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아우르는 우리 시대의 디바 인순이

많은 이들이 인순이하면 ‘거위의 꿈’을 떠올린다. 인순이 버전의 ‘거위의 꿈’ 은 그녀가 걸어온 녹록지 않은 삶과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세월이 선사한 그런 깊이가 여전히 그녀를 아이돌과 다름없는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오랜 세월을 견딘 힘을 느끼게 하는 가수 인순이를 서울 삼청동에서 만났다.
[Celebrity] 세월과 꿈을 이야기하다
인순이를 만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50대 선배는 인터뷰 동석을 은근히 바라는 눈치였고, 포토그래퍼는 열두 살 딸의 사인북을 챙기기에 바빴다.

아이돌들이 대부분인 TV 음악 프로그램에서 기성세대가 주 시청자인 <열린 음악회>까지, 어디서나 환영받는 그녀의 폭넓은 인기를 주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뷰를 결정하고 만나기까지, 근 한 달여가 걸렸다. 밀려드는 방송 스케줄에 지방 공연과 행사, 미국 공연까지 일정을 잡기 힘들다고 매니저는 우는 소리를 했다.

“이달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빼 보겠다”던 매니저가 7월 초 어렵게 자리를 마련했다. 그렇게 인순이와의 삼청동 데이트가 성사됐다.

한결같은 인기의 비결은 ‘2등주의’
[Celebrity] 세월과 꿈을 이야기하다
삼청동의 한 갤러리에서 만난 그녀는 의상부터 갈아입었다. 인터뷰를 위해 준비해온 의상이 따로 있다고 했다. 그녀는 사전에 인터뷰할 잡지를 보고, 콘셉트에 맞는 의상을 준비한다고 했다.

“아무리 작은 행사라도 한 달 전에 스케줄을 잡아요. 공연을 준비할 시간을 버는 거죠. 선곡에서 퍼포먼스, 의상까지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요.

공연이라고 모두 똑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도 없고요. 공연을 찾는 분들의 성향에 따라 트로트를 한두 곡 넣기도 하고, 팝송을 부르기도 해요.”

관객의 성향을 파악하고 항상 준비하는 자세. 50대가 된 지금도 그녀가 아이돌 못지않은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고 했다. 또래의 수많은 가수들이 불꽃처럼 명멸했지만, 그녀는 살아남아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그녀는 그 이유를 ‘2등주의’에서 찾는다.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항상 1등이 아닌 2등이었기 때문이라고. 수십 년간 2등의 자리에서 다져온 내공이 지금의 그녀를 있게 했다고 믿는다. 그녀는 지금은 1등과 2등의 중간쯤이라고 믿는다.

“1등은 늘 불안해요. 또 거기서 내려왔을 때의 좌절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더 편한 건지도 모르죠. 가수로서 공연도 하지만 아이 데리고 시장도 가고 여행도 편하게 다닐 수 있으니까요. 노래도 그래서 더 즐기면서 부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녀라고 좌절을 경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스스로는 항상 2등이었노라고 하지만, 희자매 시절 그녀는 누구보다 큰 사랑을 받았다. 원조 걸그룹 희자매는 지금으로 치면 소녀시대 이상의 인기를 누렸다.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않았던 당시에도 많은 팬들이 희자매에게 열광했다. 그녀는 요즘 걸그룹들을 보며 속으로 ‘얘들아,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거든’ 할 때가 있단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중에 몇 명이라도 생명이 긴 가수로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룹이란 게 깨어지기 쉽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특히 시기와 갈등이 많은 걸그룹은 더하다. 누구 한 사람이 화면에 더 비쳐도, 더 예쁜 옷을 입어도 모두 문제의 단초가 될 수 있다. 문제는 그룹이 깨어진 그 후다. 희자매 해체 후 가수로 살아남은 멤버는 그녀가 유일하다.

지방의 작은 무대도 마다하지 않던 어려운 시절
[Celebrity] 세월과 꿈을 이야기하다
그녀는 가수 인생에서 그때가 가장 큰 갈림길이었다고 고백한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5년간 그녀는 혹독한 시련의 시기를 보냈다.

그때 그녀는 음악에 대한 절실함, 팬들의 뒷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절망감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끊임없이 노력했노라고 했다.

나이트클럽에서 번 돈으로 밴드를 구성하고 무용 팀을 꾸렸다. 눈높이를 낮춰 작은 콘서트를 열고 어떤 공연이건 그녀를 찾는 곳이면 달려갔다.

나이트클럽도 마다하지 않았고, 지방의 작은 무대에도 기꺼운 마음으로 섰다. 한편으로는 음악 프로그램을 보며 머릿속으로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이었던 셈이다.

“어려운 시절에도 저에게는 꿈이 있었어요. 꿈이란 건 거창한 게 아니에요. 저에게 꿈이란 희망의 다른 말 같아요.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요.

제가 가수가 된 건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적당히 해서는 돈을 못 벌겠더라고요. 열심히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어요. 슬럼프 때도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한 거죠.”

기회는 머지않아 찾아왔다. KBS TV <열린 음악회> 무대에 설 기회를 잡은 것이다. 첫 회 공연 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뒤집어진” 것이다. 쏟아지는 앙코르 환호에 그녀는 반주 없이 창을 들려주었고, 관객은 또 한 번의 환호로 여왕의 귀환을 축복했다. 이후 10년 동안 그녀는 격주로 <열린 음악회> 무대에 섰다.

<열린 음악회>를 계기로 화려하게 부활한 그녀는 이후에도 나이트클럽 무대에 섰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밤무대에 서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그녀는 “나를 찾는 이유가 있으니까 부르는 것 아니겠냐”고 응수한다.

가수에게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설 무대가 있고 노래를 들어줄 팬이 있다는 건, 어쩌면 그녀에겐 존재의 증명인 셈이다.

카네기홀에서 나이트클럽 무대까지 섭렵한 전천후 디바

그녀는 미국 카네기홀에도 서지만, 지방에서 열리는 행사 무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가 설 수 없는 무대는 없는 듯하다. 이유는 한 가지다. 그만큼 다양한 곳에서 그녀를 찾기 때문이다.
카네기홀과 나이트클럽은 무대와 관중이 다르다.

래퍼토리도 달라야 하지만 의상도 달라야 한다. 의상 비용이 가장 많이 든다고 할 정도로 그녀는 무대 의상에 신경을 많이 쓴다. 의상 종류도 드레스에서 핫팬츠까지 다양해서 몸매에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그런데 내가 먹는 걸 너무 좋아해서”라며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초콜릿 머핀을 입에 가져갔다.

“초콜릿은 에너지예요. 에너지. 먹으면 금세 찌는 체질이에요. 우리 아이 가졌을 때 77kg까지 나갔어요. 연예인들 보면 애 낳고 금방 날씬해지잖아요. 나도 그럴 줄 알고 마구 먹었거든요. 그거 빼는데, 거의 죽음이었어요. (웃음)”

다이어트의 일등 공신은 콘서트였다. 콘서트를 앞두고 살을 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여러 무대에 서지만 가장 신경이 많이 쓰이는 무대가 단독 콘서트다. 그녀는 콘서트를 할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 왔다.

콘서트는 그녀에게 일종의 각성제다. 2시간 동안 환호하는 관객들과 함께 하다 보면, 공연이 끝나도 그 여운이 한동안 계속된다. 이전에는 콘서트가 끝나면 남편이 픽업해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콘서트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새벽 2, 3시까지 거실에 남아,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 볼 때가 많았다. 체질적으로 술, 담배를 못하는 그녀로서는 그렇게 콘서트 후의 허전함을 달랬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때는, 공연 끝나고 팀원들을 데리고 가라오케에 가서 신나게 놀았어요. 남편이 픽업하는 게 나쁘단 건 아니고요. 그럼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그런 건 서로 존중해줘야죠.

나이가 들면서 부부간에도 지킬 건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부부라는 게 편하다고 착각할 뿐이지, 그저 편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아요. 세월이 가면서 변하는 생각이 어디 그뿐이겠어요.”

[Celebrity] 세월과 꿈을 이야기하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순수해지고 노래는 깊어져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순수해진다고도 했다. 치열했던 시절에는 꽃이나 나비의 아름다움이 눈에 차지 않았다. 그녀는 나이가 차면서 봉숭아꽃이 예쁘게 보이는 이유가 순수를 되찾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드는 게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삶을 보는 눈이 깊어진다는 점이다. 노래에도 삶의 깊이가 묻어난다. ‘거위의 꿈’이 대표적인 예다. 젊은 감성으로 부른 ‘거위의 꿈’과 그녀가 부른 ‘거위의 꿈’은 전혀 다른 곡이다.

그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분으로 그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나면 답답하기도 하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은 노래를 단지 노래로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발라드, 댄스, 재즈, 트로트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한 그녀는 이제는 깊이 있는 노래가 좋다. 원색적이고 통속적인 재즈도 좋고, 기타 반주 하나로 부를 수 있는 느린 트로트도 좋다.

“이제는 두려움이 별로 없어요. 방송국에서 잊힌 적도 있는 걸요. 가끔 젊은 친구들 보면 흘끗 쳐다보기도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누구도 세월을 비껴갈 수는 없으니까요.

지금처럼 왕성한 활동도 오래 못할지도 모르죠. 너무 초라하게만 늙지 않으면 되죠. 가끔 후배들 만나서 밥 사주고, 그 정도면 되지 않을까요.”

인터뷰 내내 그녀가 내뱉는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여유가 있었고 또 단단했다. 아마도 오랜 세월을 견딘 힘이 그녀를 그렇게 튼실하게 만든 듯했다.

글 신규섭·사진 서범세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