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딜러로 돈 벌어 폴로클럽 만든 이주배 한국폴로컨트리클럽 대표

성공의 기준은 여러 가지다. 자신의 영역에서 남다른 성취를 이루거나,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거나, 혹은 오랜 꿈을 이룬 경우 등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이주배 한국폴로컨트리클럽(Korea Polo Country Club) 대표는 이 세 가지 기준에 모두 부합한다.

석유 딜러로 최고 자리에 올랐고, 그 과정에서 돈도 벌 만큼 벌었다. 최근에는 오랜 꿈인 폴로클럽의 문을 열었다. 20여 년의 싱가포르 생활을 정리하고 폴로클럽 대표로 금의환향한 이 대표를 제주도 폴로 경기장에서 만났다.
[Special Interview] “폴로는 운명이자, 꿈이자, 사업”
지난 6월 12일,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 한국폴로컨트리클럽. 국내외 유명 인사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한국에서의 첫 폴로 경기가 열렸다. 경주마들의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고, 말과 호흡을 맞춘 선수들의 호흡이 거칠었다.

기자가 처음 접한 폴로 경기의 관람 소감은 한마디로 ‘박진감’ 그 자체였다. 경기가 끝나고 잠시 후, 첫 시합에 직접 선수로 뛴 이주배 한국폴로컨트리클럽 대표가 흐르는 땀을 맥주로 식히며 나타났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이 대표는 폴로의 매력을 “박진감과 도전의식”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경기 후 사교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폴로 마니아가 된 배경”이라고 덧붙였다.

“골프는 어른들의 스포츠잖아요. 하지만 폴로는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스포츠입니다. 열 살 정도만 되면 경기를 할 수 있거든요. 또한 폴로는 매너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아이들의 인성교육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유럽의 많은 귀족들이 폴로를 사랑하는 이유죠.”

폴로클럽 대표로 변신하기 전 그의 직업은 석유 딜러. 일반인들에게는 폴로만큼이나 생소한 직업이다. 대한석유공사를 거쳐 다국적 석유회사인 비톨 아시아(Vitol Asia)를 대표하는 트레이더로, 다시 한국폴로컨트리클럽 대표로 ‘말을 바꿔 탄’ 그의 성공 스토리를 들어본다.

폴로를 처음 접한 것은 언제였나요.

“2005년에 접했습니다. 처음 말타기를 배우러 간 곳이 싱가포르 폴로클럽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폴로를 보는 순간, 약간의 운명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때였습니다. 은퇴 후에 한국에 폴로클럽을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됐고, 외국의 여러 폴로클럽을 답사한 끝에 결심을 한 거죠.”

그동안 답사한 곳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클럽이 있다면 어떤 곳을 들 수 있을까요.

“호주의 밀라몰롱, 윈저, 블랙번, 리치몬드, 비다다바, 엘리시안 등을 방문했고 아르헨티나에서도 엘레스티나 등 10여 곳의 폴로클럽을 가봤습니다. 태국의 VR 폴로리조트, 말레이시아 로열셀랑고와 레저팜, 중국의 서니타임, 영국의 아스콧 파크, 미국의 타코마 등도 가봤습니다. 많죠. (웃음) 모두가 인상 깊어서, 딱히 한 곳을 말씀드리기가 그러네요.”

그 많은 클럽을 다니면서 폴로 선수들도 많이 만났겠군요. 혹시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나요.

“아주 초보일 때 호주의 밀라몰롱에 4일간 전지훈련을 간 적이 있습니다. 밀라몰롱은 시드니에서 4시간 거리에 있는 클럽인데 거기서 한 네덜란드인을 만났어요. 혼자 폴로 연습을 하고 있더군요. 얘기를 나누다 보니 한국에서 왔다는 거예요.

와이프는 발리에 두고 혼자 폴로 연습을 하러 호주로 왔다더군요. 그 사람이 현대카드 부사장인 버나드 밴 버닉이었는데, 그를 보고 한국에 폴로 하는 사람이 많은 줄 알았어요. 그때 처음 한국에 폴로클럽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하게 됐습니다. 어찌 보면 최대의 실수였죠.(웃음)”

폴로경기를 보니까 상당히 까다로운 경기인 것 같던데요. 말도 잘 다루어야 하고, 말레(폴로에 사용하는 스틱)는 마치 골프클럽 같은 느낌이던데요. 어떻게 직접 경기에 참여하게 됐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처음에는 싱가포르 폴로클럽에서 승마를 했어요. 승마를 시작하고 6개월쯤 지나 우연히 클럽에 붙은 광고를 보게 됐어요. 1년에 단 한 번 열리는 폴로 레슨에 관한 광고였습니다.

다음 월요일부터 폴로 레슨이 시작되는데, 조건이 폴로승마 실기에 합격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때까지 한 번도 폴로용 말을 탄 경험이 없었고, 일반 승마도 걸음마 단계였으니 테스트를 통과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죠.

하지만 그 기회를 놓치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절박감에 폴로 교관을 찾아 갔어요. 사타르 칸이라는 싱가포르 교관이었는데, 그 테스트에서 정말 죽도록 달렸습니다. 태어나서 가장 빨리 말을 달렸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황당하죠. 사실 폴로는 무척 위험한 스포츠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고는 규칙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규칙대로만 타면 위험은 훨씬 줄어들죠. 초보자일 때는 떨어져도 거의 다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며칠 파스만 붙이면 되거든요. 처음엔 무서워서 빨리 달리지 못해요. 큰 사고는 꼭 자만할 때 일어납니다. 말 위에서는 항상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첫 경기를 준비하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외국 선수들을 초청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
[Special Interview] “폴로는 운명이자, 꿈이자, 사업”
“선수를 초대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선수들이 매우 오고 싶어 했습니다. 폴로의 세계는 매우 작습니다. 아시아의 폴로 선수라야 500명 안팎이거든요.

한국에 폴로클럽을 만들었다는 소식에 가장 기뻐한 사람들이 외국의 폴로 플레이어들이었습니다. 폴로를 하는 사람들은 모두 친구입니다. 폴로 선수들의 결속력은 놀라울 정도죠.”

싱가포르에서 석유 트레이딩을 통해 많은 부를 쌓았다고 들었습니다.

“석유 중에서도 휘발유 트레이딩을 했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비톨은 다국적 석유회사인데, 싱가포르에 비톨 아시아 본부가 있습니다. 4명의 비톨 아시아 디렉터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제가 들어갈 때는 비톨이 업계 5위였지만, 지금은 1위로 올라섰습니다. 회사가 성장하면서 제게도 혜택이 있었죠. 한 해에 100억 원 이상을 받은 적도 있으니까요.”

연봉이 그 정도 수준이었나요.

“아닙니다. 비톨은 보수 체계가 좀 다릅니다. 직원들은 연봉과 성과급, 거기에 주주로서 배당금을 받습니다. 디렉터가 받는 성과급은 이익의 10% 정도입니다. 여기에 해마다 배당금을 받습니다.

비톨은 모든 직원들이 주식을 받는데 처음 비톨에 입사했을 때는 전체 주식의 0.5%를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최고 1.45%까지 주식을 보유했는데, 매년 그만큼의 배당금을 받는 거죠. 대신, 회사를 그만두면 모든 주식을 회사에 되팔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비톨 아시아에서 근무한 것은 아닐 텐데, 석유 트레이딩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첫 직장은 유공(대한석유공사)이었습니다. 지금의 SK에너지죠. 그곳에서 5년간은 국내 석유 수급을 담당했는데, 국내에 한정된 게 재미가 없어서 해외 파트를 자원했습니다.

1994년까지 그곳에서 일하다 비톨 아시아 한국 지사장으로 옮겼죠. 좀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 다시 싱가포르로 갔어요.”

싱가포르 생활 초기에 힘든 점은 없었나요. 혹시 아내의 반대는 없었나요.

“와이프를 무척 사랑하기는 하지만, 업무에 대해서는 거의 의논을 하지 않는 편입니다. 싱가포르로 근무지를 옮기는 것도 통보하는 식이었어요. 와이프에게 통보하고, 먼저 가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내와 애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싱가포르로 가게 된 거죠. 초반에 고생도 좀 했습니다.”
이주배 대표는 폴로 경기장 오픈에 이어 6만5000평의 부지에 빌라와 타운하우스도 건립 중이다.
이주배 대표는 폴로 경기장 오픈에 이어 6만5000평의 부지에 빌라와 타운하우스도 건립 중이다.
비톨 아시아에서는 처음부터 성과가 좋았습니까.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제가 가기 전까지 휘발유 분야는 적자였어요. 첫해에는 저도 적자를 봤습니다. 그랬더니 매니저가 한국 지사로 돌아갈 생각이 없냐고 그러더군요. 한국으로 보낼 거면 그만두겠다고 버텼죠. 다음해부터 흑자를 냈어요.”

흑자를 낸 비결이라면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요.

“노력도 노력이지만 운도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휘발유 수급에 큰 변화가 있었어요. 중국이 휘발유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거든요. 구멍가게에서 큰돈을 벌 수는 없잖아요. 시장이 커지니까 먹을 것도 많아진 거죠.

그리고 이건 좀 전문적인 건데, 가격 정보가 어느 정도 고정됐어요. 선물은 그때그때 가격을 알 수 있지만, 현물은 그걸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산 사람과 판 사람이 이야기하는 가격이 달랐거든요. 그런데 ‘플래츠(Platts)’라는 잡지에서 거래 정보를 공시하게 됐어요. 여러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오후 4시 35분에서 5시에 거래된 가격을, 기준가격으로 책정한 거죠.

저희같이 큰손이 개입하면 어느 정도 가격 조정이 가능해진 거죠.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던 건, 이런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현물과 선물을 같이 했나요.

“트레이더의 성향에 따라 포지션을 정합니다. 저는 50 대 50 정도로 투자했습니다. 트레이딩을 할 때 유공에서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정유회사라고 1년 내내 공장을 돌리는 것은 아니거든요.

1년에 한두 달, 쉴 때가 있는데, 이런 일정을 알면 선물 예측에 큰 도움이 되죠. 현물을 아니까, 선물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던 거죠. 선물만 하는 트레이더들은 현물 시장을 잘 모르거든요.”

지금은 싱가포르와 한국을 오가며 생활하나요.

“당분간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폴로클럽이 전부 지어진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 클럽이 총 6만5000평인데 현재 폴로경기장과 게스트하우스 외에 빌라와 타운하우스를 짓고 있습니다. 2차 부지에도 타운하우스를 지을 예정이고요.”

폴로클럽이 어떤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쉬면서, 즐기는 거죠. 자연 속에서 승마도 배우고 폴로도 즐기면서 여유롭게 보내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