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 컬처 디자이너 사보

[Artist] “그때그때 상황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사보(sabo). 본명 임상봉 나이 44세. 성악을 전공하던 음악학도로 1995년 독일 유학을 떠난 지 4개월 만에 미술대학에 합격하는 기염을 토함. 슈투트가르트 국립 미술대학에서 비주얼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했으며, 스승은 스위스 태생의 세계적인 전시 포스터 디자이너 니콜라우스 트록슬러(Nicolaus Troxler).

독일에서 8년, 미국에서 2년간 지낸 후 2005년 서울로 돌아와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비롯해 그래픽 디자인, 가구 디자인, 공간 디자인, 아트 디렉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특한 감각을 드러내고 있음. 또한 빈티지 소품 컬렉터로 시대를 아우르는 의자, 가구, 조명 다수 소장함.

간단하게 요약한 인적 사항에서도 드러나듯 사보는 화가 혹은 디자이너라는 특정 단어로는 설명이 안 되는 사람이다. 달궈진 팬 위에서 콩알이 튀듯 그의 관심과 아이디어는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사방으로 튕겨지기 때문이다.

자칭 멀티 컬처 디자이너인 그의 위트 넘치는 발상은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미술 학원을 다녀본 적도 없던 그가 미술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교수들이 그의 참신한 아이디어를 높이 산 까닭이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독일에는 오징어 요리가 다양하지 않아요. 평소 좋아하던 오징어가 먹고 싶어서 저 혼자 그림도 그리고 콜라주도 하고 <오징어 이야기>라는 동화책을 만들었는데, 우연찮게 미술대학에 지원해서 포트폴리오로 제출했던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 몇백 명의 지원자 중 포트폴리오를 검토해서 50명을 추리고, 이틀간의 실기 시험과 면접 심사로 15명을 선발한 거라더군요. 그중 외국인 학생 정원은 1명이었는데 제가 뽑힌 거죠. 정말 운이 좋았어요.”

독일에 간 지 반년도 채 안됐을 때이니 독일어는 기초적인 몇 마디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실기 시험장에 도착하니 독일어로 된 A4 용지를 나눠주더니 읽어보고 내용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두 작품 이상 완성하라는 것이다.

시험 시간은 오전 9시부터 5시까지인데, 사전을 찾아가며 내용을 파악하고 나니 오후 2시였다. 작품을 한 점밖에 완성 못했는데 5시에 종이 울리자 여지없이 시험을 종료했다.
[Artist] “그때그때 상황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최소한 두 작품은 제출해야 하는데, 한 점 밖에 못 냈으니 떨어질 게 뻔하더라고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억울함이라도 풀자 싶어 내용 파악을 못해서 늦은 건데 좀 더 시간을 주어야 하지 않느냐며 유창하지도 않은 영어로 따졌죠. 그런데 다들 저를 보고 웃는 거예요. 그러더니 ‘오징어 그린 학생 맞지’ 하면서 자신들은 양으로 평가하지 않으니까 걱정 말라고 하더군요.”

다음날 그를 위한 배려였을까. 제시된 문제는 딱 한 문장, ‘잡지 표지를 디자인하라’는 것이었다. 기적은 면접날에도 이어졌다. 예상 질문을 뽑아서 작성한 뒤 달달 외웠는데, 대부분 적중했던 것이다.

나의 느낌을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표현한다
[Artist] “그때그때 상황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사보는 독특하고 유쾌한 사고를 가진 아티스트다. 이런 성향은 밝은 색감과 캐릭터를 지닌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물에 불어서 무다리가 된 오리, 탈·부착형 날개가 달린 천사(잠잘 때에는 머리맡에 날개를 떼어두고 잔다) 등 위트가 곁들여진 그의 그림은 재미나다.

독일 유학 초기, 문화적 차이와 의사소통이 잘 안 돼 겪은 에피소드를 엮은 책이 압권. 실내 수영장에서 맞닥뜨린 꼬장꼬장한 독일 할머니, 김치찌개 냄새에 득달같이 달려온 주인집 아저씨 등을 소재로 짤막한 글과 그림이 어우러진 내용은 낯선 곳에서 적응해 가는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일러스트 작업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나의 경험담을 사심 없이 표현하고 제 눈에 관찰되는 모습, 그때그때 상황에서 느껴지는 감성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거죠.

그런데 사람을 표현하는 게 제일 힘든 것 같아요. 물건은 고유의 특징이 있고 동물은 본능에 따라 행동하니까 간단하거든요. 반면 사람은 쉽게 파악이 안 돼요. 어떤 때는 천사처럼 아름답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야욕에 넘치고 하여튼 카멜레온보다 더 많은 색깔을 가진 게 인간이죠.”

사보의 튀는 감각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공감대가 형성되는 듯하다. 학습 교재에 들어가는 일러스트레이션 선정 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요즘에는 외국어고등학교에서 사용할 독일어 교재의 이미지 작업을 하고 있다.

사실, 비용을 고려하면 작품 가격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지만 모든 것의 기준이 ‘돈’이 될 수는 없는 법. 순수 회화와 달리 국내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은 그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구분에서 벗어나 화인 아트와 일러스트 작업이 교류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 그의 바람이라고 한다.
유학시절 그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가구, 조명 등 디자인 제품을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문화적 충격을 크게 받았다.
유학시절 그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가구, 조명 등 디자인 제품을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문화적 충격을 크게 받았다.
디자인은 삶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디자인에 문외한이던 그가 독일 디자인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학교 옆에 자리한 1920년대에 형성된 바우하우스 예술가들의 이주촌 덕분이었다.

“주말이면 일본 단체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거예요. 호기심에 저도 그곳을 드나들며 디자인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바우하우스에 대해 공부하게 됐죠. 바우하우스의 구심점이 됐던 미에스 반 데 로에, 마르셀 브로이어 등이 만든 건축, 가구, 조명, 의자 등을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디자인 물건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유럽의 디자인 문화를 접하면서 문화적 충격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1960~70년대, 우리는 그야말로 ‘생존’ 문제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들은 컬러와 디자인 감각을 살린 이런 제품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브랜드와 유행을 좇지 않고 집집마다 자기의 개성과 스타일을 담아 꾸미고 생활하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어떤 친구는 빨간색 가구로 인테리어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친구는 군더더기 장식 없이 심플하게 미니멀한 분위기로 꾸미기도 하고. 이후 디자인 관련 서적을 읽고, 전시도 보러 다니고 낯선 디자이너의 이름이나 독특한 디자인 제품을 발견하면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하다 보니 안목과 지식이 생기더란다.

오는 6월, 그는 그동안 모은 디자인 가구와 소품으로 청담동 PKM 트리니티 갤러리를 꾸미고 전시회를 갖는다. 평소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좋은 기회가 될 듯하다.

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