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 작가 박용인 & 김인화

[Friends] 늦은 나이에 만나 한 길을 걷는 화우(畵友)
박용인 화백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구상 화가로, 채도가 높고 화려한 그의 작품은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화단에서 부지런하기로 유명한 그는 아침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작업에 몰두한다. 30년 넘게 스스로를 가둔 서울 중곡동 작업실에 화우인 김인화 작가가 오랜만에 발걸음 했다.

박용인 화백의 그림은 아름다운 색채가 특징이다. 그의 색들은 캔버스에 오르기 전 팔레트 위에서 배합된다. 때문에 채도가 높아 색상이 선명하고 화려하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어두운 색을 꺼리는 반면 그는 검정에 가까운 어두운 색을 기조로 한다.

그 위에 황색, 청색, 초록, 보라 등을 대담하게 대비시킨다. 구성의 단순함은 작가 박용인의 또 다른 특징이다. 대상을 단순화하고 평면적인 채색기법을 이용한 그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명쾌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세련된 구성미와 서정성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구상전, 제주 현대미술관 개인전 준비로 분주한 요즘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후 한때 추상화에 빠졌던 박 작가가 일상적인 풍경에 몰두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초 프랑스 파리 유학 이후부터다.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파리에서의 생활을 통해 비로소 저만의 색깔로 회화적 독창성을 발견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래된 건물 3층에 자리한 그의 작업실은 그의 손길을 기다리는 미완의 작품들로 빼곡했다. 작업을 하다 기자 일행은 맞은 작가는 손수 커피를 내오며 전시회 준비로 바쁜 근황을 들려주었다.

“좀 있으면 예술의전당에서 ‘2010 한국구상미술대제전(이하 구상전)’이 있고, 5월 중순에는 제주도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열립니다. 6월에는 인사아트센터에서 아들-조각을 하는 박건원 작가가 그의 아들이다-과 함께 ‘예술가족초대전’을 엽니다. 지금은 제주도 개인전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네요.”

듣고 보니 작업실에는 제주도의 풍광을 담은 작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는 작품을 시작하기 전 몇 번이나 제주도를 다녀왔다고 했다. 제주도를 여행하며 카메라에 담고 가슴에 품은 풍경, 그리고 그때의 감흥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프랑스 유학 이후 대부분의 작품이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했다.

세계 곳곳,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아시아, 미국, 중앙아시아, 유럽 등 수많은 지역을 여행했다. 실제로 작업실 한쪽에 그가 세계를 누비며 촬영한 사진집들이 서가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포카라에서 본 안나푸르나>, <암스테르담의 추경>, <쥬리히의 풍경>, <인터라켄에서 본 융푸라우> 등이 그렇게 탄생했다.

그가 여행 이야기를 시작할 무렵, 화우인 김인화 작가가 작업실로 들어 었다. 박 작가와 같은 구상 작품을 하는 김 화백은 연꽃 그림으로 유명하다. 화려한 색감의 연꽃과 연잎에 맺힌 물방울이 특징적인 그의 작품은 특히 일본에서 유명하다. 작업실에 들어선 후 작품을 죽 들러본 김 화백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림의 소재와 예술적 영감을 찾아 떠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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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화(이하 김): 제주도는 대작 위준가.

박용인(이하 박): 100호짜리가 몇 개는 있어야 갤러리를 매울 거 아냐. (웃음)

김: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박: 여행 얘기를 하고 있었어. 참, 이 친구가 산을 아주 좋아합니다. 한국 산 중에 안 가 본 곳이 없을 겁니다.

김: 얼마 전에는 엄홍길 대장하고 네팔을 다녀왔어요. 엄 대장이 거기서 학교 짓는 일을 하고 있거든요. 그걸 좀 돕느라고요.

박: 여행도 좋아합니다. 함께 여행을 간 적도 있고요. 남미 여행인가, 그때도 함께 갔잖나. 그게 아마 1995년일 거야, IMF 전이었으니까. 아마존에서 마추픽추까지 갔나 그랬지. 그림 그리는 다른 친구들하고, 우리가 직접 스케줄 짜서 갔잖아.

김: 그때 다녀와서 스케치전을 했지, ‘마야-잉카 스케치전’. 여행을 가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하잖아요. 함께 여행을 가서 이 친구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전에도 부지런한 건 알았지만, 그렇게 부지런할 수가 없어요.

늦게까지 술을 먹어도 제일 먼저 일어나서 사람들을 챙겼으니까요. 작업할 때도 밤새 술을 마셔도 아침에 여기 나와서 라면 한 그릇 끓여먹고 바로 작업을 하거든요.

박: 여행에서 중요한 게 배려예요. 그런데 지금까지 같이 여행 다니는 걸 보면 우리 잘 맞는 편인 거 같네. 사실 작가들이 하는 여행은 일반적인 관광이 아닙니다. 그 나라의 문화를 느끼고 체험하는 장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개인전을 하고 나면 여행을 떠납니다. 한 달 정도 개인전을 하고 나면 멍 하니 작업도 안 되거든요. 그때 새로운 소재도 찾고, 기분 전환도 할 겸 짐을 싸는 거죠. 남미도 그렇게 떠난 겁니다.

잉카문화와 아즈텍 문명을 보기 위해 계획한 거죠. 거기서 많은 영감을 얻었고, 마음에 드는 풍경은 대부분 카메라에 담아왔어요. 그걸 바탕으로 작업을 할 때가 많아요.

김: 그런 건 나하고 똑같네. 저는 산을 많이 타니까, 산 사진이 많습니다. 어떤 산은 사계절, 다른 모습을 촬영한 곳도 있습니다.

박: 나는 하루 24시간 풍경을 파노라마식으로 촬영한 적도 있어요. 마테호른에 갔을 땐데,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하루 종일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 거기도 같이 갔잖나. 어디 거기뿐입니까. 프라하, 터키, 트로이…. 많은 곳을 함께 했죠. 기간도 짧지 않습니다. 남미는 20일, 유럽은 보름 정도 갑니다.
1. <하롱베이 100M> 2. <파리> 3. <파리의 풍정A>
1. <하롱베이 100M> 2. <파리> 3. <파리의 풍정A>
2. <파리> 3. <파리의 풍정A>">
마티에르를 살리고 동시에 동양화의 느낌을 주는 작품

두 사람의 인연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자주 왕래하며 술친구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이 들어 사귄 친구인 셈이다. 그래서 그 존재가 더 중하고 귀하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술잔을 기울인다는 두 사람.

약속 장소와 시간을 굳이 정할 필요도 없다. 시간은 대부분의 전시가 시작되는 수요일 오후, 장소는 갤러리가 밀집한 인사동이다. 가끔은 하루 일과를 마친 저녁, 박 화백이 김 화백의 중계동 작업실을 찾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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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작품 경향이 다른 것도 우리가 친해지는 데 도움이 됐을 겁니다. 외국 작가들 중에는 동료 화가가 오면 캔버스를 뒤집어 놓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작가들도 경쟁을 하니까요. 신제품 개발할 때 극비로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김: 작가라면 다른 작가의 작업실은 안 가는 게 맞다고 봐요. 자주 접하다 보면 의도는 아니지만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박: 하지만 우리는 작품 경향이 다르니까 그냥 이렇게 놔둡니다. (웃음) 이 친구는 산을 많이 다녀서 그런지, 산 그림이 많아요. 설악산을 그린 작품은 산의 기백을 그대로 옮겨놓았거든요.

연도 많이 그리는데, 이 친구의 연은 다른 작가들이 그리는 연하고 달라요. 아침이슬을 머금은 듯한 연잎과 연꽃은 생명의 기운, 그 자체를 느끼게 합니다.

김: 저는 등단이 또래보다 늦었지만, 박 선생은 젊어서부터 인기 작가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박 선생 작품을 평하기는 좀 그러네요. 하지만 친구로 본받을 점은 참 많아요. 후학들 돌보고, 그 나이에도 그렇게 열심히 작품 하는 거 보면 부럽기도 하고 ‘참, 대단하다’ 싶어요. 박 선생은 나이프로 작업을 하거든요. 얼마나 열심히 그리는지 나이프가 닳았을 정도예요.

박: 젊어 태권도를 했는데, 그때 체력이 작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듯해요. 사실 나이프는 마티에르(matiere)를 넣기 위해 쓰기 시작했던 겁니다. 나이프로 작업을 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살리기 위해, 뭉개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야 먹이 화선지에 스며드는 듯한 부드러운 느낌을 살릴 수 있거든요. 마티에르를 살리면서 동양화의 먹에서 느껴지는 농담을 동시에 표현하려 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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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다른 작가들도 나이프로 작업을 하고 뭉개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그러면 색깔이 뜨는 느낌이 들거든요. 박 선생 작품은 그런 게 없이 선명해요. 그게 특징이죠.

11시가 넘어 시작된 인터뷰는 점심시간을 훌쩍 넘겨 끝이 났다. 간단하지 않은 사진 촬영을 마치고 일행은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이 자주 찾는다는 보신탕집이었다. 반주를 곁들인 식사시간 내내 두 사람은 시간을 되돌려 옛이야기를 했다.

여행 후일담에서 술에 얽힌 에피소드, 박 화백의 콧수염에 얽힌 갖가지 별명(오마 샤리프에서 김흥국까지) 등 재미난 사연까지 두 사람의 정겨운 대화는 끊일 줄을 몰랐다.

끊어질 것 같지 않던 정담은 오후 4시가 다 돼 끝이 났다. 식당을 나선 두 사람은 수요일 인사동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며 각자의 작업실로 향했다. 익숙한 풍경처럼 각자의 길을 가는 두 사람을 보며, 저렇게 나이를 먹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