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관들을 둘러보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그림들이 성화(聖畵)다. 보통 미술관들의 전시실은 시대순으로 구성되기 마련이라 중세시대 미술작품들부터 만나게 되는 것이다. 중세시대 서양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기독교 문화는 회화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장 많이 그려진 주제들은 성경 속 이야기이고 같은 주제를 놓고 여러 화가들이 자신만의 버전으로 그려 내놓지만 그림을 좀 보다보면 멀리서 봐도‘아, 저건 어떤 주제다’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기독교 신자라 하더라도 한꺼번에 너무 많은 성화를 만나는 것은 좀 피곤하다. 그래서 어떨 때는 건성으로 대충 보고 지나가기도 한다. 듣기 좋은 콧노래도 하루 이틀인데 계속 비슷한 그림만 보면 질리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대부분의 성화는 딱딱하고 엄숙하며 화풍 역시 동시대 화가들끼리는 서로 비슷비슷하다. 신을 그림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엄숙하고도 경건한 일이고 또 자칫 혼자 튀게 그렸다가는 교회와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길도 없었으리라.

그런데 이러한 성화의 홍수 속에 유난히 오랫동안 필자의 눈길을 머무르게 했던 두 그림이 있었다. 성화 중에서도 가장 흔하게 그려졌던 주제인데도, 같은 주제의 그림을 수십 점, 아니 수백 점 보았는데도 전혀 다른 느낌이다.

색채가 화려해서도 아니요, 웅장하고 거대한 작품이어서도 아니었다. 필자가 만났던 그림은 성화지만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그런 그림들이었다.
[강지연의 그림읽기] 성화 속 가장 인간적인 순간을 찾아서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동방박사의 경배>(The adoration of the magi), 1619년,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동방박사 세 사람이 마구간으로 찾아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성탄절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림 속 주제는 성화 중에서도 가장 흔한 주제 중 하나인 ‘동방박사의 경배’다.

먼 곳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고 찾아온 동방박사 세 사람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각각 예물을 올리게 된다. 이 그림의 중심에는 갓 태어난 아기를 무릎에 놓고 앉아있는 성모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고 있는 젊은 왕이 있다.

그런데 그림 속 풍경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고 자연스럽다. 이 주제에서 흔히 등장하는 어떤 후광이나 나팔 부는 천사들도 보이지 않고, 거룩하고 성스럽기보다는 차분하고 전원적인 느낌이다.

왼쪽 동방박사들은 각각 청년, 장년, 노년의 나이로 보이며 이 주제를 그린 다른 화가들처럼 인종과 국가를 초월해 모든 사람이 아기 예수의 백성임을 표현하기 위해 흑인도 포함돼 있다.

그들의 뒤로는 목가적인 전원풍경이 펼쳐져 있고 특별한 화려함보다는 사실적인 소박함이 느껴진다. 그림의 내용을 알게 되면 그 이유가 쉽게 수긍이 간다. 이 그림은 사실 화가인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가족 초상화다.

스페인의 유명한 궁정화가였던 벨라스케스는 젊은 시절 세비야에서 스승인 파체코에게 그림을 배우다 파체코의 딸인 후안나와 결혼한다. 그는 1619년 5월 첫 딸 프란시스카를 얻게 되는데 딸에 대한 벨라스케스의 애정은 각별했다.

벨라스케스는 딸이 태어난 해인 1619년에 이 그림을 그려 딸의 탄생을 축하하고자 했다. 그림 속 성모의 자리에 앉아있는 여인은 벨라스케스의 아내 후안나이며 무릎 위의 아기는 갓 태어난 그의 딸 프란시스카다. 무릎을 꿇고 앉아 딸을 축복하고 경배하는 젊은 왕은 바로 벨라스케스 자신이다.

요즘은 아이가 갓 태어나는 순간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겨 기념하는 가족들이 많아졌다. 벨라스케스는 그런 스냅사진과 같은 그림을 남겨 가족의 기쁨과 행복을 표현하고자 했던 듯하다. 그림은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미화될 필요가 없었다. 있는 그대로의 순간이 중요했을 것이다.

첫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그 가슴 벅찬 감동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림 속에서 딸과 아버지는 첫 눈 맞춤을 하고 있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무엇이 느껴지는가.

벨라스케스의 초기 작품들 특징처럼 이 그림 역시 사실적으로 빛이 드리워져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잘 나타나 있다. 바닥에 있는 돌 사이에서 피어난 이름 모를 풀이나 부드러운 옷자락의 느낌, 동방박사들이 들고 있는 향유통의 표현도 주목할 만하다.

참고로 벨라스케스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노인은 그의 스승이자 장인, 그리고 아이의 외할아버지인 파체코다. 한 가족의 가장 경건하고 아름다운 순간, 바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다.

바르톨로메 무리요(Bartolome Murillo), <작은 새와 성가족>(The holy family with a little bird), 1619년,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 소장

[강지연의 그림읽기] 성화 속 가장 인간적인 순간을 찾아서
그림 속에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아버지인 요셉이 함께 모여 앉아 있다. 따뜻해 보이는 갈색 느낌이 그림을 부드럽게 감싸고, 가족의 이러한 한때가 정겹게 느껴진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한 가정에서 어머니인 마리아는 왼편에 앉아 감겨있는 실을 풀고 있다.

그녀의 그윽한 시선은 아이에게 향해 있다. 아이는 아직 걸음마를 하지 못해 아버지에게 기대어 서 있는 듯하다. 아이는 손에 새를 쥐고 강아지와 마주보며 즐겁게 장난을 치는 중이다. 그런 아이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젊은 아버지는 목수인 요셉이다.

이 그림은 평범한 듯 보이지만 사실 매우 특별한 그림이다. 흔히 볼 수 있는 거룩함과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을 보여주는 성화가 아닌 우리의 일상이 그대로 표현된 그림이기 때문이다. 그림 어디에도 이 가족이 특별한 사람들임을 나타내는 표시가 없다. 하다못해 그 흔한 후광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흔히 백발의 노인으로 표현되곤 했던 목수 요셉은 그림 속에서 보통 그 또래의 아이를 둔 젊은 아버지로 그려져 있다. 화가인 바르톨로메 무리요는 따뜻한 일상을 담은 그림들을 즐겨 그리곤 했는데, 성화에서도 그러한 일상의 주제를 접목시켜 표현했던 것이다.

제목에 ‘Holy family(성가족)’가 없다면 성화임을 알아차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림의 부드럽고 행복한 느낌은 그림 속 가족이 그냥 평범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보는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하다.

무리요는 이와 같이 평범한 일상적 주제를 자주 그렸는데, 검소한 서민들의 생활상이나 거리의 아이들의 모습을 즐겨 담곤 했다. 그의 그림은 동시대 화가들과는 다른 느낌으로 대중에게 다가왔다.

사실적이면서도 따뜻한 화풍은 일상의 잔잔한 감동을 안겨주기에 충분했으며 그의 그림 속 정물들 역시 수수하면서도 사실적이다. 마리아의 곁에 있는 실패와 바구니 속 바느질감들은 당시 가정에서 여성들이 흔히 담당했던 일과를, 목수였던 요셉 주변의 연장들은 생계를 위해 일했던 가장의 직업을 나타내주고 있다.

종교화는 무겁고 화려하며 웅장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주었던 두 그림은 공통점이 많다. 벨라스케스와 무리요는 모두 스페인 세비야 출신의 화가들이고, 그들의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빛나는 화풍은 근대의 인상주의 이전 시대에 앞선 것이기도 했다.

17세기의 스페인이 문화의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이 뛰어난 화가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그림은 현재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 함께 소장돼 있기도 하다.

성경이나 신화 속 신들의 모습은 때로는 멀게, 그리고 때로는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결국 신이 만든 피조물 중 가장 닮아있는 것도 인간일 것이다. 내가 낳은 자식이 나를 닮은 것처럼 말이다. 두 그림을 보며 문득 가족에 대한 사랑을 되새긴다.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우리들 일상의 모습 말이다.

강지연

교사. <명화 속 비밀이야기>, <명화 읽어주는 엄마> 저자.
네이버 블로그 ‘귀차니스트의 삶(http://blog.naver.com/oilfree07)’ 운영. oilfree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