 봐요. 연기하기 전에 운동을 했었는데, 그때부터 자주 봤던 영화죠. 스포츠맨 정신이랄까요. <록키> 배경음악 아시죠? 그 음악 나오면 에너지를 얻죠. 1편도 좋지만 딸과 함께 나오는 2편도 아주 좋아해요.”

그에게 고마운 것이 하나 있다. 촬영 콘셉트인 ‘대부(代父)’로의 변신이 맞춤 양복을 입은 듯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콘셉트를 전해 듣고 또 얼마나 ‘알파치노’를 고민했을지, 촬영장에서 그의 아우라가 말해주고 있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왼쪽·오른쪽) 퍼플과 화이트 컬러의 조화가 돋보이는 셔츠와 행커치프 모두 Nina Ricci, 화이트 도트 패턴의 네이비 타이 Alfred Dunhill, 세련된 체크 패턴의 수트 S.T.Dupont
(왼쪽·오른쪽) 퍼플과 화이트 컬러의 조화가 돋보이는 셔츠와 행커치프 모두 Nina Ricci, 화이트 도트 패턴의 네이비 타이 Alfred Dunhill, 세련된 체크 패턴의 수트 S.T.Dupont
“제 연기의 스펙트럼이라…. 어디서 어디까지로 선을 긋는다기보다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무조건 확장시켜야 하는 연기자로서의 숙제라고 생각해요. 배우는 크게 이성적인 배우와 감성적인 배우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작품이 내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인지 철저하게 분석해서 결정하는 타입이랄 수 있어요.

후자는 작품을 둘러싼 조건보다는 함께 작품을 하는 스태프들과의 소통 같은 것을 더 중요시 여기는 타입이죠. 저는 이성적인 배우에서 감성적인 배우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아요.”

작품을 만들어가는 현장에서의 ‘축제’를 즐기지 못했던 과거에 비해 지금은 배우인 자신과 대본, 작품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보다 유연한 소통이 가능해졌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정의 접지력’이 좋아졌다.

접지력이 탁월한 배우라면, 급커브를 맞닥뜨린다 해도 전복될 위험은 없을 것이다. 가끔, 아니 매일 가는 세월을 탓하기보다 감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고 싶으나 할 수 없었던 캐릭터들을 더욱 다양하게 보담을 수 있게 된 지금,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배우일 터다. 아내를 위해 분리수거를 대신하며 소소한 일상의 재미를 맛보는 그는 또한 행복한 ‘보통사람’일 게다.

맡은 캐릭터에는 관대하나, 연기자인 자신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엄격한 연기자 장혁을 화면으로 만나는 우리도 분명 행복한 시청자이리라.


Editor 장헌주, 박진아 Photographer 김유철(FIESTA Studio) Stylist 성문석 Hair & Makeup 이순철·오희진(순수)
Cooperation Alfred Dunhill(02-3440-5615), Boss(031-548-8608), Brioni(02-516-9686), Daks(1544-5114), Dolce&Gabbana(02-545-3517), Giorgio Armani (02-3440-1234), John Galliano(02-3018-1010), Luxottica(02-3444-1708), Nina Ricci(02-6905-3471), Piaget(02-3467-8924), S.T.Dupont(02-2106-35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