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미국 대공황이 고용과 생산 저하에 따른 실물 충격이 금융부문으로 번진 것이라면 지난 2008년 말 발생한 위기는 금융 충격이 실물로 전이된 대표적 예로 볼 수 있다.

위기의 진원지는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이었음에도 우리나라가 즉각적인 영향을 받은 것도 국경과 제도를 손쉽게 뛰어넘는 금융부문에서 균열이 생겼기 때문이다. 기계 한 대가 고장 나 멈추면 그 기계를 고치거나 바꾸면 되지만, 공장에 공급되던 전원이 갑자기 끊기면 공장 전체가 마비되는 것과 비슷하다.

다행히 한국은 전 세계가 마이너스 성장을 할 때 플러스 성장을 기록할 정도로 견실한 모습을 보였다. 외화가 한꺼번에 빠져나갈지 모른다고 걱정하던 2년 전과 달리 지금은 오히려 너무 많은 외화가 들어온다며 고민하는 처지로 바뀌었다. 주식, 채권, 외환 등 3대 금융시장도 위기 이전의 안정된 수준을 되찾았다.
[한국 금융시장] 금융지표는 안정됐지만 가계부채 등이 남은 과제
하지만 은행부문의 본격적인 디레버리징(차입 축소)이 이뤄지지 않은 가운데 늘어만 가는 가계부채와 지연되고 있는 기업 구조조정 등 해결해야 할 문제 또한 산적해있다. 밖으로 눈을 돌리면 미국의 성장 둔화와 유럽의 재정위기 등 전 세계를 또다시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는 불씨가 남아 있어 경계심을 풀기는 이른 국면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도 경제 전반의 강도 높은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국내를 덮친 외화난

국가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지난 2008년 10월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뒤 빠른 속도로 하락했다. 결정적 계기는 한국과 미국이 체결한 30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다.

스와프 규모는 당시 국내 외국환은행의 하루 평균 외환 거래규모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지만, 위기가 심화되더라도 달러 유동성 공급이 지속될 수 있다는 신호로 작용해 시장의 불안 심리를 가라앉히는 데 큰 힘이 됐다.

당시 가장 큰 문제는 외화유동성, 특히 대외 채무의 45%를 차지한 단기외채였다. 상환 요구가 들어오면 어디선가 돈을 구해다 갚아야 하는데, 국제 금융시장 여건상 그럴 수 있는 나라나 금융 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실제 지난해 초만 하더라도 미국 등의 해외 금융회사들이 자금 회수에 나서는 바람에 국내 금융회사들은 달러 마련을 위해 보유하고 있던 채권을 파는 등 정신없는 날을 이어갔다.

정부가 단기외채의 상당부분은 국내 조선업체의 선박 수주에 따른 선물환 매도로 비롯됐고, 단기외채를 끌어 쓴 금융기관은 차익 거래에 민감한 외국계 은행 국내 지점이었다는 점을 해명해도 해외투자자들은 우려의 시선을 쉽게 거두지 않았다. 경상수지 흑자와 국내 펀더멘털의 건전함을 확인한 뒤에야 금융위기 때의 걱정이 기우였음이 판명 났다.

부각된 취약성

이 과정에서 자금 중개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은행의 취약성이 적지 않게 회자됐다. 2008년 11~12월에는 국내 A은행 강남지점에 예금인출 요구가 계속되고 있다는 루머가 나돌았다. 해당 은행의 진땀 흘리는 해명 끝에 이 같은 소문이 잦아들었지만, 은행 건전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된 것 자체만으로도 국내 금융기관들의 충격은 컸다.

이 일은 우리 사회에 ‘은행=안전지대’라는 상식이 깨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몸집 불리기에 급급하던 은행들은 그때서야 체질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해 환부에 메스를 들이댔다.

그렇다면 은행들이 코너에 몰린 가장 큰 이유는 뭘까. 우선 대출자산 부실화 가능성이다. 국내 은행들 상당수는 수익을 올리기 위해 부동산 대출에 열을 올렸다. 기업대출의 30%가량이 건설업, 부동산 및 임대업에 몰릴 정도였다.

이 경우 주택 가격이 상승할 땐 문제가 없지만 미국처럼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은 저축은행에 부동산 대출 부실 불똥이 튀었지만, 금융위기 직후만 해도 외국인투자자들이 예의주시했던 부분은 시중 은행들이다.

실제 B은행은 원화대출금의 10% 정도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묶여있었다. 또 은행채나 양도성예금증서(CD) 등 시장성 수신 비중이 컸고, 위기 때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이 많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도 은행들에 대한 불신을 키운 원인이 됐다.

신뢰의 위기 이후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속담처럼 어느 한 곳의 부실 가능성은 해당 지역과 국가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 쉽다. 금융위기 때 한국의 상황이 그랬다. 위기의 원인이 어디에 있고 해결할 수 있는지를 가리지 않고 묻지마식 투매가 벌어진 것도 일부의 문제가 전체의 문제인 것처럼 확대, 과장돼 외부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한복판에는 `신뢰의 위기`, 곧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이 금융시장이다. 지난 2008년 10월까지 1000선까지 밀렸던 코스피지수는 잠깐 반등하다 이듬해 2월 또다시 되밀렸다. 위기가 가라앉으면서 빠른 속도로 회복하긴 했지만 우리나라 주식시장이 리먼브러더스 파산 직전 수준을 회복하는 데는 무려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채권금리도 비슷한 경로를 걸었다. 지금은 한국은행의 유례없는 저금리 정책에 힘입어 채권금리가 낮은 수준을 이어가고 있으나 위기가 한창일 때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외환위기 여파가 계속되던 지난 2000년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기도 했다.

밖으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해 초만 해도 국내 증권사들은 콜시장에서 돈을 빌리지 못해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다. 누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서로 돈 빌려주기를 꺼린 탓이다.

외환시장은 어땠을까. 지난해 초 1600원대에 육박하던 원·달러 환율은 지금은 1100원대를 기록하고 있다. 금융위기 전 900원대를 등락했던 것에 비해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달러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때에 비하면 사정이 한결 나아진 것이다. 여기에는 당국의 외환시장 개입이 있었던 점도 고려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현재 2900억 달러에 육박한다. 세계 5위의 규모다. 환율의 과도한 하락을 막기 위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들이다 보니 보유액 규모가 위기 전보다 커졌다. 지금은 선물환 규제 도입 등 외환시장의 쏠림을 막기 위한 조치가 시행 중이다. 예전 같았으면 자본 규제라며 반발이 적지 않았겠지만, 금융위기 이후 이런 지적은 쏙 들어갔다.
[한국 금융시장] 금융지표는 안정됐지만 가계부채 등이 남은 과제
남은 과제는

금융시장 주요 지표들은 위기 전 수준을 가리키고 있다. 국내 은행들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걷혔다. 외국인들은 앞 다퉈 국내 주식과 채권을 사들이는 중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한국은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가계의 부채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나라로 꼽히고 있다. 지난해 개인 가처분소득 대비 금융부채 비율은 140%를 웃돌았다. 미국이 서브프라임 위기를 맞은 지난 2007년 이 비율이 140%였다.

그 뒤 미국은 이 비율이 하락했지만, 한국은 오히려 상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소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결국 막대한 부채가 개인은 물론 금융시장 전체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지연되고 있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올해 2분기 상장기업의 30%는 이자보상비율이 100% 미만을 기록했다. 벌어들인 돈으로 이자를 내지 못하는 기업이 10개 중 3개나 된다는 의미다. 이는 건강한 기업에 자금이 공급되지 않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학선 이데일리 경제부 기자 naemal@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