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ughts on…] 소비자를 위한 교육
대형 서점에 가보면 보통 실용 서적이라는 코너에 경영 서적들이 따로 분류돼 있다. 대체로 독자들이 많이 찾고 베스트셀러도 가장 많이 나오는 분야이기 때문에 서점만이 아니라 출판사도 무척 신경을 쓴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경영 서적들이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방법을 말해주는 ‘매뉴얼’ 종류를 제외하면 대부분 CEO나 리더십을 주제로 한다는 점이다. 그게 뭐 어떠냐 싶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딘가 이상하다.

대다수 사람들은 현재 사장이 아니고 사장이 될 가능성도 희박하다. 사장도 사장 나름이겠지만 아무리 작은 기업이라 해도 사장은 한 명뿐이고 나머지는 다 직원이다. 직원에서 출발해 사장까지 오른다면 분명히 ‘출세’라고 할 수 있겠으나 모두 다 사장이 될 수는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대다수에게 필요한 경영 서적은 CEO나 리더십이 아니라 이를테면 ‘좋은 직원이 되는 법’을 다루는 책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경영 서적이라는 명칭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기업에서 누구나 경영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런 묘한 전도현상은 알고 보면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발견된다. 경영과는 달리 비교적 실용성과 무관해 보이는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음악을 보자.

음악의 3대 요소는 뭘까. 우선 음악을 만드는 창작자, 즉 작곡가가 있다. 둘째는 그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가 필요하다.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뭘까. 셋째는 바로 감상자다.

예컨대 바흐가 작곡한 무반주 바이올린 모음곡의 파르티타 D단조 2번 중 ‘샤콘’을 음악회에서(혹은 레코드에서) 정경화가 연주하고 내가 그 연주를 들었다고 해보자. 이 경우 음악의 세 요소 중 첫째는 바흐고, 둘째는 정경화고, 셋째는 나다.

예술을 상품처럼 취급해서 좀 미안하지만, 어쨌든 음악이라는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은 그 세 가지 요소로 간단히 도식화할 수 있다(미술의 경우에는 연주자라는 매개 요소가 없고 창작자와 감상자가 직접 이어진다는 차이가 있으나 그밖에는 음악과 다를 바 없다).

말하자면 작곡가와 연주자는 음악의 생산자이고 감상자는 음악의 소비자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세 요소 중 어디에 속할까.

말할 것도 없이 대다수는 셋째, 즉 소비자=감상자에 속한다. 기업에서 사장은 한 명이고 경영진은 소수이고 나머지 다수는 직원이듯이, 음악에서도 작곡가는 한 명이고 연주자는 소수이며 감상자는 그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직원들이 자신과 무관한 ‘경영’ 서적을 탐독하듯이, 음악 교육도 다수 학생들의 삶과 무관한 작곡가와 연주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전도는 음악 교육, 나아가 교육 전반에 걸친 심각한 문제점이다.

어떤 분야에서 생산자보다 소비자가 훨씬 많다면 그 분야에 관한 교육은 당연히 소비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음악 교육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전형적인 생산자 교육, 작가 교육으로 일관한다.

온 국민을 작곡가나 연주자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의도가 있다면 모르되 이것은 올바른 음악 교육이 아니며 적어도 다수를 위한 교육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다장조의 음계를 사장조로 바꾸는 것은 장차 작곡가가 되려는 학생이 아니라면 굳이 배울 필요가 없다. 으뜸음에서 5도 높은 음이 딸림음이고 5도 낮은 음이 버금딸림음이라는 이론은 장차 연주자가 되려는 학생이 아니라면 굳이 알 필요가 없다.

다른 분야에서는 생산자이지만 음악에서는 장차 소비자, 즉 감상자가 되고자 하는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조바꿈이나 화음을 만드는 이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음악을 제대로 감상하는 일이다.

비발디의 ‘사계’가 어떤 음계로 구성돼 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음악이 각 계절의 특색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느끼는 것이다. 또한 헨델의 ‘사라반드’가 바로크 시대에 궁정에서 유행하던 3분의 2박자 혹은 4분의 3박자의 느린 춤곡이라는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사라반드’가 춤곡임에도 장송곡처럼 듣는 이의 폐부를 찌른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학교의 교과과정에서 다수의 욕구를 무시하고 소수를 위한-실은 장차 음악의 생산자가 될 그 소수에게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듯싶지만-교육에 치중하는 이유는 뭘까. 교육 여건이나 기자재의 문제(예컨대 오디오 감상실의 부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교육이 전반적으로 수요자, 즉 피교육자 중심이 아닌 교육자 중심으로 편성돼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진도’를 뽑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교육의 본래 의미에 비추어 봐도 좋지 못할뿐더러 결국에는 음악의 소비 자체를 위축시켜 장기적으로는 음악 예술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학교에서 음악을 몇 년 동안 배웠어도 교향곡이나 실내악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취미로 다루는 악기 하나조차 없는-심지어 음악적 관심조차 일깨우지 못하는-사람들이 대다수인 현실은 그런 건조하고 황폐한 음악 교육이 낳은 폐해다.

음악 같은 예술 분야보다 교육의 목적과 용도가 더 뚜렷한 분야에서 그 문제는 더욱 증폭된다. 예를 들어 국사 과목에서는 조선 초의 토지제도로 과전법을 가르친다. 조선 사회의 기본 성격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제도이지만 학교와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과전법은 오히려 과전법의 본질을 모호하게 한다.

종3품 이상의 관리에게 토지 몇 결을 주고 한량관에게 군전을 주었다는 내용이나 수신전, 휼양전, 궁사전 같은 개념들은 역사학자, 그중에서도 특히 제도사학자가 아니라면 알 필요가 없다. 게다가 그런 단편적 ‘팩트’는 백과사전을 보면 다 나온다.

학생들, 나아가 일반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과전법의 기본 취지다. 명칭 자체가 과(科: 관직 체계)에 따라 전(田)을 분급한다는 뜻이듯이, 과전법은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관리들에게 급료를 주는 제도였다.

그러나 왕이 국가의 오너라는 왕토사상 때문에 토지 자체를 주지 않고 수조권(조세를 수취할 권리)만을 주었는데, 당연히 관리는 관직에서 물러나면 수조권을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는 그랬어도 신분상으로는 엄연한 양반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평생 수조권을 보유하게 되고 나중에 자식에게도 물려주게 된다.

중앙 정부는 계속 관리를 신규 충원해야 하므로 결국에는 토지 부족으로 과전의 분급이 불가능해지게 된다. 그런 탓에 과전법은 조선 초기부터 갈팡질팡한다.

3대 왕인 태종은 관리들에게 급료로 줄 토지가 부족해지자 과전을 삼남 지역까지 확대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중앙으로 오는 조세가 부족해진다. 그래서 바로 다음 왕인 세종은 다시 과전을 경기 일원으로 축소한다. 처음부터 모순을 내포한 이 제도가 온전하게 작동할 리 없다.

7대 왕인 세조는 쿠데타로 집권한 배경 덕분에 다시 과전법의 초기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직전법(職田法: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주는 제도)을 내세웠으나,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세조의 쿠데타를 도운 세력이 새로운 공신이 되고 과전은 또다시 부족해진다. 조선이 초기부터 토지제도가 삐걱거리고 경제 불안에 시달린 것은 그 때문이며, 조선 정치에서 중요한 사림파가 탄생할 수 있었던 물적 배경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것이 과전법에 관해 학생들이 알아야 할 내용이다. 하지만 역사 시험에는 언제나 과전을 분급한 내역과 각종 토지의 명칭들만 문제로 나올 뿐이다.

음악과 역사 교육, 나아가 모든 교육이 다수의 피교육자 중심으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교육자가 그런 교육을 수행하고 관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시험 문제를 내고 점수를 주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음악과 역사를 10여 년이나 배워도 시험 문제를 푸는 것 이외에 음악과 역사를 전혀 모르는 기현상은 바로 교육자 중심의 교육에 원인이 있다.


남경태

인문학 저술가 및 번역가 dimeola@empal.com
일러스트·추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