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허무는 작가 한만영

“나의 명화 패러디 작업은 예술적 허영에 대한 야유”
지난 4월 2일, 서울시립미술관을 부랴부랴 찾았다. 전시 기간을 이틀 남긴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를 보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12월 12일 개관한 이래 넉 달여 지속되는 전시를 차일피일 미루다 그제야 간 것이다. 평일인 데다 전시 끝물이니 한적하겠거니 했던 예상은 정동교회 앞에서 보기 좋게 빗나갔다.

입장권을 사려는 관람객들의 줄이 미술관 아래쪽 정동교회 맞은편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나를 비롯한 이들은 ‘앤디 워홀’을 보러 온 것일까, ‘위대한 세계’를 보기 위해 온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유명한) 앤디 워홀 전에 다녀왔다’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인지, ‘그의 작품 세계를 진정으로 향유하고 싶다’는 바람에서인지.

1970년대 후반 이후 명화를 패러디한 작품을 선보인 한만영 작가는 사람들의 예술적 허영, 특히 서양문화 우월주의를 꼬집는다. 피카소는 알아도 김홍도는 모르고, 그것을 알고 모르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생각에 대한 반발에서 서양 명화를 차용한 것이다. 베르메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은 인물 외에 배경은 생략하고 주변을 흐리게 처리한 후 화면 하단에 우회전 금지 교통표지판을 작게 그려 넣었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두상을 실루엣으로 형상화한 후 얼굴은 네거티브 필름 이미지를 중첩시키고,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는 인물의 윤곽 일부분만 묘사하고 주변은 뿌옇게 처리하는 등 다양한 변주로 명화를 표현한다. 이런 그의 작품을 가리켜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명화가 지닌 아우라를 유쾌할 정도로 일시에 제거시키고 자신의 회화적 문맥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만든다.
<Reproduction of time-Blue land>, 2005년, Acrylic on Canvas & wire, 309x218.3cm
, 2005년, Acrylic on Canvas & wire, 309x218.3cm
, 2005년, Acrylic on Canvas & wire, 309x218.3cm">
일종의 비판적 편집증이랄까. 명화가 누리고 있는 기념비성을 일시에 허물어뜨리고 일상의 사물로 끌어내리고 있는 점에서 말이다. 그의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신선한 매력은 이미 만들어진 권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회화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음에서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내 식대로 보고 내 식대로 표현한다

그의 작품 세계를 그래프로 그려보자면 X축은 공간에서 시간으로, Y축은 서양 명화에서 고구려 벽화, 토우와 금관, 조선 시대 풍속화 등으로, Z축은 회화, 입체, 조각으로 나열할 수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서양화가들의 유명 작품을 소재로 <공간의 기원> 연작을, 이후에는 한국적 회화 요소를 활용한 <시간의 복제> 시리즈를 선보이는 데, 이때 박스와 청계천 시장에서 구한 낡고 오래된 시계 부품, 깃털, 불상 등을 활용함으로써 2차원의 평면 회화에 머물지 않고 3차원의 입체적인 오브제도 만들었다.

최근에는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캔버스 삼아 그 위에 마그리트, 앤디 워홀, 모네, 리히텐슈타인, 백남준 등의 작품들을 콜라주한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열린 개인전에 전시된 작품들을 보노라면 기존 그의 미술관을 관통하며 시도한 작품 세계는 젊은 작가 못지않은 참신함과 감각이 느껴진다. 청각적인 대상인 악기에 시각적인 명화를 담아낸 작업 방식은 한 작가의 다채로운 시각과 관점을 보여주는 듯했던 것. 지성적인 작가로 일컬어지는 만큼 그의 작품은 조형적 미술로서만이 아니라 사회, 문학, 예술의 전반적인 이해와 사고를 요구한다.
<Reproduction of time 92-T1>, 1992년,  Mixed Media in Box, 347x173x36cm
, 1992년, Mixed Media in Box, 347x173x36cm
, 1992년, Mixed Media in Box, 347x173x36cm">
“나는 누군가의 주관을 차용한다거나 타인의 관념을 휴대하고서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싶지 않다. 내 식대로 보고, 그리고 내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본다는 것은 좀 거창하게 말해 과학이 낳은 기계 문명, 또는 그것들 나름대로의 인습과 획일성에 거역하며 그 속에서 개인의 의미를 재탈환해 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작가는 최근 작업에서도 이런 기본적인 작업적 개념의 끈을 잇고 있다.

‘바이올린은 조형적 요소의 오브제로 차용됐으며 더 이상 실제하는 바이올린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린으로서의 정체성에는 변함이 없다. 이것은 명화 이미지를 파괴하고 해체해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관념의 틀이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마그리트나 앤디 워홀 등의 작품 이미지는 그대로 남는다. 시각의 청각화, 청각의 시각화를 시도한 이러한 작업 과정은 무한 공간을 담은 박스에 콜라주 된 바이올린을 설치하면서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 명화 이미지를 대중 기호로, 대중문화를 고급문화로 변환시켜 무거운 철학적 주제를 가벼움으로, 가벼움을 심오함으로, 현실을 비현실로, 비현실을 현실로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고정관념을 모순과 의외의 공간으로 조율해 전혀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다.’ - 작가의 글 중에서

화가는 멀티 플레이어가 돼야 한다

한 작가는 스스로 말하기를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이런 그의 욕구를 비교적 잘 충족시켜 주는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그가 좋아하는 인물 중 한 사람. 어떤 특정 분야만 집요하게 논하는 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예술 등을 포괄한 탐구력과 관조가 반영된 프리드먼의 책은 모두 섭렵했을 정도다.

“산업혁명 이후 볼트공은 볼트만 잘 조이면 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전문가랍시고 자기 분야에만 능통하면 된다고 여기지만 한 분야에 정통하려면 횡과 축으로 두루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융합을 강조하는 시대가 아닌가. 비빔밥 문화에 대한 가치평가의 기준이 바뀐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전에는 이도저도 아닌 것으로 치부됐지만 요즘에는 다양한 요소를 혼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비빔밥적인 사고와 문화를 추구한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미술사나 유명 화가의 작품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르네상스 시대로 돌아가라’는 말을 종종 한다. 당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의사이자 과학자이자 예술가가 아니었던가. 그림, 손재주만 가지고는 안 된다. 다방면에 다재다능한 멀티 플레이어가 돼야 한다.”
“나의 명화 패러디 작업은 예술적 허영에 대한 야유”
그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바로 그림 그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구상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미술이란다. 기술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작가로서 존재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해박한 지식, 상상력 등 이런 게 모두 종합돼서 유추하고, 미래를 보는 눈과 작가로서의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이야기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은 필수다.

관람자 또한 마찬가지다. ‘미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즐기는가’에 대한 질문에 당당히 말할 수 있는 미술 애호가가 얼마나 될까. 작품을 볼 때에는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기가 보고 느끼는 것, 자기 해석도 중요하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만 파악하려 하고, 유명 작가의 전시에 다녀왔다는 허울에 얽매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술도 물질만 마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마시고 분위기를 마시는 것이지. 루브르 박물관에서 왜 다빈치의 <모나리자>만 찾아 정신없이 달려가는가. 그 작품만 보고 와서 루브르 박물관에 다녀왔다고 말하는가. 예술은 향유하고 즐기는 데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라는 한 작가의 말이 유독 잊히지 않는다.

글 정지현 미술전문 칼럼니스트·사진 김기남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