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사회연대은행 대표

내려다보며 나누고 살겠노라 했던 청년의 이상(理想)은 넉넉한 수입과 안정된 생활에 슬그머니 자리를 내주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으로 살던 남자의 가슴을 다시 뛰게 만든 것은 세계적 빈곤국 캄보디아.

14년 전부터 시작된 사회 취약층의 자활을 위한 그의 고민은 결국 31년간의 직장생활에 마침표를 찍도록 종용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갭을 과감히 청산한 뒤 비로소 행복해졌다는 이종수 사회연대은행 대표의 이야기다.
이종수 대표는 사회연대은행의 설립 취지는 우산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우산을 받치고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종수 대표는 사회연대은행의 설립 취지는 우산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우산을 받치고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연대은행 (사)함께만드는세상을 찾은 것은 태풍으로 장대 같은 빗줄기가 창문을 깰 듯 무서운 기세로 내리던 날이었다. 손에 든 우산이 무색할 만큼 흠뻑 젖은 옷차림으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이종수 대표는 바깥 날씨와 너무나 대조되는 얼굴로 필자를 맞았다. 어서 오시라며 악수를 건네는 손이 그의 얼굴만큼이나 따뜻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근 10년간 두 집 살림을 했어요.(웃음) 사회연대은행과 ‘에이온(Aon)’이라는 글로벌 보험중개사의 대표를 겸했죠. ‘에이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는 박지성 선수가 가슴에 단 AIG 다음으로 스폰서가 된 회사이기도 합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로 저 건너편 건물에서 근무했어요. 지난 6월 에이온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담보가 없어 은행에서 대출받을 자격조차 안 되는 취약층의 자활을 돕는 사회연대은행이야말로 제가 가야 할 길 같아서 제대로 해야겠다 싶었죠.”

31년 직장생활에 찍은 ‘후련한’ 마침표

이 대표는 대학 졸업과 함께 미국계 은행인 체이스맨해튼은행에서 시작해 지난 30여 년간 탄탄한 이력을 쌓은 전문 금융인이다. 웨스트팩은행에서는 기획관리 및 재무이사로 서울과 홍콩, 자카르타 등에서 인도네시아 합작법인을 설립했고, 진로그룹 상무시절에는 동남아 본부장으로 활동하는 등 화려(?)한 과거를 가졌던 만큼 최근 10년간 적을 뒀던 ‘에이온 코리아’에 사직서를 내며 ‘두 집 살림’을 정리하는 데는 적지 않은 ‘고통’과 ‘각오’가 뒤따랐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사당동 철거민촌에서 보낸 이 대표는 사회 취약층에 대한 뿌리 깊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사당동 철거민촌에서 보낸 이 대표는 사회 취약층에 대한 뿌리 깊은 고민을 안고 있었다.
“저쪽(에이온 코리아)에 있을 땐 연봉이 몇 억은 됐어요. 지금은 그 10분의 1이나 되려나.(웃음) 집사람부터 시작해 지인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잘했다 싶습니다. 6월에 사표를 던지고 다 내려놓은 김에 산티아고로 도보 여행을 떠났어요. 30일간 걸으면서 생각해 보니 그간은 비정부기구(NGO)에 대한 이론적인 부분만 생각했었던 것 같더라고요.

도보 여행길이 ‘순례길’이라 그런지 걷는 동안 힘든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80km를 걸으면서 발에 물집이 생기고 발톱이 빠지는 과정을 겪긴 했지만 여행을 통해 해야 할 일을 찾았다 싶어 좋았습니다. 결심에 31년이나 걸려 좀 늦긴 했지만, 제가 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만큼 제대로 해야겠다 싶습니다.”

그가 ‘억대’ 연봉을 포기하며 선택한 사회연대은행은 민간 차원에서 진행하는 일종의 마이크로 크레디트(소액담보대출) 기관이다. 2001년 에이온 코리아로 적을 옮긴 후 1년 만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의기투합해 한국적 소액담보대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이 출발이었다.

사회연대은행은 담보조차 없어 은행 문턱을 넘을 수 없는 취약층의 자활을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2003년 봄에 첫 대출을 시작해 현재까지 총 280억 원을 대출했다. 창업 건수로 따지자면 1350개 업소가 사회연대은행을 통해 출발했고, 2800여 명의 사람들이 일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아직은 대출 신청건의 10% 정도를 소화해내는 수준에 그친다.

“재원은 기업과 금융기관, 개인 등의 기부로 구성됩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내에서 진행하는 자활 프로젝트를 위탁하는 경우도 있어요. 크게 보면 기부금과 위탁금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죠.

대출 규모는 2000만~5000만 원 선이고 이자는 2~5%, 상환 기간은 4~5년 정도예요. 애초에는 저와 뜻을 같이 하는 몇 사람이 모여서 주로 한국적 마이크로 크레디트 모델에 대한 연구를 했었는데, 2002년 중반에 삼성그룹에서 사회복지공동연금 기부금 중 10억 원을 여성 가장 지원 프로젝트에 쓸 목적으로 맡아줄 기관을 찾다가 저희한테 위탁을 결정한 적이 있어요.

그 사업을 하기 위해 사단법인을 만들게 됐고, 법인을 꾸리려면 돈이 필요해서 친구 여덟 명한테 100만 원 씩 내라고 해서 사단법인을 출범시켰죠.(웃음) 삼성에서 준 돈을 기반으로 사회연대은행의 첫 대출을 시작한 셈이죠.”

사당동 철거민촌이 던져 준 ‘소명’
[Noblesse Oblige] 30년을 돌아오며 발견한 ‘My Way’
그의 나이 56세. 30년 이상 금융계에 몸담았던 우리 사회 오피니언 리더 중 한 사람으로 정년을 생각해야 할 나이에 적절한(?) 일을 찾았다고 할지도 모른다. 몇 억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연봉으로 살면 속도 편해야 할 테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가뜩이나 적은 머리숱이 점점 줄어들어 걱정이라는 것이 그의 넋두리다. 10년간 두 집 살림을 했었다고 하니 작금의 현실을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 글로벌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보다 더 무거운 짐을 자청해서 짊어진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사당동 철거민촌에서 살았어요. 너무 가난한 살림살이 탓에 사회에 대한 불만도 뿌리가 깊었죠. 제가 서울고 출신인데, 당시엔 그 학교 나오면 좋은 대학에 무난히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어요.

하지만 형편이 어려우니 서울고를 나와도 대학 진학이 힘들었고, 비행청소년은 아니었지만 그때 집도 한 번 나가보기도 했어요. 결국 대학 대신 취업을 선택했죠. 운 좋게도 그해에 대한항공에서 고졸 사원을 여섯 명인가 특채로 뽑았는데 합격을 했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안 되겠더라고요. 대한항공 첫 출근 날이 대학 입학시험 날과 겹쳤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시험을 보러 갔어요. 합격하고 나니까 또 죽으란 법은 없는지 친척이 도움을 주더라고요.”

중·고등학교 시절엔 가난이 그의 발목을 붙잡더니, 불가능할 것 같기만 했던 대학 진학의 꿈을 가까스로 이루고 나니 이번엔 세상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빈곤한 삶으로 뿌리 깊어진 사회에 대한 불만과 고민은 73학번 새내기 대학생의 끓는 피를 폭발시키고야 말았다.

“유신시절이었으니 대단했죠. 문제의식이 많았던 터라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에 연루돼 서대문경찰서에 들어가 조금 살기도 했어요.(웃음) 처음엔 독방을 쓰라더니 나중엔 다른 죄수들과 합방을 시켰는데, 그 방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사기꾼, 도둑들이랑 같은 방을 쓰는 데도 그저 사람이 반갑더라고요. 같은 방을 쓰면서 개개인의 사연을 들어보니 제가 생각했던 가난조차 그들 앞에서는 사치란 걸 알게 됐어요. 7개월을 살면서 ‘스스로 일어나기도 힘든 이런 사람들을 돕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유신시절 긴급조치 상황에서 비상군법회의 재판을 받았던 그는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재학 중이던 서강대 천주교정의사회구현사재단 소속의 외국인 신부들이 그의 구명을 위해 팔방으로 뛰었던 결과였다. 이런 저런 일들로 대학 졸업도 남들보다 늦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면서 학교를 다녔으니 취업 생각이나 있었겠어요. (훈장까지 달았으니) 안될 거라고 생각하던 차에 대학 동기가 체이스맨해튼은행에 입사시험을 쳐보라고 권하더라고요. 미국계 은행이라 한국 기업들처럼 신원조예가 없으니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군요. ‘

그래?’ 하면서 혹시나 하고 응시를 했는데 운 좋게 붙었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월급이 많더라고요.(웃음) 당시 좋은 직장이라고 하던 종합상사 초봉이 16만 원 선이었는데 23만 원을 받았으니까요.

지지리 못살다가 갑자기 형편이 좋아지고 그 덕에 장가도 가면서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했죠. 4년 차까지만 해도 구로동 야학을 뛰었는데 배가 불러지니까 관심이 없어지더라고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잠시 내려놓고 잘나가는 은행원으로 신나게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에게 안정된 생활을 선사했던 외국 생활은 결국 그를 ‘청년 이종수’, 다시 말해 원점으로 돌려놓는 계기가 됐다.

13년간 동남아 국가를 돌며 은행 셋업에 땀 흘리던 시절, 캄보디아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차’ 싶었다. 30년 이상 내전을 겪으며 국민소득이 250달러에도 못 미치는 사람들의 생활상은 그에게 심한 자책감을 안겨줬다.

“잘 먹고 잘 살다 보니 예전에 했던 생각을 잊고 살았다 싶었죠. 그때가 1997년이었는데, 당시 행장으로 있었던 은행에 사표를 내고 인도네시아로 갔어요. 캄보디아는 내전 때문에 안전이 염려돼 가족들은 인도네시아에 체류시켜 놓고 1년 반 정도 혼자 캄보디아에서 살았어요.

솔직히 (은행을) 관둔 건 잘한 것 같았는데, 그 다음엔 뭘 하고 살아야 하나 싶기도 했죠. 인도네시아 노동부와 함께 농촌 빈민을 위한 직업훈련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제가 수석 컨설턴트로 한국에서 차관을 들여갔었죠.”

귀국한 것은 1999년. 당시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실직자가 속출하면서 사회 전체가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캄보디아에서 경험한 마이크로 크레디트가 한국에 절실하다고 판단되는 순간, 그는 연세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보다 전문적인 대안 마련을 위해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 몇몇이 쌈짓돈을 털어 연구 활동과 함께 저서를 출간하며 ‘한국형 마이크로 크레디트’에 대한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사회연대은행의 배경이자 모태였다.

‘대안금융’이라는 보다 큰 비전
[Noblesse Oblige] 30년을 돌아오며 발견한 ‘My Way’
“얼마 전 슬픈 사연의 편지 한 통을 받았어요. 부산에 사는 싱글 맘이었는데 저희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분이었죠. 2000만 원을 받았는데, 저희한테 약속한 창업을 하기도 전에 너무 급한 일이 있어 그 돈을 모두 써버렸다는 겁니다.

사회연대은행에 너무나 감사했지만, 그 돈을 다른 일에 써서 미안하고, 또한 갚을 능력이 안 돼 죄송하다고 하면서 편지를 받아볼 때쯤이면 자기는 이미 세상을 떠나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너무 놀라서 바로 부산지부로 내려가 확인해봤더니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난 후였어요. 그래서 직원들을 많이 나무랐습니다. 상황이 그 지경이 되도록 뭘 하고 있었냐고 다그쳤죠.

사회연대은행은 단순히 돈을 빌려주는 곳이라기보다는 사전, 사후에 대한 관리로 자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곳이에요. 그분의 전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불미스러운 일로 이어진 것 같아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이 대표가 주시하는 사람들은 ‘차상위층’과 ‘취약계층’이다. 극빈자의 경우, 정부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원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차상위층의 경우 정부보조금에서도, 은행 대출에서도 모두 외면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모두 사회연대은행 대출금의 수혜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첫째, 아주 가난해야 합니다. 집, 수입, 의료보험 등을 고려해 종합적으로 판단하는데, 담보가 없어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60~70%는 여성 가장인데, 이혼 또는 사별을 했거나 남편이 있어도 장애인이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죠.

두 번째는 사업 아이템이 있어야 합니다. ‘일’을 통해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함이에요. 세 번째가 심사에 가장 중요한 조건인데, 자활 의지가 있는가에 대한 파악입니다. 경제적 자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심리적 자활이거든요.”

사회연대은행은 무담보·무보증자에 대한 금전적 지원과 함께 창업에 대한 컨설팅과 교육, 트레이닝(기술 지원 등)의 삼박자를 통한 관리에 중점을 두면서 ‘함께 가기’를 강조한다. 대출을 받은 사람의 사업이 성공하면 상환은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그 과정을 통해 돈이 돌아 또 다른 수혜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대표의 지론. 돈을 ‘제대로’ 굴려 ‘양화’를 구축해 간다는 원리다.

“정부가 나서면 (돈을) 주는 것은 잘 하지만 돈을 받는 사람들이 자칫 ‘정부 돈은 안 갚아도 된다’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에 빠질 수 있어 돈이 도는 체제가 되긴 어렵습니다. 그래서 민간 차원에서의 대안금융이 필요한 겁니다.

차상위 계층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결국 맨 밑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게 돼요. 마이크로 크레디트 역시 대안금융의 일환입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대안금융에 대한 움직임이 있어요. 우리나라도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자본, 대안금융이 필요한 시기가 왔어요. 제 남은 꿈이 그것이고요.”

그는 최근 ‘노블 하트(Noble Heart)’라는 ‘천사클럽’을 발족했다. 남 돕는 것이 직업인 사회연대은행 직원들이 정작 자신들의 월급은 못 받아 갈 때가 있었단다. ‘노블 하트’는 NGO가 겪는 운영상의 어려움을 해결함과 동시에 더 많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후원인 클럽인 셈. 사회연대은행의 취지를 지원하는 ‘천사’들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받을 예정인데, 두 달 만에 54명의 천사가 탄생했다니 성적이 꽤 괜찮은 편이다.

“하하하. 지금까진 대부분 제 지인들인데 1004명을 채워보려고요. 한 달에 100만 원의 기부금을 받는데,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누구를 돕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도울 기회를 제공했으니 우리가 당신을 돕는 것’이라고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경쟁력, 결국 사회로부터 받은 것 아니겠어요. 받았으니 어느 정도는 사회에 다시 환원해야죠.”

이제라도 갈 길을 알게 돼 무척이나 행복하다는 그의 어깨 너머 통유리 창으로 여전히 멈출 기세 없이 쏟아지는 장대비가 보였다. 문득 해봄직 한 망상(妄想) 하나가 떠올랐다. 자활이 절실한 이들에게 ‘돈비’가 저토록 시원하게 내려줬으면. 이 대표도 어쩌면 같은 생각을 해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종수

현 사회연대은행 대표
한국비영리학회 부회장
에이온(Aon) 코리아 사장
대통령 자문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위원
금융기관 컨설팅 (주)캡코 대표
진로그룹 상무
웨스트팩은행 기획관리이사
체이스맨해튼은행
연세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서강대 경영학과

글 장헌주·사진 이승재 기자 c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