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는 고용과 주택, 소비로 대표되는 미국의 3대 실물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자금 시장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워진 미국 기업들은 투자를 줄였다. 투자 위축은 실업자를 양산시켰다. 지난 8월 미 실업률은 9.6%로 10%에 육박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로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주택 시장은 바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위기 이전 주택 가격 거품에 기대 신용카드를 긁어대던 미국인들은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는 추세다. 위기가 가져다준 후유증과 고통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미국 실물경기] 의료비도 아낀다…얼어붙은 소비심리
뉴저지주 버겐카운티(Bergen County) 티넥(Teaneck)에 사는 존 닐. 그는 국제 인력자원관리 회사에 근무하다가 리먼브러더스의 파산 여파로 한 달 만에 실자가 됐다. 회계와 교육을 전공한 석사 학위까지 갖고 있는 그는 “22개월 이상 일자리를 찾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허사였다”고 말했다.

닐은 일자리를 잃기 전 연봉과 수수료 수입 등으로 10만 달러를 벌었다. 이제는 장기 실업자인 탓에 기초생활도 버겁다. 재취업을 낙관해 실직 후 6주 이내에 신청해야 하는 최초실업수당 청구 기회도 놓쳤다. 전기료를 제때 내지 못하자 전기회사가 전력 공급을 중단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그는 주 정부에서 지원하는 월 기초생활비 340달러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닐처럼 27주 이상 실업 상태인 미국인들은 지난 8월 현재 620만 명에 이른다. 전체 실업자의 약 43%를 차지한다. 풀타임 일자리를 얻지 못해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도 890만 명으로 7월보다 40만 명 늘어났다.
리먼사태 이후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심리가 꽁꽁 얼어붙어 경기회복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리먼사태 이후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심리가 꽁꽁 얼어붙어 경기회복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로렌스 카즈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는 “달마다 30만 개 이상의 일자리가 생겨야 4년 이내에 실업률을 경기침체 이전 수준(4%대)으로 낮출 수 있다”고 추정했다. 얀 하지우스 골드만삭스 수석 애널리스트는 “고용 시장이 악화되지 않으려면 적어도 미국 경제가 3% 안팎의 성장률을 보여야 한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녹록지 않다. 지난 2분기 미 경제성장률은 1.6%로 둔화됐다. 골드만삭스는 올 하반기 성장률이 1.5%로 더 떨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기업들은 이런 불확실성 탓에 몸을 잔뜩 움츠린 상태다.

주택 시장은 여전히 싸늘하다. 주택 소유는 안정적인 직업과 함께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으나 미국 7세대 중 1세대가 3개월 이상 모기지 원리금 상환을 연체했거나 주택 압류 위기에 놓여 있다.

부동산 조사업체인 리얼티트랙은 모기지를 제때 갚지 못해 집을 압류당하는 세대가 올해 100만 세대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압류당한 집은 시장에 매물로 나와 주택 가격을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모기지로 주택을 구입한 사람이 ‘깡통주택(집값이 모기지 상환액에 미치지 못하는 주택)’에 살고 있는 경우도 많다. 전체 깡통주택 소유자들은 지난 6월 말 현재 모기지 이용자의 23%인 11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7월 중 팔리지 않은 주택은 전달보다 2.5% 증가한 398만 채에 달했다. 이런 거래 규모라면 재고를 소진하는 데 12.5개월이 걸릴 전망이다.
[미국 실물경기] 의료비도 아낀다…얼어붙은 소비심리
미 지역별로 차이는 있다. 케이스-실러 주택가격지수에 따르면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와 애리조나주 피닉스는 주택 가격이 2006년 고점 대비 각각 57%, 51% 하락했다. 이에 비해 텍사스주 댈러스와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은 같은 기간 주택 가격 하락률이 각각 4.2%, 13.5%에 그쳤다.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래라에서 코람프로퍼티를 운영하는 부동산 브로커 안신 씨는 “주택 거래가 2006년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며 “부동산 중개업체 절반이 문을 닫았다”고 전했다. 그는 “주택 시장 회복 시점을 예상하기조차 어렵다”고 토로했다.

주택 가격 하락은 미국 가계의 자산가치에 영향을 미쳤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2006년 22조9000억 달러였던 미 가계의 총자산이 지난 3월 말 현재 16조5000억 달러로 감소했다고 집계했다. 6조4000억 달러가 허공으로 사라진 것이다.

고용 시장과 주택 시장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해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계층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이다. 빈부 격차가 확산되고 있다. 소득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2007년 0.463에서 2008년 0.466으로 높아졌다. 0에서 1까지 값을 갖는 지니계수는 높아질수록 소득 불평등이 심해진 것을 의미한다. 이렇다 보니 미국인들의 전반적인 소비심리는 쪼그라들었다.

소비자들 사이에 ‘덜 쓰고, 더 저축해야 한다(spend less and save more)’는 분위기가 짙다. 소비자분석단체인 PMA가 설문조사를 해보니 소비자 가운데 91%는 세일하지 않으면 제품 구매를 미루겠다고 말했다.

NCH 쿠폰팩트 리포트는 올 상반기 소비자들에게 제공된 쿠폰이 180억 개로 지난해보다 11.4%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소비자들이 장바구니 쿠폰을 적극 사용해 절약한 금액은 20억 달러에 달한다고 추정했다.
[미국 실물경기] 의료비도 아낀다…얼어붙은 소비심리
미 상무부 경제분석국(BEA)은 지난 상반기에 병원 진찰과 약품 구입 등으로 지출한 각종 의료비가 전년 동기 대비 1인당 2.7% 증가했다고 밝혔다. 1959년 관련 조사를 시작한 이래 가장 작은 증가 폭이어서 미국인들은 경기침체 탓에 의료비까지 아끼는 셈이다.

버지니아주 매클레인에 있는 타이슨스코너 쇼핑몰에서 만난 레날도 올트는 “금융위기가 닥치는 바람에 씀씀이를 20% 정도 줄였다”고 말했다. 아부사민 만디 백화점 정장매장 직원은 “가을 신상품을 내놓자마자 15% 할인을 내걸었으나 손님들은 선뜻 구매하기보다 재기만 할 뿐”이라고 전했다.

미국은 소비로 경제가 굴러가는 나라다.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소비 기여도가 70%에 달한다. 하지만 금융위기 이후 위축 현상이 뚜렷해졌다. 위기 직전인 2007년 3분기 1.8%이던 저축률(가처분소득 대비 개인저축 비율)은 지난 2분기 6.1%로 높아졌다. FRB가 집계한 결과 지난 7월 신용카드 대출 잔액도 2008년 말에 비해 13%(1297억 달러)나 줄었다.

미국인들의 소비심리는 쉽사리 호전될 것 같지 않다. 기업자문업체인 앨릭스파트너스가 최근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소비자 63%는 2012년 말이나 그 이후까지 본격적인 경기회복이 어렵다고 예상했다. 지난 연말 조사 때의 46%를 훨씬 웃돈다. 소비자 83%는 앞으로 1년 동안 필수품 외의 제품 구입을 줄이거나 현상을 유지할 것 같다고 답했다.

미국 정부는 소비 진작에 부심하고 있다. 오는 연말 종료되는 연소득 20만 달러(부부 합산 25만 달러) 미만 중산층과 저소득층(98%)에 대한 감세정책을 연장하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야당인 공화당은 20만 달러 이상 고소득층(2%)을 위한 감세도 연장해 소비를 자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 정부는 감세를 모두 연장할 경우 앞으로 10년간 2조∼3조3000억 달러에 달하는 세수가 줄어들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은 고소득층 감세에 반대하고 있다. 부자들에게 감세 혜택을 줘도 저축하기 때문에 소비 진작 효과가 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반면 경기침체에 더 취약하고 실업 불안감이 더 높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이야말로 감세로 늘어나는 소득을 저축하거나 빚 상환에 사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시각도 있다.

뉴욕=이익원·워싱턴=김홍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