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화가 함섭 & 박민수 전 춘천교대 총장

한지 화가 함섭(왼쪽)과 전 춘천교대 총장 박민수
한지 화가 함섭(왼쪽)과 전 춘천교대 총장 박민수
함섭은 한지와 닥나무 등 가장 한국적인 소재를 사용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다. “좋은 그림은 화가의 내장 냄새까지 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가 최근 고향인 춘천에 갤러리와 작업실을 마련했다. 60년 지기인 시인 박민수 전 춘천교대 총장이 새로운 각오로 캔버스 앞에 선 그를 찾았다.

작가 함섭과 박민수 전 춘천교대 총장은 춘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다. 60여 년의 세월을 보내는 사이 소년들의 머리에는 서리가 내렸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다. 되돌아보면 두 사람은 참 비슷한 삶을 살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화가로 이름을 날렸던 함섭은 홍대 미대를 나와 한때 교편을 잡았지만 전업 작가를 선언하고 지금은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했다. 문학청년이던 동무는 교대를 나와 초등학교 교단에 섰지만 더 큰 꿈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해 대학 총장이 되고 시인이 됐다.

고향을 떠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갔던 두 사람이 고향땅 춘천, 함섭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60여 년 다른 듯 닮은 삶을 살아온 오랜 친구의 이야기는 작가가 교사 생활에 작별을 고하고 전업 작가로 나선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말이 쉬워 전업 작가 선언이지 수입이 안정된 교단을 떠난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엄동설한 허허벌판에 홀로 선 기분이 그와 같을까. 눈앞에 가시밭길이 뻔히 펼쳐지는 데도 불구하고 교단을 떠난 데는 좋은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던 때였다.

그림에 대한 열정에 영감 얻어 탄생한 ‘함섭 그리고 <신명>’ 연작시

박민수 전 총장(이하 박 총장) : 고향에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한 화가였지만, 전업 작가로 나선다니까 걱정부터 됩디다. 당장 어떻게 사나 걱정이 돼서 작업실을 찾아갔는데, 작업실이라는 게 얼마나 옹색하던지. 반지하방인가 그랬는데 위층 하수구 소리가 그대로 들리더라고요. 화실은 볼품이 없는데 이 친구 눈빛만큼은 예사롭지가 않았어요. 예전과 다르더라고요. 단단한 표정에서 각오가 느껴졌어요.

함섭(이하 함 작가) : 1969년부터 1990년까지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어요. 사립고교 선생이라는 게 한계가 있더라고요. 승진을 해봐야 결국 상머슴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가가 되려고 미대에 갔지, 상머슴 되려고 간 건 아니잖습니까.

박 총장 : 그래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겁니다. 당장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테니까요. 제가 초등학교 선생을 해봐서 아는데, 그때 연금도 얼마 안 됐을 겁니다. 90만 원이나 됐나.

함 작가 : 정확히 98만5000원이었어요. 200만 원은 있어야 생활이 가능했을 땝니다. 벌어놓은 것도 별로 없을 때였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런데 연금이 늘 똑같이 나오는 게 아니더라고요. 어떤 때는 많이 깎여서 나오기도 해요. 그게 아내 모르는 비자금인데, 그게 깎이니까 화가 나기도 하대요. (웃음)

박 총장 : 사실 이 친구가 고등학교 때부터 우리 동네에서는 날리던 화가였어요.

함 작가 : 처음부터 그림을 잘 그린 건 아니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마라톤을 했어요. 작은 아버지께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함기용 씨거든요. 작은 아버지를 보며 마라토너의 꿈을 키웠죠. 그때까지 미술에서 한번도 수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박 총장 : 아마 그때 수를 받았으면 지금의 함섭은 없을 거요.

함 작가 : 그럴 겁니다. 미술을 하게 된 건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 영향이 컸어요. 한번은 배구공을 갖다 놓고 그려보라는 겁니다. 바람이 팽팽하게 들어간 공이었는데, 전 그게 재미없고 심심해서 바람 빠진 공을 그렸습니다. 선생님이 제 그림을 보고 꿀밤을 먹이며 웃으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그림을 벽에 거시더라고요. 그게 기분이 좋아서 그림을 그리게 됐습니다.

박 전 총장은 누구보다 친구의 그림을 좋아하고, 그를 자랑스러워했다. 친구에 대한 애정을 담아 몇 편의 시를 쓰기도 했다. 특히 전업 작가로 나섰을 당시 친구의 불꽃 같은 열정에 영감을 얻어 ‘함섭 그리고 <신명>’이라는 연작시를 썼다.

박 전 총장의 질박한 시어를 보고 작가의 장모가 껄껄 웃으며 ‘별 소릴 다 듣는다’고 지청구를 놓긴 했다. 하긴 ‘잡놈은 잡놈이야 발가벗고 불알 흔들며 꿀꺽꿀꺽 / 독한 소주 퍼마시고, 에라,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으로 시작해 ‘불알이 뜨거운 줄도 모르고 흔들흔들 흔들어대는 그 놈은 / 잡놈은 잡놈이야 …어쩌자고 내 불알 덩실덩실 / 덩달아 춤을 추는데’로 끝나는 시가 예사롭지는 않다.

“모든 예술은 사랑하는 데서 출발”
김환기, 박서보 선생에게 배운 건 테크닉이 아닌 ‘작가 정신’

시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며 뒤늦게 생각난 듯 함 작가는 장모와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장모는 남다른 데가 있는 분이었다. 전업 작가로 나서고 여전히 힘들던 때, 한번은 화구와 방세 등을 계산해 보았더니 하루 7만 원 정도가 들었다.

그가 장모에게 “오늘 7만 원 버렸습니다”라고 하소연했더니 장모가 대뜸 “자네한테 실망했네”라고 하더란다. 이어 장모는 “남자다워서 사위 삼았더니 남자가 왜 그리 쩨쩨한가”라며 지청구를 했다. 그러면서 “내일부터 그림 그만두고 복덕방이나 차리라”고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에게 쐐기를 박았다.

함 작가 : 죽비를 맞은 듯했습니다. 장모님 덕인지 그 뒤로 그림이 잘 팔렸습니다. 제 그림은 외국에서 더 많이 팔렸는데 유럽과 미국에 500여 점, 아시아에 500여 점이 팔렸습니다.

박 총장 : 이 양반처럼 한지를 소재로 한 작가는 많았어요. 그런데 그분들 작품은 소재는 한지인데 그림은 서양화더라고요. 또 하나 지금의 함섭을 있게 한 것은 정신이 아닌가 해요. 함섭의 그림을 보면 한국적인 정서, 한국의 정신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서양의 아류가 아닌 새로운 한국의 화풍을 스스로 개발한 거죠.

함 작가 : 한지 화가로 자리 잡은 데는 그만한 배경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 때 김환기 선생, 박서보 선생 같은 대가들에게 배웠습니다. 3, 4학년 때는 박서보 선생 작업실에 있었는데 한번은 어떤 선생님이 제 그림을 보고선 ‘박서보, 요즘 그림 많이 좋아졌네’ 그러는 겁니다. 그 뒤로 제 그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다 조선 시대 생활용품의 75% 이상을 한지로 만들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죠.

그만큼 한국적인 소재도 없다 싶었습니다. 거기에 제가 배운 현대미술을 접목시킨 거죠. 제 작품은 이를 테면 고대와 현대의 만남을 통해 탄생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돌이켜보면 그분들에게 배운 건 테크닉이 아니라 작가 정신이었던 듯합니다.

박 총장 :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이 있잖아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 이상을 투자해야 한답니다. 이 친구가 그래요. 이 친구는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그림만 그립니다. 온 에너지를 화폭에 쏟아 부은 뒤 술을 마셔요. 그럼 생기가 돌아요.

200호 이상 대작으로 화업 인생 2막 열 것

함 작가 : 우리가 술을 좀 많이 마십니다. 박 총장이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술을 끊었는데, 그 전에는 소주를 박스째 마셨습니다. 그렇게 술을 마셔도 다음날이면 작업을 합니다. 워커홀릭에 가까운데 그 덕에 가족 여행을 못 갑니다. 아무리 좋은 해변을 가도 하루가 지나면 엉덩이가 들썩거립니다. 하릴없이 노는 게 허무한 거죠.

박 총장 : 그런 점에서 저랑 이 친구가 비슷한데 저도 가족 여행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큰마음 먹고 인천으로 가족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소화도 안 되고 영 불편하더라고요.

함 작가 : 작가는 그런 치열함이 있어야 합니다. 선천적인 재능도 중요하지만 후천적인 노력도 필요한 거죠. 또 하나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됨됨이입니다. 인간 됨됨이가 제대로 된 작가만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로 오래 남질 못해요. 그 됨됨이가 뭐냐. 바로 사랑입니다. 제대로 된 인간은 식물이든, 동물이든 깨어있는 마음과 사랑으로 볼 줄 압니다. 그걸 표현하면 예술이 되는 겁니다.

박 총장 : 예술 하는 사람들에게 감성은 필수죠. 일부 작가들은 끊임없이 머리로 생각하고 테크닉만 중시하기도 합니다. 정신이 결여될 수밖에 없는 거죠.

함 작가 : 좋은 그림은 작가의 내장 냄새까지 그대로 맡을 수 있는 그림입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지만 작가라면 자기만의 색깔이 중요한 거죠. 저는 작품을 할 때 제가 모든 소재를 재가공합니다. 염색도 홍화씨나 치자, 비낭 같은 천연재료와 천궁, 용뇌 같은 한약재를 함께 씁니다. 이런 한약재는 머리를 맑게 하고 잡벌레가 안 생기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박 총장 : 얼마나 부지런한지 여기 온 지 보름밖에 안됐는데 벌써 작품 하나를 완성했어요. 요즘 작품은 예전 작품과 좀 달라진 듯해요. 주제 의식이 훨씬 명료하고 정리가 됐다고 할까요. 숨은 그림을 찾는 재미도 있고, 작품에 생동감이 느껴져서 참 좋습니다.

함 작가 : 그렇게 보시는 분이 많습니다. 새 터전을 잡았으니 작품에만 매달려야죠. 이제부터는 200호 정도 대작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함섭의 작품은 국외에서 더 유명하다. 박 전 총장은 그 이유를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는 데서 찾는다.
함섭의 작품은 국외에서 더 유명하다. 박 전 총장은 그 이유를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담고 있다는 데서 찾는다.
작가 함섭은 춘천 시대를 열며 치열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그는 작가로서의 삶을 마라톤에 비유했다. 마라톤에서는 35km를 마의 지점이라고 부른다. 그 지점을 넘어야 완주가 가능하다.

작가로서 그는 지금이 마라톤에 비유하자면 35km를 지나 메인 스타디움을 뛰는 형국이라고 했다. 마라톤에서 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순위가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작가로서 어떻게 마무리를 하느냐에 따라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그는 그림에 대한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기 위해 춘천행을 결심했다. 상수동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지금, 작가가 전업 작가를 선언하던 때로 되돌아간 듯했다.

글 신규섭·사진 이승재 기자 wawoo@hankyung.com