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 on…] 진정한 강국의 조건
어렸을 때 바둑을 배운 사람들은 대부분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바둑의 최하급을 18급이라고 부르는데, 바둑을 열심히 배운 사람은 대개 3개월이면 18급에서 6급 정도까지 거뜬히 올라온다.

보통 그때 ‘내가 혹시 바둑의 천재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 환상은 곧 깨진다. 6급에서 5급까지는 3개월의 두 배인 6개월이 걸리고, 거기서 4급까지 오르려면 1년쯤이 필요하다.

게다가 3급쯤 되면 아무리 열심히 바둑을 둬도 실력이 더 이상 늘지 않고 ‘영원한 3급’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결국 나는 바둑의 천재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따지고 보면 바둑만 그런 게 아니다. 골프, 당구, 볼링 같은 스포츠도 처음 배울 때는 단기간에 무섭게 실력이 늘어 일찌감치 배우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진작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박 과장은 내 밥일 텐데.” 하지만 어느 정도의 단계에 오른 뒤에는 성장률이 크게 둔화되고 결국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실력이 거의 늘지 않는 시점에 도달하게 마련이다.

사회나 국가의 발전 과정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제3세계 국가들의 성장 과정이 잘 보여주듯이 어느 국가든 경제 개발을 시작한 초기에는 수십 퍼센트의 엄청난 경제성장률을 보이다가도 그 단계가 지나면 성장률이 점차 낮아진다. 좋게 보면 안정기에 접어든 것이지만 얼마 전까지의 눈부신 성장에 익숙한 정책 입안자나 국민이 느끼는 박탈감은 크다.

그러나 실은 바로 그 시점이 진정한 승자, 진짜 강자로 올라설 수 있는 계기다. 바둑에서 성장이 둔화되는 임계점에 도달한 사람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물론 거기서 포기하는 사람은 논외다).

성장이 더딘 이유를 긴장이 풀어진 탓으로 여기고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노력을 배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 전환을 도모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노력을 배가하기로 결정한 사람은 대부분 ‘영원한 3급’에 주저앉고 만다.

과학사가인 토머스 쿤(Thomas Kuhn)이 널리 유행시킨 패러다임의 개념에 따르면, 과학혁명은 진화적인 방식이 아니라 단절적인 방식으로 전개된다. 예컨대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은 뉴턴의 물리학을 계승한 게 아니라 물리학의 틀 자체를 바꾼 결과다. 양자역학도 마찬가지로 상대성이론의 계승이 아니라 부정과 단절을 통해 탄생했다.

이렇게 과학혁명으로 과학의 패러다임이 달라지고 나면 그 틀 내에서의 세부적인 발전은 다시 정상적이고 연속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왕이 공사(工事)에 착수하면 비로소 일꾼들에게 할 일이 생긴다.”

독일의 시인 실러가 철학자 칸트를 가리켜 한 말인데, 패러다임의 개념이 과학만이 아니라 모든 부문에 적용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칸트 같은 대철학자가 철학의 새로운 체계를 구성해놓으면 주석자들이 달려들어 내용을 풍요롭게 한다는 뜻이다.

‘영원한 3급’의 굴레는 곧 패러다임이 달라져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질곡에서 벗어나려면 기존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바꿔야 한다. 사회와 국가에도 같은 도식이 적용된다.

경제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국가나 사회가 진정한 강국, 참된 선진국의 대열에 오르려면 과거와의 확실한 단절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강국의 의미도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강국은 외형적·수치적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보통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을수록 강국으로 간주된다. 땅이 넓고 인구가 많으면 그만큼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하다. 이런 외형상의 특징은 흔히 수치로 표시된다.

이를테면 국내총생산(GDP)이 얼마라든가, 고속도로나 철도, 항만, 나아가 인터넷 회선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사회간접자본(SOC)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느냐는 등의 수치가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다 ‘3급’까지 되는 데 필요한 요소다.

한 국가가 ‘영원한 3급’을 넘어 ‘강1급(골프로 치면 싱글핸디)’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강국의 기준에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이 단계에 필요한 새로운 기준은 바로 디그니티(dignity)다.

영어인 디그니티는 보통 ‘존엄성’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자존심’이나 ‘체면’을 뜻하기도 한다. 본래 좋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므로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허식적인 체면’이 아니라 품위와 기품을 갖춘 자존심과 체면을 가리킨다.

개인적 품성과 관련된 디그니티의 용도를 확장하면 한 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다. 나라도 일종의 법인(法人)인 만큼 자존심과 체면이 있을 테니까.

개인의 디그니티에 살아온 내력이 반영돼 있듯이 국가의 디그니티도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다. 언뜻 생각하면 경제적으로 풍요해야만 디그니티가 가능할 듯싶지만, 안빈낙도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를테면 온갖 추잡한 방식으로 부동산을 모아 졸부가 된 부자에게는 디그니티가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디그니티도 경제적 부국(전통적 의미의 강국)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따르는 게 아니라 건강한 역사를 가진 국가만이 누릴 수 있는 명예다.

그렇다면 국가의 품격, 내셔널 디그니티를 판별하는 기준은 뭘까. 그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정교한 사회적 메커니즘이다.

17세기 영국에서 국민주권의 관념이 생겨나기 전까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국가의 주인은 지배계급이었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행동 양식은 곧 국가의 디그니티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그것이 곧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상류층의 의무다.

선진국의 관문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면서 우리 사회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자주 운위되는데, 사실 여기에는 한 가지 큰 오해가 있다.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보호하는 미덕,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돕는 기부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요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태도다. 그렇게 본다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상류층의 도덕에만 의존하게 되며, 해결책 또한 상류층의 인도주의에 호소하는 것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원래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이다. 지금은 프랑스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어원이 라틴어인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기원은 로마시대에 있다. 로마 군단의 지휘관들이 전장에서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다 전사한 역사적 경험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나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로마의 장군들이 제 의무를 다하려 애쓴 이유는 그들이 도덕적으로 고결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로마 사회가 그들에게 그런 의무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개인적 도덕과 무관하게 사회적 메커니즘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디그니티의 또 다른 요소인 사회적 메커니즘의 정교함과 관련된다.

앞서 바둑과 골프를 이야기했지만 이 두 가지 ‘중년의 스포츠’는 닮은 점이 많다. 입문하기는 쉽지만 실력이 늘수록 점점 더 레벨을 올리기가 어렵다는 점, 상대방과 경기를 하지만 실은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점, 따라서 패배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점이 비슷하다(프로만 보면 설설 긴다는 것도 공통점이랄까).

하지만 그보다 더 닮은꼴은 실력이 늘수록 섬세한 플레이를 요구한다는 점이다. 바둑의 고수는 거친 싸움이 아니라 정밀한 끝내기 솜씨를 자랑하며, 골프의 고수는 힘을 앞세운 장타보다 쇼트게임에서의 정교한 퍼팅을 장기로 삼는다.

국가 역시 진정한 선진국, 참된 강국은 외형적이고 수치적인 화려한 측면보다 눈에 띄지 않는 섬세한 측면이 좌우한다. 그 점을 잘 보여주는 것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대우하는 방식이다.

막말로 이야기하자면, 신체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정상인보다 경제적 가치가 적으며, 쪽방촌의 독거노인들은 경제적 가치가 아예 없다. 외형적이고 수치적인 국가 발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제거돼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하는 사회는 없고 어느 사회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한다. 하지만 ‘3급’에 머문 사회는 대개 약자를 보호하는 논거를 도덕과 인도주의에서 찾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그렇듯이 사회가 약자를 보호하는 참된 근거는 도덕이 아니라 정교한 사회적 메커니즘이다. 그러므로 장애인과 독거노인은 강자의 시혜를 바라는 게 아니라 사회의 보호를 받을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정교한 사회적 메커니즘을 갖춘 사회라면 당연히 약자를 보호한다. 그것을 ‘정교함’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거칠고 조잡한 외형적·수치적 가치관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참된 강국의 기준인 국가의 디그니티는 군사력과 경제력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정교한 사회적 메커니즘으로 얻어진다. 아직 국가의 디그니티를 아젠다에 올려놓지 못하는 우리 사회는 지금 ‘영원한 3급’에 머무느냐, 아니면 참된 고수로 성장하느냐의 기로에 있다.


일러스트·추덕영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