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랑 이숙영 관장 & 김방은 실장

[Family Business]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3대의 지독한 그림 사랑
국내 상업 화랑의 역사가 40여 년을 넘어서며 가업을 잇는 화랑이 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예화랑이다. 이숙영 예화랑 관장의 선친이 세운 천일화랑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3대째 갤러리를 운영하는 셈이다. 오랜 세월 예술과 함께한 한 집안의 행복한 이야기를 담았다.

"외할아버지가 천일백화점 사장을 지내셨는데, 그림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외갓집에 가면 그림과 골동품이 항상 많았어요. 어려서부터 그런 외갓집이 좋았어요. 자라면서 미술이 아닌 다른 직업을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었어요.”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의 랜드마크가 된 예화랑 1층에서 만난 김방은 실장. 두 아이의 엄마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천진한 웃음이 인상적인 그는 예술과의 인연을 그렇게 설명했다.

그림, 골동품 등이 항상 있던 유년의 기억

김 실장이 기억하는 유년의 풍경에는 늘 그림이 있었다. 천일백화점 사장이던 외할아버지는 화랑을 운영할 정도로 평생 예술을 사랑했다. 친가도 예술계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가 한국화의 대가를 사사했는데, 그 인연으로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예화랑의 초기 기획전은 모두 두 집안의 컬렉션이 바탕이 됐다. 예화랑이 문을 열고 가진 첫 전시회가 동양화 명품전. 두 말할 나위 없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소림과 심전의 작품이 중심이 됐다. 두 번째로 기획한 서양화 명품전은 외할아버지의 컬렉션이 중심이 됐다.

사업가이면서 예술을 사랑했던 외할아버지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 덕에 예술가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았다. 김환기, 도상봉, 박수근 등 한국 화단을 관장하는 작가들이 외할아버지와 직·간접으로 인연을 맺었다. 서양화 명품점은 이들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이런 분들 작품을 보고 자랐으니 제 눈이 얼마나 높았겠어요. 대학 때 그림을 계속할지, 다른 길을 선택할지 고민을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눈높이가 올라갔으니 제 그림이 눈에 찼겠어요. 다행히 미술사를 좋아했거든요. 도록으로만 보던 그림도 직접 보고, 공부도 더 하고 싶어서 대학 졸업하자마자 유학을 갔죠.”

“내가 보기엔 얘 그림 괜찮았어요.” 약속 시간보다 늦게 나타난 이숙영 관장이 김 실장의 말을 잘랐다. 서울오픈아트페어 준비로 바빠서 늦었다고 양해를 구한 이 관장은 그러나 더 이상 말을 아꼈다. 자신은 그간 매스컴을 많이 탔으니 김 실장 위주로 인터뷰를 해달라고 했다. 그게 어머니의 마음이다.

이 관장은 김 실장의 그림이 나쁘진 않았지만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갤러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작가의 길이 너무 험하다는 사실이었다. 이 관장은 딸이 그저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Family Business]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3대의 지독한 그림 사랑
세상의 밝은 면만 보여준 어머니

이 관장은 김 실장의 유학도 그리 반기지 않았다. 자신의 슬하에서 세상의 밝은 면만 보고 자란 김 실장이 이역만리, 타국에서 겪어야 할 고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김 실장은 그 탓에 영국 생활이 아무리 힘들어도 어머니에게 아프다는 말 한 마디 못했다. 그랬다간 ‘당장 돌아오라’고 할 게 뻔했다.

“어머니는 ‘지나가다 말 거는 사람은 모두 사기꾼’이라고 하셨어요. (웃음) 그 탓에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연애 한 번 못해봤어요. 대학원(갤러리 경영학)을 마친 후에 제 생각은 뉴욕의 갤러리에서 경험을 좀 쌓고 싶었어요. 그때는 동양 여자에 대한 호감이 있던 때라 일자리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거든요.”

좀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던 그의 소망은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외국에서 고생하는 딸을 보다 못한 이 관장이 귀국을 종용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 딸은 한국으로 돌아왔고,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아버지는 딸이 대학에서 계속 강의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김 실장은 어려서부터 익숙한 갤러리가 좋았다. 결국 어머니가 평생을 가꾸어온 예화랑에 둥지를 틀었다.

어머니와 딸은 닮은 듯 다르다. 모녀가 모두 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한 후 갤러리스트가 됐다. 하지만 어머니가 갤러리를 운영하던 때와 딸이 갤러리를 운영하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 관장은 예화랑이 문을 연 1970년대만 해도 화랑 운영이 수월했다고 한다. 그때는 오지호, 권오균, 남관, 장욱진 등 컬렉터들이 선호하는 대가들이 정해져 있었다. 거래도 이들 대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Family Business] 할아버지 대부터 이어온 3대의 지독한 그림 사랑
그러나 최근 들어 작가군도 다양해졌고, 작품들도 변했다. 이 관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고한 대가들의 작품, 그중에서도 유화를 좋아한다. 이 관장은 다양한 소재의 작품들이 나오지만, 아직까지는 유화를 대신할 만한 재료가 없다고 생각한다.

컬렉터들의 변화도 눈에 띈다. 예전에는 대가들의 작품을 주로 찾았지만, 지금은 젊은 작가라도 컬렉터들의 기호에만 맞으면 거래가 된다. 그만큼 갤러리 운영에 젊은 피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갤러리 경영학을 공부한 딸이 큰 도움이 된다. 실제로 이 관장은 서울오픈아트페어를 준비하며 김 실장이 큰 도움이 됐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오래된 화랑의 힘은 작가와의 신뢰

물론 김 실장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게 더 많다. 오랫동안 관계를 이어온 작가들은 어머니가 물려준 가장 값진 선물이다. 어머니는 김 실장에게 작가와의 신뢰를 자주 강조한다. 갤러리 입장에서 작가와의 신뢰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 최근 문을 연 갤러리들 중에는 전시회를 준비하며 이메일로 필요한 작품을 보내달라는 경우가 가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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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실장은 좋은 갤러리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전시는 화랑과 작가가 함께 준비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정도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작업실을 오가며 전시의 콘셉트를 정하고, 작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통해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게 김 실장의 지론이다.

김 실장은 어머니를 통해 그걸 배웠다. 화단에는 이 관장과 오랫동안 친분을 이어온 작가들이 많다. 김 실장은 어머니가 그간 쌓아온 신뢰 덕을 많이 본다. 처음 만나는 작가들도 그를 어머니 보듯 반가워한다. 가끔은 어머니가 들려주지 않은 옛날이야기도 해준다. 대표적인 이가 오랫동안 예화랑과 인연을 맺어온 재미 작가 김원숙이다.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얘기예요. 전시회 준비로 어머니를 만나는 거니까, 비행기 안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드셨겠어요. 첫 만남이니까 작품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이 되셨을 거잖아요. 그런데 공항에서 김 선생님을 보시고는 작품 얘기는 않고 “사진보다 예쁘시네요” 하더래요. 예쁘다는 말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 그 한마디로 자칫 딱딱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푸신 거죠.”

김 실장은 어머니의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든다. 자라면서 어머니가 누구를 험담하거나, 나쁜 말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김 실장은 그런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갤러리를 운영하려고 노력한다.

글 신규섭·사진 서범세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