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기록되고 남는 건 결국 ‘승리’한 쪽이다. 패배한 자들은 역사에 기억되지 못하고 그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러므로 ‘승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록될 필요가 있었다.

그 기쁘고 영광스러웠던 순간을 한 점의 걸작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은 승리자들의 자연스러운 욕망이기도 했다. 그들의 의도대로 제작된 승리의 순간들을 두 점의 그림을 통해 비교해 보도록 하자.
[강지연의 그림읽기] 화폭에 담아낸 승자들의 영광
베첼리오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뮐베르크의 카를 5세>(Charles Ⅴ at Muhlberg), 1548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갑옷을 입은 기사가 노을을 배경으로 한 채 말 위에 올라있다. 이제 막 산 아래로 떨어지려는 태양이 보인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가 이제 막 끝난 모양이다. 그림 속 기사는 해가 지는 전투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물러서지 않고 위엄이 넘치는 모습으로 긴 창을 움켜잡고 있다.

그의 몸에는 붉은색 휘장이 둘러 있고, 타고 있는 말에도 붉은색 천을 걸쳐져 있다. 붉게 타오르는 승리자의 모습. 그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위대한 황제이자 스페인의 첫 번째 국왕, 카를 5세다. 카를 5세가 지배했던 영토는 오늘날의 스페인,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이탈리아까지 미치는 광대한 나라였다.

그림 속 카를 5세는 이제 막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명성이 자자했던 화가 베첼리오 티치아노에게 초상화 제작을 부탁했다. 가톨릭 국가의 왕으로서 그는 신교도들과의 뮐베르크 전투에서 큰 승리를 얻어냈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와 용기가 그림으로 남아 후대에 전해지기를 소원했다. 그리고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티치아노는 이전에도 카를 5세를 여러 번 그렸기 때문에 그가 어떤 초상화를 원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 속 황제의 얼굴은 강한 의지와 굳은 결심,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권력을 향한 욕망, 그리고 영웅이라면 짊어져야 할 고독까지도 모두 나타나 있는 듯하다.

이런 군왕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영웅의 얼굴이란 어떤 것인지 그림을 다시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에서 이 그림이 많은 왕족의 초상화들 중 기억 속에 남았던 이유는 바로 카를 5세의 표정이 말해주는 여러 가지 느낌들 때문이었던 듯하다.

황제가 입고 있는 갑옷은 호화롭고 단단해 보이며, 실제로 그가 뮐베르크 전투에서 입었던 갑옷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티치아노는 특히 이 갑옷에 정성을 들였다. 왜냐하면 이 갑옷은 황제를 위해 디자이너가 제작한 단 하나의 갑옷이었기 때문이다. 기성복이 아닌 맞춤제작이었던 것이다. 누구나 이 그림을 보고 갑옷의 가치, 즉 황제의 권위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화가는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했다.

황제가 들고 있는 창 역시 마찬가지다. 이 창은 성스러운 유물로 전해져 온 것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있던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 전설의 창이야말로 카를 5세에게 있어 세상 그 누구나 두려워할 무기로 삼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황제들이 초상화에서 검을 들고 있지만 카를 5세가 검 대신 창을 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림 속에서 황제가 말을 타고 있는 자세, 즉 기마상(騎馬像)은 왕이나 귀족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데 매우 효과적인 자세였다. 티치아노의 이 작품은 기마상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카를 5세의 위엄과 무용담을 함께 잘 나타냈으며 후에 수많은 다른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강지연의 그림읽기] 화폭에 담아낸 승자들의 영광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브레다 함락, 창검>(The surrender of Breda, The Lances), 1634~35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

여기, 또 다른 승리의 순간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스페인의 유명한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브레다 함락의 순간이다. 1625년 네덜란드의 도시 브레다가 스페인 군대에 함락됐다. 그림을 잘 살펴보면 승자와 패자가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왼쪽에 서 있는 사람들은 패자인 네덜란드 군대. 오른쪽에 창을 높이 들고 있는 승자의 진영은 스페인 군인들이다. 언뜻 봐도 승패의 분위기가 단번에 느껴지지 않는가. 화가의 뛰어난 재능 덕택이다. 패배한 쪽의 축 처진 얼굴들과 아무렇게나 비스듬히 들고 있는 창들에 비해 승리한 쪽은 자랑스럽게 창을 곧추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그림의 중앙에는 각 군대를 이끌고 있는 장수 두 명이 마치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그려져 있다. 한껏 몸을 숙이고 손에는 브레다 성의 열쇠를 들고 있는 성주 나사우 장군. 그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패자에게 너그러운 관용을 베풀어 성의 열쇠를 받고 있는 스페인의 장군 스피놀라.

전쟁에서 이겼다는 기쁨보다는 진 쪽을 너그럽게 배려해주는 스페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냈다. 화가인 벨라스케스가 스피놀라에게 바치는 트리뷰트라고나 할까. 실제로 저 승리의 순간이 저렇게 아름다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놀라운 재능을 가진 천재화가 벨라스케스는 그림 곳곳에 여러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해 생동감이 넘치는 순간을 재현해냈다.

먼저 양쪽의 군복을 보자. 승리한 오른쪽 스페인 군인들의 군복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우며, 그들의 얼굴표정은 하나하나 섬세하고 뚜렷하다. 반면에 패배한 네덜란드 군인들의 옷은 상대적으로 남루해 보이며 슬쩍 관객을 쳐다보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얼굴도 모두 어둡게 처리됐다.

그들 뒤로 보이는 브레다는 연기와 불이 올라오고 있어 방금 전투를 치룬 장소임을 일깨워준다. 그러나 그에 비해 너무나 평온해 보이는 파랗고 아름다운 하늘은 마치 스페인의 승리가 브레다를 아름답게 재건하도록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하늘과 지평선에 수직으로 위치한 창들은 그림의 구도를 예술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게 보이도록 한다.

하늘을 찌를 듯한 스페인의 기상. 그 영광된 순간을 포착하려 했던 화가의 의도가 너무나 완벽하게 나타난 작품이다. 그런데 혹시 그림 속에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는가. 깜찍하게도 화가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얼굴이 그림 속에 남겨두었다. 그림의 맨 오른쪽, 회색 모자를 쓰고 관객을 살짝 바라보고 있는 저 남자가 바로 벨라스케스다.

‘나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이 영광된 승리의 순간에 함께 있었다’고 남기고 싶었던 걸까. 그가 실제로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림 속에 자신을 포함시킴으로써 그림은 더욱 드라마틱해진다. 벨라스케스의 얼굴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다면, 그가 남긴 시대의 걸작 <시녀들>(Las Meninas)을 찾아보시길. 그 안에 붓을 들고 서 있는 벨라스케스의 얼굴과 비교해 보면 된다.


강지연

교사. <명화 속 비밀이야기>, <명화 읽어주는 엄마> 저자.
네이버 블로그 ‘귀차니스트의 삶(http://blog.naver.com/oilfree07)’ 운영. oilfree0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