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전칠기 컬렉터 장현자 나은크래프트 대표

[The Collector] “화려함의 극치, 나전칠기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장현자 나은크래프트 대표는 20대에 나전칠기의 매력에 빠져, 30년을 나전칠기와 관련된 일을 해왔다. 20년 전부터는 대중에게 나전칠기를 보급하기 위해 직접 제작에 뛰어들었고, 최근에는 나전칠기와 미술 작품을 접목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남산 힐튼 호텔에 있는 전시장에서 장 대표를 만났다.

나전칠기는 목기에 자개로 무늬를 놓아 천연 도료인 옻칠을 한 것이다. 나전칠기 공예품은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지역에서 기원전부터 발달해왔다. 특히 한국의 나전칠기는 화려함을 바탕으로 고려 시대부터 외국 사신이나 왕의 선물로 쓰였다. 나은크래프트는 역사 속 나전칠기를 현대에 끌어와 현대생활에 유용하도록 다양한 공예품을 선보이고 있다.

나전칠기 애호가들이 사이에 고풍스러움과 모던함이 조화를 이룬 나은크래프트의 제품은 예술품으로까지 평가받는다. 지금의 나은크래프트가 있기까지 장현자 대표의 30년 나전칠기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도자기에서 나전칠기로 이어진 예술품 사랑
[The Collector] “화려함의 극치, 나전칠기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30년 전, 장 대표의 첫 예술품 사랑은 도자기였다.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 도자기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도자기와 관련한 비즈니스를 하던 지인의 집에는 흔하지 않은, 귀한 도자기가 많았다.

그때 일을 계기로 지인이 운영하던 도자기 숍에서 일을 배웠고, 이듬해에 자신의 도자기 숍을 차리기에 이른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도자기 숍 옆 가게가 마침 나전칠기점이었다. 바로 옆에서 나전칠기를 보면서 나전칠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그는 도자기보다 나전칠기에 빠진 자신을 발견했다.

도자기 숍을 정리하고 나전칠기점을 연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다. 그렇게 문을 연 게 나은크래프트의 전신인 나은하우스다. 그게 1978년의 일이다.

“화려한 아름다움만으로 치면 나전칠기를 따라올 게 없어요. 예전 사랑방에서는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간결한 가구를 썼지만, 안방에는 나전칠기로 만든 화려한 가구들로 꾸몄거든요.

저는 규방에서 쓰던, 화려한 나전칠기가 좋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전칠기를 천한 것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나전칠기는 궁에서 쓰던 공예품입니다. 궁에서 천한 것을 쓸 수 있었겠어요.”

처음에는 장인들이 만든 제품을 받아 팔았지만, 20여 년 전부터는 제작까지 하게 됐다. 나전칠기를 찾는 이들이 줄면서 장인들도 하나둘씩 직업을 바꾸었다. 이를 보다 못해 그는 장인을 고용해 직접 제작에 뛰어들었다.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나전칠기로 만든 장롱이 부의 상징이었다. 나전칠기로 만든 장롱 하나 가격이 웬만한 집 한 채 가격에 버금갔다. 하지만 악화가 양화를 부른다고 했던가.

수요가 많아지면서 수준이 떨어지는 제품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장인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됐다. 나전칠기 비즈니스를 계속 하기 위해서도 자체 제작은 피할 수 없었다.

중국 영향 벗어난 1800년대가 나전칠기의 절정기
[The Collector] “화려함의 극치, 나전칠기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직접 제작에 뛰어들며 공부를 더 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공부는 좋은 작품을 보는 것. 박물관을 찾아 옛 작품을 보며 공부도 하고 영감을 얻기도 했다. 그는 중국의 영향이 완전히 배제된 1800년대 이후 작품을 최고로 친다.

“고려 시대 제품은 귀족적이고 화려하지만,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독창성이 부족해요. 조선 시대 초기까지는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죠. 물론 차이도 있죠.

고려 시대는 입식 문화였고, 조선 시대는 좌식이 중심이었잖아요. 제품에 차이가 있었죠. 하지만 가장 큰 차이를 보인 것은 18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예요. 이때부터 중국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한, 독창적인 제품이 나왔거든요. 나전칠기가 절정을 이룬 시대였죠.”

나은크래프트는 조선 시대 나전칠기가 누렸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 덕에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외국에서 열린 가구 전시회 등에서 그 성과를 확인할 수 있다. 나은크래프트 제품을 본 많은 외국인들이 그 화려함에 경도됐다. 자개의 다양한 색깔과 장인의 정교한 장식에 경탄하지 않는 외국인이 거의 없을 정도다.

장 대표는 한국 나전칠기의 매력을 국산 자개의 아름다운, 그리고 자개를 얇게 패각하고 조각하는 장인들의 기술에서 찾는다. 자개를 얇게 패각하는 기술은 높은 수준의 기술을 요하는데, 이 기술을 익힌 장인은 어떤 공예도 가능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옻칠도 나전칠기의 매력을 배가하는 요소다. 칠장이들은 흔히 ‘옻칠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옻칠은 장점이 많다. 옻칠은 칠을 한 후 2년 동안 조금씩 색깔이 변한다.

처음에는 자개와 목재의 색깔이 어울리지 않던 제품도 시간이 지나 옻이 제 색깔을 찾으면 아름다움이 살아난다. 장인들은 이를 ‘옻 색깔이 핀다’고 표현한다. 이밖에도 옻은 내구성, 내습성, 내산성 등이 강해 오랫동안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The Collector] “화려함의 극치, 나전칠기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소반에서 차통, 가구까지 다양한 컬렉션

장 대표는 30년 동안 나전칠기를 봐도 지겨운 적이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세월이 지날수록 새로운 매력이 살아났다. 때문에 집이며 전시장 등에 적잖은 소장품을 갖고 있다.

컬렉션 중에는 조선 시대 제품부터 일본에서 사온 제품도 있고, 나은크래프트에서 만든 것 중 팔기가 아까워 소장하는 제품도 있다. 그는 애정이 담뿍 밴, 이런 컬렉션을 앞에 두고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가장 즐겁다고 했다.
[The Collector] “화려함의 극치, 나전칠기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
좋아하는 제품도 조금씩 변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쓰는 소반이 좋았다. 좌식 문화의 유물인 소반은 간결하고 담백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러나 나전칠기의 진짜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조선 시대의 화려한 규방용품들이다. 컬렉션 중에는 안방을 가득 차지하는 장롱 같은 제품도 있지만 그는 차통이나 보석함 같은 소품도 좋아한다.

“사실 우리나라의 차 문화가 새롭게 조명을 받은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하지만 고려 시대 다완 같은 다구를 보면 우리 차 문화가 얼마나 오랜 역사를 이어왔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던 것이 일제 시대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의해 사라진 거죠. 애착이 많이 가서인지 적잖은 수를 모으게 된 듯해요.”

나전칠기도 새로운 조망을 받게 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5년 전만 해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나전칠기를 한다는 말에 “쟤는 뭐 저런 걸 한다니?”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장 대표는 나전칠기에 바친 30년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고 회상한다.

“최근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나전칠기를 찾는 분들이 많이 늘었어요. 참 다행스러운 일이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도 돼요. 나전칠기에 관심이 모아지면서 옻칠이 아닌, 일반적인 칠을 한 상업적인 제품이 범람하고 있거든요.

그런 제품으로 인해 나전칠기 본연의 아름다움이 상쇄될까 걱정입니다. 전통을 살린 나전칠기가 인정받고, 나전칠기 장인들이 제대로 된 대접을 받았으면 해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남이 미치지 못할 경지에 오르려면 내가 미치지 않고는 안 된다. 나은크래프트 장 대표를 만나는 동안 이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