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이 울고 있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처럼 큰소리로 엉엉 입을 벌리고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와 울분과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이 악물고 세상을 향해, 신과 자신을 향해 울분을 삼키고 있다.

눈에는 붉은 핏방울이 눈물로 하얗게 변해 뚝뚝 떨어지고, 온몸에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온통 대못을 박았다. 부서진 척추는 고대 이오니아식 대리석 기둥에 간신히 압박벨트로 지탱하고 있고, 거칠고 황량한 들판은 갈라지고 메말라 하늘마저 한 점 생명의 기운을 찾을 길 없다.
<부서진 기둥>, 1944년, 매소나이트에 유화(Oil on Masonite), 38.7×31.1cm, 돌로레스 올메도 재단(Fundacion Dolores Olmedo), 멕시코시티
<부서진 기둥>, 1944년, 매소나이트에 유화(Oil on Masonite), 38.7×31.1cm, 돌로레스 올메도 재단(Fundacion Dolores Olmedo), 멕시코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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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54)의 무섭고 무서운 자화상이다. 소리 내어 절규하는 외침보다 더 무서운, 소리 없는 저주의 눈물은 학창시절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전차에 부딪치는 사고로 시작됐다. 그 사고로 척추와 팔꿈치 그리고 발이 으스러지고, 쇠막대가 오른쪽 골반을 뚫고 나오는 중상을 입었다.

세 번의 유산과 일곱 번의 척추수술, 오른쪽 다리 절단, 폐결핵과 신장병 등 합병증 및 우울증 때문에 평생 병원과 수술, 침대와 휠체어, 절망과 좌절을 온몸으로 감내하며 운명과 맞서 침대에 누워 자화상을 그리면서 자신과의 길고 험한 싸움을 시작했다. 그림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한 철의 여인 프리다는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

목발의 프리다
프리다 칼로, 1944년 멕시코시티. 강렬한 눈빛과 진한 일자 눈썹, 요란한 장신구와 타래머리에서 예술가로서 독특한 성격이 드러난다. 사진만 봐서는 그녀의 육체적 고통의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프리다 칼로, 1944년 멕시코시티. 강렬한 눈빛과 진한 일자 눈썹, 요란한 장신구와 타래머리에서 예술가로서 독특한 성격이 드러난다. 사진만 봐서는 그녀의 육체적 고통의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프리다의 친조부모는 독일로 이민해 자수성가한 헝가리계 유대인의 가문으로, 아버지 빌헬름 칼로는 1891년 19세의 나이에 배를 타고 멕시코로 건너왔다.

멕시코에 도착한 그는 빌헬름의 스페인식 이름인 기예르모로 바꾸고, 첫 부인과 사별 후 재혼해 두 명의 언니와 동생 크리스티나를 낳았다. 아버지 기예르모는 장인에게서 사진기술을 배워 전문 사진가로 사업을 시작했다.

프리다는 6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기형적으로 가늘어지고 오른발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사춘기의 프리다는 늘 바지를 입어 다리를 감추느라 애썼고, 이후에는 언제나 긴 멕시코 치마를 입었다.

‘목발의 프리다’라는 어릴 적의 잔인한 별명은 프리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멕시코 전통치마를 입은 이국적인 옷차림은 오히려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주위 시선을 사로잡았다.

프리다는 멕시코에 있는 독일학교 콜레히오 알레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에스쿠엘라 국립예비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시험이 어렵기로 소문난 이 학교는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프리다가 입학하던 해 처음으로 여학생 입학을 허용했고, 전교생 2000명 중에서 여학생은 프리다를 포함해서 35명뿐이었다. 프리다는 생물학이나 동물학, 해부학 같은 자연과학을 공부해서 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프리다의 예술적인 재능을 일깨워 준 사람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존경받는 판화가인 페르난도 페르난데스였다. 프리다는 페르난데스에게 드로잉을 배웠는데, 페르난데스는 프리다의 재능에 깜짝 놀랐다.

프리다는 미술에 흥미가 있었지만, 1925년 9월 이전까지는 화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프리다는 끔찍한 버스사고로 꿈도 꾸지 않았던 예술가의 길로 접어들지 않으면 안 됐다.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의 삶에는 또 하나의 인연이 있다. 1923년, 프리다가 숙명과도 같이 만난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1886~1957)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디에고는 프리다보다 스물한 살 연상으로 당시 파리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멕시코 최고의 화가였다.

1910년 일어난 멕시코 혁명 이후 멕시코 토착문화에 기반을 둔 벽화주의 운동을 이끈 기수로서 멕시코 현대미술의 위대한 기념비다.

공산주의자인 디에고는 1929년 두 번의 이혼 후 프리다와 결혼해 예술과 이념을 교감하는 동지가 됐다. 프리다는 국립예비학교의 볼리바르 강당 벽화를 그리던 디에고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던 때부터 그를 흠모해 왔다.

그때만 해도 디에고가 프리다의 가슴 속에 가득했던 시절이다. 훗날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얼마나 많은 애증을 전해주었는지,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숙명이었다.
3. <죽음에 대한 생각>, 1943년, 캔버스에 유화(Oil on Canvas), 44.5×36.3cm 4. <내 마음 속의 디에고>, 1943년, 캔버스에 유화, 76×61cm
3. <죽음에 대한 생각>, 1943년, 캔버스에 유화(Oil on Canvas), 44.5×36.3cm 4. <내 마음 속의 디에고>, 1943년, 캔버스에 유화, 76×6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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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는 멕시코뿐만 아니라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디트로이트 그리고 뉴욕의 록펠러 센터까지 벽화작업을 통해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공산주의적 성향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디에고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부심을 “디트로이트에 있는 내 벽화를 파괴한다면, 나는 마음속 깊은 고통을 느낄 것이다.

내 삶의 1년이라는 시간과 내게 있는 최고의 재능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일이면 나는 다른 벽화를 그리느라 바쁠 것이다. 나는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생리적으로 그림을 생산하는 사람이다. 나무는 꽃과 열매를 맺지만, 자신이 만든 것을 잃는다고 한탄하지 않는다. 이듬해에 다시 꽃이 피고 열매 맺을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술회했다.

프리다와 디에고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세 번의 유산으로 인한 후유증과 1939년 디에고와 여동생 크리스티나와의 불륜은 프리다에게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주었다.

그해 말, 둘은 결국 이혼을 하게 되지만, 프리다는 1년이 못돼 다시 재결합을 한다. 힘들 때마다 프리다가 기댄 곳은 결국 디에고의 사랑이었다. 격정의 세월이 지나고, 생의 마지막에도 프리다는 디에고의 품에서 떠나지 않았다.

프리다는 디에고의 초상을 여러 점 남겼다. 그중 프리다 이마에 디에고의 초상을 그려 넣은 <내 마음 속의 디에고>는 그에 대한 프리다의 강박적 사랑을 표현한다. 프리다는 디에고가 사랑하는 멕시코 전통의 테우아나 의상을 입고 있다.

테우아나는 멕시코 남서쪽에서 유래한 의상으로, 아직까지 모계사회 전통이 남아 있다. 머리에 꽂은 잎의 뿌리가 거미줄 모양으로 뻗어 있어서 프리다가 마치 디에고를 거미줄에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설치미술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거미>같이 프리다의 거미줄도 의미심장하다.

프리다의 <자화상>

프리다는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지루함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가 가져다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목수에게 딸이 쓸 이젤을 맞추었는데, 석고로 몸을 고정한 침대에 누워서 그릴 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된 것이었다.

침대도 지붕 밑면을 전부 거울로 덮는 캐노피침대로 바꾸면서 프리다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것이 프리다가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였다.

훗날 프리다는 자화상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였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그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절함마저 묻어난다.

프리다의 전신을 담은 자화상 대다수는 자신의 고독감을 반영하는 광대하고 적막한 풍경이나 비어 있는 차가운 방을 배경으로 그렸다. 모두 교통사고의 후유증이다.
5. <닥터 엘로서에게 헌정한 자화상>, 1940년, 캔버스에 유화, 59.5×40cm  6. <원숭이가 있는 자화상>, 1940년, 캔버스에 유화, 55.2×43.5cm
5. <닥터 엘로서에게 헌정한 자화상>, 1940년, 캔버스에 유화, 59.5×40cm 6. <원숭이가 있는 자화상>, 1940년, 캔버스에 유화, 55.2×43.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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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의 자화상은 작다. 누워서 그려야 하는 신체적 한계 때문에 팔이 닿을 수 있는 크기가 최대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은 결코 작지 않다. 그림 속에 담긴 프리다의 정신은 그녀의 고통만큼이나 깊고 넓다. 자화상 시리즈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냉정하면서도 번뜩이는 증오는 그녀의 육체적 고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쉬지 않고 엄습하는, 몸이 부서지는 고통과 면도칼로 베어내는 듯한 날카로움이 그녀의 표정을 굳게 막아 버렸다. 입가의 쓸쓸한 미소와 눈 아래 짙은 그늘, 경직되고 긴장한 목, 현실에 대한 집요한 질문을 던지는 시선은 분명 세상과 자신에 대한 강한 분노와 갈등의 변주곡이다.

프리다의 <두 명의 프리다>는 또 다른 느낌이다. 1939년 프리다가 디에고와 이혼한 지 얼마 안 돼 완성한 작품으로 프리다는 두 명의 다른 인격체로 등장한다.

디에고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멕시코인 프리다는 테우아나 의상을 입고 있고, 다른 프리다는 좀 더 유럽풍에 가까운 드레스를 입었다. 두 프리다의 심장은 밖으로 드러나 하나의 동맥으로만 연결돼 있다. 디에고가 받아주지 않는 프리다는 출혈로 죽을 위험에 처해 있다. 정말 죽을 것만 같은 심각한 표정이다.

마지막의 프리다
<두 명의 프리다>, 1939년, 캔버스에 유화, 170×170cm, 멕시코 현대미술관, 멕시코시티
<두 명의 프리다>, 1939년, 캔버스에 유화, 170×170cm, 멕시코 현대미술관, 멕시코시티
, 1939년, 캔버스에 유화, 170×170cm, 멕시코 현대미술관, 멕시코시티">프리다에게 1950년은 절망의 시기였다. 오른쪽 발가락 절단 수술을 받고 골수이식 수술을 받다가 세균 감염으로 3월부터 11월까지 여섯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다. 프리다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철제 코르셋과 석고붕대에 묶여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고 지냈지만, 프리다는 자신의 고통을 비웃으며 도발적인 희극을 연출했다. 방 안을 치장했고, 석고붕대에는 자신의 부서진 척추를 그려놓았다.

공산당원인 프리다는 공산당의 별과 낫, 망치가 그려진 코르셋을 착용하고 병원 침대에 누워 디에고에게 키스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게 했다. 사진만 보면 프리다의 삶이 마치 한 편의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우듯 엄숙하다. 얼마나 예술가다운 극적인 반전인가.

프리다가 세상을 뜨기 1년 전, 멕시코 현대미술관(Museo de Arte Moderno)에서 개최된 개인전 자서에 “내 그림들은 서두르지 않으며 인내심을 갖고 열심히 그린 것들이다. 내 그림들은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적어도 몇 사람은 이 부분에 관심을 가져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림이 내 삶을 완성했다. 나는 세 명의 아이를 잃었고, 내 끔찍한 삶을 채워줄 다른 것들도 많이 잃었다. 내 그림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고 적고 있다.

그림은 온전히 화가 자신의 분신이다. 몸의 고통과 유산의 회한, 디에고와의 불화가 평생 프리다 그림의 주제가 됐다. 프리다의 명성은 날로 더해져 갔다.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프리다의 <원숭이가 있는 자화상>이 소장되고, 파리 루브르미술관에서는 유리에 그린 <자화상>을 구입했다.
MOMA에 전시돼 있는 <짧은 머리의 자화상>. 1940년 디에고와 이혼한 다음, 자신의 긴 머리를 자르고 남성 차림을 해 더 이상 디에고에게 기댈 수 없는 아픈 심경을 그렸다.
MOMA에 전시돼 있는 <짧은 머리의 자화상>. 1940년 디에고와 이혼한 다음, 자신의 긴 머리를 자르고 남성 차림을 해 더 이상 디에고에게 기댈 수 없는 아픈 심경을 그렸다.
. 1940년 디에고와 이혼한 다음, 자신의 긴 머리를 자르고 남성 차림을 해 더 이상 디에고에게 기댈 수 없는 아픈 심경을 그렸다.">
프리다는 마침내 최초의 개인전이자 마지막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프리다는 척추 수술을 받고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들것에 실려와 자신의 침대에 누워 개인전 전시 오프닝으로 축하객을 맞았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뜨거운 애정을 보냈고, 프리다는 눈물의 화답으로 다시는 볼 수 없는 마지막 전시를 열었다. 전시는 대성공이었다.

1954년 7월, 프리다의 굳게 닫힌 화실 창문 밖 정원에는 유월의 차가운 비가 내렸다. 프리다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고열에 시달렸지만 의식은 극도로 맑았다. 그렇게 모진 고통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던 그녀에게도 죽음은 멀리 있지 않았다.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죽음의 사자를 그려놓고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유언처럼 적어 놓았다. 프리다는 정확히 47년 7일을 살고, 1954년 7월 13일 숨을 거뒀다. 프리다 칼로라는 한 화가의 파란 많은 생이 조용히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최선호의 아트 오딧세이] 프리다,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