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식물원의 원조 이택주 (재)한택식물원 원장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한택식물원은 국내외 희귀종 식물의 보고다. 환경부가 희귀식물 보전지구로 지정하기까지에는 이택주 원장의 33년의 집념과 애환이 있었다. 자연보호 활동에 대한 기여로 지난 10월 국민포장을 받은 이 원장을 용인 한택식물원에서 만났다.

경기도 용인 비봉 산기슭에 자리한 한택식물원은 20만 평의 터에 자리 잡은 동양 최대의 식물원이다. 사계절 생명의 기운이 약동하는 이곳은 봄에는 목련, 벚꽃, 모란, 작약 등이 봄꽃 축제를 열고, 여름이면 산수국, 비비추, 원추리꽃 등이 수채화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단풍이 깊어지는 가을에는 구절초가 무리지어 피어나고, 겨울이면 눈꽃이 선홍빛 낙상홍 열매 위로 내려앉는다.

용인과 안성의 경계에 터를 잡은 한택식물원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영동고속도로 용인나들목을 나와 굽이굽이 시골길을 한참을 달려야 했다. 시골 풍경의 끝, 연잎무리와 가지런한 산림이 시작되는 곳이 한택식물원이었다.
[Special]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나는 식물원을 남긴다”
식물 보존이 자연환경 보존의 출발

식물원 입구에서는 일행을 맞은 이는 이용문 기획이사였다. 이택주 원장의 아들인 그는 가업을 잇기 위해 10여 년 전 한택식물원에 합류했다.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운 이 원장을 대신해 그는 한택식물원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를 했다.

한택식물원에는 35개의 테마 정원과 8개의 재배 온실이 있다. 한택식물원의 심장에 해당하는 자연생태원은 계곡물이 자연적으로 습도를 맞춰주고 토양은 배수가 잘 되는 부식토나 점질 양토로 생육 환경이 최적화된 곳이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한여름에도 해가림을 해주어 반그늘 상태를 만들어준다. 식재된 식물만 1000여 종에 이른다.

“보시기에 보통 야산 같지만, 사실 저게 어려운 일입니다. 인공적으로 조성했지만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거든요. 외국의 식물학자들도 자연생태원을 보고 감탄하더라고요.”

자연생태원에서 알 수 있듯이 한택식물원은 ‘식물을 위한 식물원’을 표방한다. 일반적인 식물원이나 수목원, 친환경을 내세우는 상업적인 리조트 등과 차원이 다르다. 이 이사는 한택식물원은 공원이나 유원지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가 건넨 한택식물원 리플릿을 읽으며 설명을 듣는 사이 이 원장이 인터뷰 장소에 들어섰다. 훤칠한 키의 노신사인 그는 이 이사의 말을 이었다.

식물원의 역할은 그 기후대에 적응할 수 있는 식물종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이다. 고유한 유전자를 보유한 식물 기본종(wild plants)을 확보하는 것이 식물원의 주요 기능이다. 세계 유명 식물원들은 대부분 이 목적에 충실하다. 대표적인 게 영국 큐 왕립식물원(Royal Botanic Gardens, Kew)인데, 이곳에는 2만50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식물이 중요한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종의 다양성에 대한 기여입니다. 식물종이 다양해야 동물종이 다양해집니다. 호랑나비를 예로 볼까요. 호랑나비도 종류에 따라 산초나물, 족두리풀, 기린초 등 먹이가 다 다릅니다. 만약에 족두리풀이 없다면 모시호랑나비가 존재할 수 없는 거죠. 이처럼 식물을 보존하는 게 자연환경 보존의 기본입니다.”

자생식물 찾아 휴전선에서 한라산까지
[Special]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나는 식물원을 남긴다”
오전 내내 식물원에서 일을 했다는 그에게는 달큼한 흙내음이 풍겼다. 모자를 벗고 자리에 앉은 그의 모습은 학자와 농부의 풍모가 함께 엿보였다. 37년간 한택식물원과 함께 한 사람답게 입매가 무척 고집스러워 보였다.

그가 한택식물원을 조성한 것은 1979년부터다. 이 원장의 원래 꿈은 광활한 초지 위에 소가 뛰어노는 농장을 갖는 것이었다. 1970년대 유행했던 미국 TV 드라마 <초원의 집>을 보며 그는 농장주의 꿈을 키웠던 것이다.

그 꿈을 위해 그는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후 건설 현장을 누볐다. 토목으로 제법 큰돈을 만지게 된 그는 고향인 용인에 땅을 사들였다. 그 위에 초지를 가꾸고 200여 두의 소를 방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꿈 실현이 가까운 듯싶었다. 하지만 소 파동으로 소 값이 곤두박질치면서 그의 꿈도 멀어졌다. 낙농으로 진 빚을 갚기 위해 처음에는 조경용 나무를 심다 식물에 매료됐다.

“소 파동 이후에 유럽으로 견학을 가게 됐어요. 그런데 가는 도시마다 대학을 중심으로 보타닉가든을 갖추고 있더군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어요. 기초과학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식물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식물원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당시 유엔 가입국 중에서 식물원이 없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어요.”

북한만 해도 식물원이 두 개나 있었고, 한국보다 가난한 아프리카와 남미 국가들도 식물원이 있었다. 이런 사실에 자극을 받아 이 원장은 본격적으로 식물원 조성에 나섰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외래 식물은 돈만 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지만, 토종 식물은 구할 길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는 식물을 재배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일제시대에 나온 식물 관련 서적을 밤새 뒤졌고, 외국 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전문 서적에 매달렸다. 공부를 하는 틈틈이 전국을 돌며 자생식물을 찾아 다녔다.

휴전선에서 한라산까지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암벽에서 굴러 목숨을 잃을 뻔 한 일도 숱했다. 식물을 구하기 위한 노력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고 중국, 티베트, 몽골 등지까지 이어졌다.

북한 식물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명색이 한국의 식물원인데, 북한에서 자라는 식물을 빠뜨릴 수는 없었다. 당시는 북한 입국이 원천적으로 막혀있던 때였다. 직접 북한에 들어가는 대신 중국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중국 최고라는 ‘북경식물원’에 웬만한 북한 식물은 다 있었다. 삼고초려를 마다하지 않는 그의 정성에 북경식물원도 감복해 결국, 1990년대 초반 한택식물원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현재 한택식물원에서 자라는 북한 식물은 북경식물원을 통해 들여온 것이다.

현재 그의 식물원에는 총 9000여 종, 약 900만 본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이 중 자생식물이 2400여 종(초본식물 1700여 종, 목본식물 700여 종), 외래 식물이 6600여 종이다. 외래 식물은 외국 종자회사에 종신회원으로 가입한 뒤 종당 200만∼300만 원씩 주고 구입한 것도 많다. 이 원장은 외국 종자를 사는 데만 수억 원이 들었다고 했다.
[Special]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나는 식물원을 남긴다”
땅값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들인 돈만 약 120억 원

물론 식물원을 포기하려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돈 나올 구석이 안 보이는 식물에 미쳐있는 그를 고향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 취급했다. 친구들도 그에게 다른 일을 해보라고 권했다.

“실제로 1980년대 말부터는 그만두려고 심각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애쓴 게 아까워서 그만두질 못하겠더군요. 그런데 참, 운명이란 게 있긴 있나 봅니다. 1990년대 초반 한국과 일본이 생물종 다양성에 대한 협약에 가입하면서 식물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습니다.

특히 일본에서 야생화 붐이 일었는데, 그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야생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겁니다. 그런데 야생화를 소개하려는데, 마땅한 곳이 저희밖에 없었던 겁니다.

신문과 방송을 타면서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죠. 식물학 박사와 고위 관료들이 와서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우쭐해져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2000년에는 식물원을 후대까지 이어가기 위해 재단법인화했고, 2003년 일반에 정식으로 개방했다. 현재 일반에게 공개되는 곳은 전체 20만 평 중 7만여 평이다. 이 원장은 나머지 13만 평은 일반에게 공개되는 7만 평을 백업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04년 사립 식물원으로는 이례적으로 식물연구소를 개원했다. 식물연구소는 울릉도 고추냉이, 설악산 설악눈주목, 주왕산 둥근잎꿩의비름 등의 자생지 복원사업을 하고, 여기서 얻은 대량 번식 기술을 바탕으로 멸종 희귀보호식물의 연구와 기술 보급에 앞장서온 한택식물원의 노하우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곳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자생식물의 채소화, 약용식물의 개발, 자생식물 관리 지침서 등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다.

한택식물원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이 원장을 부러워한다. 대기업 임원 중에는 한택식물원을 보고 ‘우리도 한 번 해보자’며 의욕을 불태우기도 했다. 하지만 사업성을 따져보고는 모두 손을 든다.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기업체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식물원에 들인 돈만 약 120억 원입니다. 땅값을 빼고 그 정도가 들었습니다. 그게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래도 지금 저에게 ‘다시 태어나도 식물원을 만들겠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 겁니다.

길도 안 좋은데 1년에 약 20만 명이 저희 식물원을 찾습니다. 봄에 구불구불한 길에 길게 늘어선 관람객들을 보면 보람을 느끼죠. 무엇보다 제가 죽더라도 식물원 하나는 남을 테니까요.”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