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교육문화재단 설립한 한창우 마루한 회장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 살 때 밀항선에 몸을 실은 채 일본으로 밀입국, 50년 만에 일본 17위 거부(巨富)로 성장한 한창우 마루한 회장의 인생역정은 성공 신화 그 자체다.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겨 부모님이 물러주신 ‘한창우’ 이름 석 자를 아직도 고집하고 있는 그가 팔순을 넘겨 자신의 뿌리인 고향땅을 찾았다.

자신과 같이 불우한 인재들을 ‘될성부른 나무’로 키우기 위해 교육문화재단을 설립하는 것이 이번 고향 방문의 목적. 지금은 사천시로 바뀐 옛 삼천포 앞바다에서 그를 만났다.
[Noblesse Oblige] “미래 유망주 육성하는 한국판 ‘마쓰시타정경숙(政經塾)’이 제 꿈이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 해요.’

지난 5월 2일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딴 ‘한창우·나가코 교육문화재단’ 발족식 후 가진 축하 공연 중 가수 인순이의 노래 ‘거위의 꿈’을 듣고 있는 한창우 마루한 회장의 눈가가 갑자기 촉촉해졌다. 코끼리바위에서 일본행 밀항선에 몸을 실었을 때가 생각나서일까.

‘헛된 꿈은 독이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는 부분에선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던 당시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도 당시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현해탄에 몸을 실었다. 숱한 고생 끝에 반세기 만에 그는 일본 내 거부 반열에 올랐다. 당시로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눈은 세계로 가슴은 조국으로.’ 재일교포 기업인 한 회장의 인생철학이다. 올해는 그가 태어난 지 정확히 80년째 되는 해다. 그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거부다. 포브스 집계에 따르면 올해 그는 일본 내 17번째 부자로 재산이 17억 달러(1조8841억 원)에 달한다. 한 회장이 경영하고 있는 마루한은 현재 일본 전역에 260여 개의 점포와 1만3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업계 최대 파친코 기업이다.
한창우 회장(오른쪽)과 아들 한유 마루한 사장
한창우 회장(오른쪽)과 아들 한유 마루한 사장
마루한은 연 매출 30조 원의 일본 내 20대 기업으로 성장했으며, 그보다 많은 재산을 보유한 재일교포 기업인은 5위인 마사요시 손(한국명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 12위인 마사요시 미키(한국명 강정호) ABC마트 회장뿐이다. 한 회장의 재산은 올해 우리나라 5위 부자로 랭크된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번에 한 회장이 설립하는 재단의 정식 명칭은 ‘한창우·나가코 교육문화재단’이다. 나가코는 그의 부인 이름이다. 이 재단은 그가 지난 1990년 일본 내 설립한 한철문화재단(옛 한국문화연구진흥재단)과 협력을 통해 한·일 양국의 미래를 짊어질 우수 인재를 공동으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한창우·나가코 교육문화재단은 평소 그가 입버릇처럼 말해온 고국 사랑의 결실이다. 그가 교육재단을 통한 인재 육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돈 없고 빽 없어 설움 당하던 지나온 상처가 너무도 깊게 패였기 때문이다.

1947년 10월 20일 새벽, 몸이 얼어버릴 것 같은 추운 날 삼천포에서 출발한 고기잡이배 하나가 현해탄을 넘어 일본으로 향했다. 밀항을 감시하는 일본 해양경시청의 헬리콥터에 걸리기라도 하면 그날로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아간다. 그날 그 배 한쪽에 몸을 실은 소년 한창우의 품에는 달랑 쌀 두 되와 콘사이즈 영어사전이 전부였다.

한 회장은 어린 시절의 자신에 대해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머리 좋은 그저 그런 시골 아이’라고 설명한다. 삼천포 히노데(日出)소학교 당시 그는 1~6학년까지를 모두 1등으로 졸업했다. 당시 일본 왕실이 주는 장학금까지 받아 대구사범학교, 진주사범학교와 같은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 형편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어느 날 친형이 ‘창우야 이런 시골에서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징용 가 모은 돈이 있으니 우리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나자’라고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머니도 ‘부모 곁을 떠나서 일본으로 가는 게 너에겐 어쩌면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라고 말씀하셨고, 때마침 저도 좌익으로 몰려 서북청년단에게 쫓기는 상황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옛 삼천포 코끼리바위를 출발한 배는 이틀 후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다.

“10월 22일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을 때 풍경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고향 삼천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일본을 보니 그제야 세상에 홀로 내던져진 제 자신의 현실을 정확하게 알게 됐죠. 일단 형이 살고 있는 도쿄를 향해 무작정 발걸음을 내달렸습니다.”

한 회장의 일본 내 정규 학력은 호세대 정치경제학과다. 메이지대나 주오대 등도 진학할 수 있었지만 그는 조선인 학생을 가장 많이 뽑는다는 호세대를 선택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그에 손엔 졸업장 외에는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솔직히 당시 조선인의 신분으로 일본 기업에 취직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사업을 시작한 것도 순전히 취업이 어렵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마르크스와 마오쩌둥 사상에 경도돼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던 중 유학 경비나 마련할까 하고 시작한 파친코 아르바이트가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내 인생에 차별은 없다.’마루한 직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한 회장의 경영철학이다. 일본 경영학계는 마루한이 급성장한 배경을 ‘수평적인 조직문화’에서 찾는다. 마루한에서 직급별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실력으로 승부하는 곳이 마루한이다. 말단 직원의 성공 사례 하나까지도 직원 교육용으로 활용할 정도로 마루한의 직원 관리는 독특하다. 전 지점을 화상으로 연결하는 월요 회의도 격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 회장 스스로도 수행 직원 하나 없이 지점을 방문하는 것이 일상이 돼 버렸다. 이것이 바로 일본 경영학계가 놀라움을 표시하는 마루한이즘(maruhanism)의 요체다.

“제 자신이 워낙 차별 속에 성장하다 보니, 직원들만큼은 공평하게 대합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학력, 성별에 따라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요즘은 도쿄대, 와세다대, 게이오대 출신 신입 직원들도 많이 뽑고 있지만 일절 다른 직원과 차이가 없습니다.”

화제를 다시 교육재단 설립으로 돌렸다. 그는 장학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손경섭, 유강민 연세대 지구시스템학과 교수, 마지막으로 큰아들 한철 씨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집안 환경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던 차에 어느 날 한 사업가가 찾아왔어요. 삼천포에서 정미업을 해 크게 성공한 손경섭이라는 분이었죠. 오히려 그분이 ‘창우는 꼭 진학시켜야 합니다. 제가 돈을 대줄테니 중학교에 보내죠’라고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분 덕분에 지역 명문인 구제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죠. 해방 후 그분은 삼천포읍장까지 되셨지만, 6·25 전쟁 중 인민군에 처형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마운 분이죠.”

옛 생각에 젖은 한 회장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손경섭’이라는 이름 석 자를 꺼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가 유 교수를 후원하게 된 것도 될 성 부른 나무를 알아보는 손씨의 마음을 느껴서다. 유 교수가 한 회장을 만난 것은 일본 교토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난 직후다.

“이 사람이 갑자기 ‘회장님, 너무 신세를 졌습니다. 반드시 제가 받은 돈을 갚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제가 ‘(내 돈을 갚을 바에는) 차라리 앞으로 당신이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라’고 말했습니다.

그 뒤로도 많은 유학생들을 도와줬는데, 그것이 나를 믿고 도와준 손경섭 선생님께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했죠. 그게 지금까지 왔네요.”

한 회장의 인생에 가장 힘든 시기는 큰아들 한씨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낼 때였다. 1978년 여름 고베시 유마온천 인근 골프클럽에서 골프를 즐기고 있던 그에게 메모 용지 하나가 전해졌다.

‘아들 철이가 사고를 당했습니다. 당장 연락 바랍니다. 지배인 스즈키.’

당시 큰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미국으로 홈스테이를 떠난 것이 그에게는 마지막 여행이 됐다. 요세미티국립공원을 관광하던 중 700여 m의 낭떠러지에 발을 헛디디면서 그는 유명을 달리했다.

키 180cm에 유도 초단인 한씨는 어려서부터 한 회장을 닮아 머리가 총명해 후에 회사 경영을 맡길 정도로 한 회장의 기대가 컸었다. 믿었던 큰아들의 죽음으로 그는 2년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실의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씨가 쓴 ‘내가 지역의원이 되는 꿈’이라는 문집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꼭 미네야마에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 반드시 처음에는 초등학교를 만들 것이다. 다음에는 고가도로를 만든다. 공민관도 세우고, 초등학교에 50m짜리 수영장도 만들 것이다. (후략)”
한창우 회장(왼쪽)이 아들 한유 씨와 함께 밀항선을 탔던 코끼리바위를 바라보고 있다.
한창우 회장(왼쪽)이 아들 한유 씨와 함께 밀항선을 탔던 코끼리바위를 바라보고 있다.
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큰아들의 글을 읽은 순간 그의 가슴 한편에 슬픔이 몰려왔다. 초등학교 3학년이 쓴 글에서 한 회장은 자신의 사회적 소명을 찾았다. 큰아들이 미네야마 지역의원이 돼서 하고 싶었던 일을 그는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대한민국을 위해 쏟아 붓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부터다.

한 회장은 1990년 사재 30억 원을 털어 한철문화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한국 역사와 문화 바로 알리기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5월 2일 경남 사천에서 열린 교육문화재단 창립 행사에는 지한파 여배우 쿠로다 후쿠미(黑田福美)를 비롯해 NHK, 아사히신문 등 일본 내 유력 미디어가 모두 취재를 나올 정도로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한 회장은 이 재단을 ‘한국의 마쓰시타 정경숙’으로 키울 생각이다. 마쓰시타정경숙은 미래 일본을 이끌어 나갈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마쓰시타 고노스케 마쓰시타전기산업 창업주가 지난 1979년 설립한 인재양성기관으로 현재 일본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바로 이곳을 졸업했다.

한 회장은 사재 60억 원을 출연해 만든 한창우·나가코 장학재단을 통해 연간 50~100명의 인재를 후원할 계획이다. 학술 연구비 보조사업과 학습 기자재 및 교육 환경 개선에도 재단 기금이 사용된다. 한 회장은 고문을 맡으며 실질적인 운영은 현 마루한 사장이자 둘째 아들인 한유 씨가 책임진다.

“재단 설립에 아내인 나가코가 더 적극적입니다. 추후 장학재단이 잘 운영되면 자금 규모와 대상 지역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후원자를 더 많이 확보해 빠른 시일 내 기금을 100억 원으로 늘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돈을 기술적으로 벌어 예술적으로 써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한 회장은 현재 진주 드라마페스티벌, 경남 FC 축구단, 부산대 경헌실업아카데미 등 각종 국내 문화산업도 후원하고 있다.

“제가 교육재단을 서울이 아닌 경남 삼천포(한 회장은 아직도 자신의 고향을 사천이 아닌 옛 지명 삼천포로 부른다)에다 만드는 것은 그만큼 지역 간 교육 불균형 차이가 크기 때문입니다. 삼천포와 같은 지방 도시는 대도시만큼 교육적인 혜택을 받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고향 발전도 도모하고 삼천포 같은 지방 소도시 학생들에게도 충분히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 재단 설립의 취지입니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은 ‘헝그리 정신’, ‘도전 정신’이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사실상 막혀 있는 것”이라며 “한창우·나가코 교육문화재단이 교육 환경을 끌어 올리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했으면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

사천=글 송창섭·사진 이승재 기자 reals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